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않은 편지

[공처가의 편지 11] 시금치를 언제 먹어봤더라?

몽당연필62 2013. 2. 4. 14:09

 

시금치를 언제 먹어봤더라?


 

혹시 언론이 주부의 명절 증후군을 부추기는 것 아니야? 언론에서 자꾸 명절 증후군 어쩌고 하니 여자들 시댁 가는 것이 더 싫어지는 게 아닌가 싶어. 게다가 얼마 전엔 시부모의 명절 증후군이 어떻고 하는 기사까지 나왔더라고. 며느리 증후군이 센지 시어머니 증후군이 센지 싸움 붙여보자는 수작이야 뭐야?

 

 

 


어째 하루하루 날짜 가는 것이 주머니에 송곳 넣고 다니는 것처럼 불안하더니, 마침내 그 원인을 알아내고야 말았어. 설날이 다가오고 있었던 거야.

설날이면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이요 일가친척의 사랑과 고향의 정을 흠뻑 느낄 수 있는데 왜 불안하냐고? 에이, 당신도 좀 솔직해져 보시지? 사실은 나보다 당신이 더 불안하고 골치까지 지끈거리는 상황 아니야? 어디 한두 해 겪어봤나, 척하면 착이고 안 봐도 비디오다!

텔레비전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 김남주가 일찍이 '시월드'라는 용어를 일반화 했듯이, 결혼한 여자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아마도 ‘시’자 들어가는 말과 사람들일 거야. 시댁, 시집살이, 시부모, 시숙, 시동생, 시누이,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하지 않아? 며칠 안 있으면 우리도 귀성객이라는 이름으로 고향을 찾을 것이고, 며느리인 당신에게 세상은 온통 ‘시’자투성이가 될 텐데, 명절이 반갑다면 그것은 삼척동자라도 모를 리 없는 거짓말이지. 오죽하면 여자들은 ‘시’자가 싫어 시금치도 안 먹는다는 말까지 나왔겠어.

여자들 명절에 시댁 가는 게 절대로 흔쾌하지 않다는 거 나도 잘 알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음식 장만 해야지, 차례 지내면 끝없이 밀어닥치는 친척들 술상 봐야지, 집에서도 하기 싫어 담가놓기 십상이던 설거지 해대야지, 이집 첫째 며느리는 어떻고 둘째 며느리는 저떻고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품평회에 출전해야지…. 그렇다고 남편이란 작자가 일을 좀 거들어주거나 요령껏 눈치껏 힘이 돼주는 것도 아니어서, 친구들 만난답시고 한번 나가면 새벽에 들어오기 일쑤고 그나마 집에 있다한들 들입다 고스톱만 치거나 방구들 짊어지고 텔레비전에 정신을 팔고 있으니 무슨 재미가 있겠어. 며느리들의 명절 증후군이 사회 문제로 비화되는 것도 일리는 있지.

그런데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자고. 남자는 명절이 어디 마냥 좋기만 한줄 알아? 당신! 거대한 주차장으로 돌변한 고속도로에서 졸음과 사투를 벌이며 열 시간 넘게 운전 해봤어? 차례 지내자마자 친정 갈 채비 서두르는 당신의 눈치 아닌 눈치가 내 속을 얼마나 아프게 찔러대는지 모르지? 처가에 가서도 그래. 나 역시 사실을 말하자면 촌수도 잘 모르는 처당숙들과 말 섞는 것이 맞지 않은 옷 억지로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처남들은 아무리 술잔을 부딪쳐도 부모님 용돈 드리는 문제로 언성을 높였던 내 형제들만큼 살갑지가 않으니까. 솔직히 무엇보다 큰 스트레스는, 명절 며칠 전부터 이래 입 삐죽이 내밀고 저래 눈 흘기는 당신 비위 맞춰 무사히 시골까지 모셔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어쩌겠어. 설날 고향에 가서 차례 지내고 부모님과 동네 친척들께 세배하는 것이 우리 전통이고 관습이잖아. 내 부모님이나 당신 부모님이나, 명절이면 누구네 아들 뭐 타고 왔더라 누구네 딸 뭐 사왔더라 하며 손가락 꼽아 자식들을 기다리시잖아. 나라의 수도를 옮기는 문제도 ‘관습 헌법’ 때문에 마음대로 안 되는 세상인데, 하물며 명절에 고향 가는 것이야말로 대대손손 이어져온 본능적 관습 아니겠어? 그러니 우리만 고향 안 가겠다고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고 늙으신 부모님더러 역귀성 하시라고 채근할 수도 없는 일이지.

지금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따져보자고 이러는 게 아니야. 이런 말 안 들어봤어?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상황을 즐겨라’ 하는 거 말이야. 어차피 갈 고향이라면 이왕에 서로 얼굴 펴고 웃으며 가자고. 내가 처가에만 가는 것이 아니듯이 당신도 시댁에만 가는 것은 아니잖아.

 

당신이 눈살 찌푸리고 있지 않으면 장거리 운전하는 나도 덜 피곤할 테고, 당신이 서둘러 친정 갈 눈치 안하면 나도 더 너그러운 남편이 되겠지. 그렇다고 당신이 매사에 먼저 양보하라는 뜻은 아니야. 하도 주부들의 명절 증후군 어쩌고 해서 잠시 열 받아 두서없이 뇌까렸는데, 나도 이래봬도 과일 깎고 설거지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처가에 가면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아닌 재롱둥이 사위노릇도 할 수 있고!

가만…. 그러고 보니 때만 되면 긁어 부스럼 만들 듯 주부의 명절 증후군을 부추기는 언론에 우리의 착한 며느리들이 단체로 놀아나고 있는 것 아니야? 멀쩡한 사람도 아프다 아프다 하면 환자가 되어버리듯이, 아무 문제 없던 주부도 언론이 자꾸 명절 증후군 어쩌고 하니 시댁 가는 것이 싫어지는 게 아닌가 싶어.

게다가 요즘엔 이 못된 언론들이 작당하여 ‘시부모의 명절 증후군도 며느리 못지않게 심각하다’며 떠들고 있더라고. 명절 연휴 동안 며칠 집안이 북적대다가 자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고향에 덩그러니 남겨지는 부모님의 공허함이 너무 커서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 있다나 어쩐다나?

자식들 돌아갈 때 자동차 트렁크가 넘치고 뒷바퀴가 주저앉을 만큼 쌀에 김치에 호박에 바리바리 싸주시며 짓는 웃음 너머로 언뜻 비치는 아쉽고 서운한 마음을 읽지 못하는 것은 아닌데, 그래서 어쩌자고? 며느리와 시부모가 명절 증후군 겪지 않게 아예 귀향을 하지 말라는 소리야? 힘겹게 시댁 찾아 명절 지낸 며느리 위로하는 척하면서 누구 증후군이 더 센지 싸움 붙이자는 수작 아니고서야 언론들이 그렇게 까칠하게 나올 이유가 뭐람? 나 참 열 받으니 덩달아 글발도 받네. 아무튼 우리나라는 이놈의 언론 때문에 되는 게 없다니까….

어느덧 설날이 코앞에 다가왔고 이번에도 부모님은 서울로 올라올 생각이 추호도 없으신 듯하니 피할 수 없는 이 상황을 한번 즐겨보자고. 서울에서 설을 쇠는 사람들이야 귀경길이 무슨 여행길이나 되는 것으로 알고, 고향에 가면 푸근한 정과 휴식에 재충전이 어떻고 하면서 부러워하는데, 그거야 무지의 소치이니 우리가 너그럽게 이해하도록 하세.

그런데 나 요즘 입맛이 별로 없어 걱정이야. 가끔 현기증도 나는 것이, 겨울철이라 싱싱한 푸성귀를 충분히 먹지 못해 비타민 섭취가 부족한 건가? 웰빙 바람이 불면서 다들 제철 농산물이 좋다고 난리던데, 겨울에 먹는 채소라는 것이 대부분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된 것이라 마땅한 게 있어야 말이지. 더구나 설에 장거리 운전 하려면 영양 보충도 좀 해둬야 하잖아.

아, 생각났다! 겨울채소 하면 역시 시금치 아니야? 건강에 최고라는 녹황색 채소인 데다 비타민과 철분을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다잖아.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눈밭을 헤쳐 시금치를 캐다 무쳐주시면 달착지근하면서 쌉싸래한 맛이 오래도록 혀끝에 감돌곤 했지.

가만, 우리 결혼하고 20년이 넘었는데 시금치 먹어본 게 언제였더라? 혹시 당신도 ‘시’자 들어가서 시금치는 식탁에 안 올리는 거야? 그런 거야?

 

몽당연필 / 일러스 김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