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그리고 단상 123

달맞이장구채

달맞이장구채 벌써 삼사 년 전이야. 사위가 어스레해지던 무렵 넌 오가는 이 드문 길섶에서 박꽃보다 희디흰 웃음을 띠고 있었지. 한눈에 반한다는 게 그런 거였어. 붙들지 않았음에도 걸음을 멈춘 나는 갈 길 멀다 짐짓 딴청 부리면서 널 마음에 품어버렸으니까. 물어물어 네 이름을 알았고 먼발치에서나마 고운 얼굴 볼 수 있으려나 서너 해 그 길 찾아 서성였는데 넌 홀연히 모습 감춰버렸더라. 그러다, 아, 이번에야 알았어. 밝은 때에는 들킬세라 날 외면했던 거야. 거친 땅을 억세게 움켜쥔 고향 가시내 같은 달맞이장구채! 너와 애틋하게 눈 맞추고 올려다본 하늘엔 낮 동안 하얗게 야위었던 조각달이 산허리 감도는 이내에 기운을 차리고 있구나. /몽당연필, 2023 0707/

개망초

머나먼 북미 출신이라면서 이름은 어쩌다 망초보다 못한 개망초 대양 건너 이국땅에 귀화하매 개떡, 개복숭아, 개소리, 개꿈, 질 떨어지고 쓸데없다 푸대접하는 개- 족보에 오르고 말았구나 데이지 혈통이라니 본명 또한 그 언저리일 터 고향에서의 이름을 버린 것이냐 빼앗긴 것이냐 아쉽고 서운한 개명이지만 기껍지 않기로는 망초도 매한가지 그나마 너의 자태 고운 꽃에 오가는 이들이 눈을 맞추나니 이름 부끄럽다 외면하지 말고 그렇게 하늘 향해 활짝 웃고 있으렴 /몽당연필/

슬픈 꽃

씨 뿌리거나 이종할 때 진심으로 풍년 기원하는 것이야 농부의 마음 아니겠나. 그런데 이 일을 어쩐담, 작년에 재미 좀 봤다고 너도나도 심은 양배추가 그만 정말로 대풍이 들고 말았다. 이거 제하고 저거 떼면 남는 것 없을지라 농부는 수확을 포기해 버렸다. 땀방울도 같고 뚝뚝 떨군 눈물도 같은 양배추들이 봄 다 지나도록 주인을 못 만났다. 갈 곳 잃은 양배추 덩이 덩이마다 꽃대를 올려 샛노란 꽃을 매달고 있다. 반갑고 예쁜 꽃이 아니라, 이 집 저 집 풍작이어서 허기진, 여리고 슬픈 꽃이다. /몽당연필/

부모님

사실 부모님 원망 적잖이 했다. 하필 이 깡촌 무지렁이인가, 이웃들 앞다퉈 대처로 떴는데 뭐 있다고 궁벽한 두메를 지키고 사나.... 그러다 어느 순간 철이 들었다. 내가 그냥 큰 게 아니구나, 당신들의 몸과 영혼을 양분 삼아 뼈와 살이 자라고 얼간이를 면했구나.... 자신의 씨앗을 보듬어 싹 틔운 고목을 본다. 심재(心材)는 이미 썩어 거름이다. 어머니도 나를 저렇게 품어 키우셨겠지. 아버지도 스스로를 거름으로 내놓으셨겠지.... /몽당연필/

12월의 눈, 제망매가(祭亡妹歌)

작은형에게 12월의 눈은 설렘도 반가움도 없단다 네 번호가 뜬 전화 반갑게 받았다가 낯선 이가 전하는 울음 섞인 비보에 허둥지둥 너에게 달려가던 그해 12월 인제 가는 길을 더욱 아득하게 한 것이 눈이었고 널 보내는 길을 자꾸만 막아서던 것도 눈이었거든 꽃피는 4월에 와서 차디찬 12월에 간 넷째야 소복이 쌓이는 12월의 눈을 보는 작은형의 소망은 다섯 손가락 중 넷째 손가락을 먼저 잃으신 어머니의 참척(慘慽)이 덧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아! 월명사가 이런 마음이었나 보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같은 나뭇가지(부모)에 나고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몽당연필/

너희가 옳았다

너희가 옳았다 어릴 적 민들레 제비꽃 앞다투던 골목길이 어느 핸가 돌담 밑동까지 아스팔트에 덮여 질경이도 달개비도 앉을 자리를 못 잡았는데, 어떻게 뿌리 내렸는지 분꽃과 까마중은 용케도 골목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이것들을 누가 거름 줘 돌보기는커녕 외려 경운기와 트랙터가 오가며 소란 피우고 이집 저집 자식들 자동차도 험상궂게 달리며 겁이나 줬으련만, 겨울 초입까지 온전해서 꽃 피우고 열매 맺었다. 생각건대 생존 전략이 괜찮다. 타고난 자태가 소박하여 사람들 눈에 띄지도 거슬리지도 않았으니, 우락부락한 돌담 위세를 빌려 수십 마력 괴물 기계들이 몸 사리게 했으니.... 그렇게 분꽃과 까마중의 방식이 옳았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