중증 안면인식장애가 있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머리가 나쁘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도무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아내와 맞선을 봤을 때인데, 선을 보고 며칠 뒤 다시 만날 때까지 아내의 얼굴이 영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다행히 재회의 자리에서 얼굴을 본 순간 아내를 알아봐 별다른 실수는 없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사람을 못 알아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낯선 가수나 배우를 보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저 애 신인이야?” 했다가 망신을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연예인이 헤어스타일만 바꾸고 나와도 알아보지를 못하니 요즘 에이핑크, 걸스데이, EXID 등 걸그룹이 아무리 인기가 있다고 한들 그 멤버들의 얼굴을 구별해내기란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얼굴이 각인되는 경우도 있고, 대부분은 두세 번 보면 차츰 기억에 저장된다. 그러나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아무리 두 눈 부릅뜨고 쳐다보며 얼굴을 기억에 담아두려 노력해도 잘 안되니 불편하고 두려운 게 사실이다.
몇 해 전에야 나의 이런 상황이 안면인식장애, 그것도 중증임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머리가 아주 나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쨌든 나의 텔레비전에 신인배우들(?)이 넘쳐나고, 사람을 만나면 미소 띤 얼굴로 두 눈을 마주치며 대화하는 것이 몸에 밴 것은, ‘안면인식장애 때문’이 아니라 ‘안면인식장애 덕분’이다.
/몽당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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