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그리고 단상

다섯 남매의 '아주 특별한' 아버지 이야기

몽당연필62 2015. 9. 22. 09:38

 

북에서 오신 아버지는 평범한 농민으로 일생을 사셨으나 그 일생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소를 끌고 넷째아들이 리어카를 모는 이 사진은 1982년 둘째아들이 촬영한 것입니다.

 

 

다섯 남매의 ‘아주 특별한아버지 이야기

 

누구에겐들 아버지가 특별하지 않겠습니까만, 제 아버지는 앞에 아주 특별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좋을 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습니다.

아버지는 1932년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태어나 만18세 소년이던 1950년 단 몇 주 동안의 군사훈련을 받고 인민군으로 6.25전쟁에 투입됐다가, 그해 9월 충북 옥천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대대병력 중 운 좋게 살아남은 30여 명의 인민군과 함께 유엔군에 귀순하셨지요.

귀순을 했음에도 포로수용소에 보내졌던 아버지는 거제를 비롯한 수용소를 전전하다 반공포로 석방 때 북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고 남쪽을 택해 석방되셨어요. 남쪽에 남았지만 살아갈 일이 막막할 뿐이었던 아버지는 이번에는 국군에 입대합니다. 인민군으로 죽음의 전쟁터에 끌려나왔던 아버지가, 휴전이 됐다고는 하지만 언제 전쟁이 다시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번에는 살아가기 위해 국군이 된 것입니다. 총부리를 한 번은 남으로, 또 한 번은 고향과 혈육이 있는 북으로 겨눠야 하는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인민군과 국군으로 두번 총을 든 기구한 삶

 

군복무 후에는 전남 영암에 정착해 마을 유지의 보살핌으로 1959년 결혼을 했고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그렇게 41녀를 낳아 기르면서 흐르는 세월과 함께 억센 함경도 말투가 전라도 사람들의 말투를 닮아갔고, 부모형제와 고향을 그리는 마음도 차츰 엷어져 갔지요. 그러나 장남과 차남인 형과 제 이름을 아버지의 고향 영흥에서 따와 영선’ ‘흥선이라 지으신 것을 보면, 고향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자식들의 이름에 담아놓으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던 19836월 마지막 날 밤 방송되기 시작한 이산가족 찾기 TV생방송은 아버지의 가슴을 아프게 헤집어놓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헤어져야 했던 가족들의 울부짖음이 바로 당신의 것이었고, 방송사 건물과 여의도 바닥을 덮은 벽보와 피켓들이 당신의 피맺힌 사연이었던 겁니다. 아버지도 서울에 사는 큰아들(영선)이 방송국 앞에 벽보를 붙이거나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등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고향 인근 출신 몇 사람을 만나게 됐을 뿐 혈육 소식을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어느덧 환갑이 지나고 칠순을 치렀으며 네 해 전 팔순을 넘긴 아버지는 그 세월 동안 이산가족으로서 상봉을 신청하고 고향방문을 기대했지만 이는 그야말로 희망과 절망의 연속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북한 가족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으니 상봉단에 뽑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지요. 그래도 1998년 금강산 관광길이 열리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될 때는 금방이라도 고향에 달려가 혹시 생존해계실지도 모르는 부모님과 세 여동생을 만날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셨어요.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할 것을 예감하셨을까요? 아버지를 비롯한 30여 분의 영암지역 이북출신 실향민들은 20여년 전 자신이 죽으면 묻힐 묘지를 마련해 놓았답니다. 월출산 기슭에 북녘 고향을 향해 조성된 이 묘역은 이름마저도 망향(望鄕)의 동산이지요.

아버지는 작년 7월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로 12개월 동안이나 와병하셨습니다. 그리고 올해 91일이니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이산가족찾기센터에서 북측 가족의 생사를 확인할 의사가 여전히 있는지 확인하는 전화가 왔고, 저희가 그렇다고 하자 정부의 협력기관인 유전자연구소에서 아버지의 유전자 검체를 확보해 가더군요.

 

남과 북을 이어줄 당신의 유전자와 아들들의 이름

 

그로부터 딱 두 주일이 지난 15일 아버지는 끝내 북쪽에 계신 가족(부모님은 돌아가셨을 테고, 손아래 여동생 3명이 있음)의 생사도 모르고 고향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신 채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참으로 조용하고 정갈하셨던 성품처럼, 자식들 신경 쓸 일 없게 돌아가실 때도 모든 것이 깔끔했습니다.

과연 통일은 될까요? 아니, 이산가족의 아픔만이라도 치유될 수 있을까요? 아버지께서 비록 눈을 감으셨지만, 불과 두 주일 차이로 당신의 유전자 정보를 국가기관에 남겨놓으셨으니, 운이 좋으면 북에 계신 아버지의 여동생인 세 분 고모님들과의 상봉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언젠가는 아버지의 고향 함경남도 영흥군을 찾아가고야 말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께서 저희들의 이름 영선’ ‘흥선에 영흥을 유전자처럼 담아놓았던 엄정한 뜻이며, ‘아주 특별한아버지를 여읜 저희의 슬픔을 위로하고 어루만져주신 많은 분들께 보답하는 길일 테니까요. 그 날이 반드시, 빨리 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2015년 9월

 

<아들> 김영선 흥선 명선 정선   <딸> 복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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