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않은 편지

[공처가의 편지 10] 돈 없다고 한숨 쉬는 당신!

몽당연필62 2013. 1. 24. 08:30

돈 없다고 한숨 쉬는 당신!

 

또 하릴없이 나이만 한 살 더 먹고 말았네그려. 앞으로도 살아갈 날이 창창한 판에 나이 운운하는 것이 마뜩찮기는 하지만, 해가 바뀔 때마다 마음이 괜스레 거시기해지는 것은 인지상정인가 보네.

 

 

아무튼 우리 올해는! 돈으로부터 좀 자유로워보세. 그깟 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며 돌고 도는 것이 또한 돈이라는데, 우리는 돈 때문에 너무 힘겨워하며 사는 것 아닌가 싶네. 내가 명색이 작가라고는 하나 글 써서 버는 돈은 한잔 술값도 안 되고 결국 회사에 붙들린 월급쟁이 신세 아닌가. 하니 튀밥 튀기듯 돈 부풀릴 방법이 없고, 하늘에서 돈벼락이 치지 않는 한 살림 쪼들리는 것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솔직히 대출금 이자며 애들 학원비며 각종 공과금 낼 때마다 계산기 두드리다 한숨 푹푹 쉬는 당신 보면 나도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네. 남들은 외제 자가용이다 해외여행이다 명품이다 하며 불경기를 비웃는데, 사계절용 추리닝 패션의 당신이나 족집게 과외는커녕 집과 얼마나 가까운가를 학원 선택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애들을 보는 내 마음인들 편하겠는가. 돈 때문에 내쉬는 당신의 한숨은 비수보다도 더 날카롭게 내 가슴에 꽂히곤 한다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올해부터는 정말 돈으로부터 좀 해방되고 돈을 초월해보세. 돈 넉넉하게 못 벌어다주는 무능한 가장의 꼼수라고 해도 좋네. 어차피 정해진 월급에 원고료 몇 푼 말고는 목돈 만들어낼 재주가 없으니 이나마 다행으로 생각하고 즐겁게 쓰며 살자는 말일세. 돈 몇 푼 아껴서 재벌 될 것도 아니고, 몇 푼 쓴다고 해서 거리로 나앉는 것도 아니잖은가. 그래서 내가 새해를 맞은 기념으로 당신한테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하니 귀 기울여 들어보소.

우선, 당신 자신을 위해 돈을 좀 쓰도록 하소.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이지만 알뜰살뜰 쪼개고 또 쪼개 살림을 꾸려가는 당신을 고맙게 바라보다가도 때로는 가슴이 아리다 못해 화가 날 때가 있어. 명절을 맞아 고향에 내려가거나 애들 학교에 선생님을 찾아뵈어야 할 때, 입을만한 옷이 없어서 허둥거리는 당신을 보면 그래. 옷장 열고 아무리 뒤져봐도 마땅한 옷은 없지, 동서들이나 다른 엄마들과 비교되는 것은 싫지, 당신 스트레스 받는 것 못지않게 나도 짜증난다고! 백화점 옷까지는 아니더라도, 동네 가게에서 파는 옷 정도는 좀 속 시원하게 몇 벌 사 입으면 안 되겠는가? 이게 무슨 궁상인가 싶어 정말 자존심 상하고 속에서 열불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네.

그리고 화장품도 좀 몇 가지 사서 쓰소. 아무리 쌩얼 바람이 불고 있다지만 그거야 피부에 자신 있는 연예인이나 청춘들의 이야기 아닌가. 나 출근할 때 화장한 예쁜 얼굴로 잘 다녀와라 인사하라고 그러는 게 아닐세. 슈퍼에 두부 사러 가면서 화장을 하라는 말도 아닐세. 여자들 맨얼굴 안 보이는 것도 예의라고 하던데, 모임에 나갈 때는 얼굴에 뭐 좀 바르고 색칠도 하고 하면 좀 좋겠는가? 나도 내 마누라가 다른 여편네들보다 예뻐 보이는 게 좋은 사내놈이라고!

내가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또 옷 사고 화장품 살 돈이 어딨냐고 그러겠지. 나도 돈 많이 못 버는 내가 싫고 내 인생이 짜증난다. 하지만 죽어서 무덤에 싸들고 갈 것도 아닌 돈, 쓰면서 좀 살면 어디가 덧나? 주택자금 대출 이자 며칠 연체한다고 당장 집에 압류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학원비 며칠 늦게 낸다고 지들도 장사 하는 건데 설마 애들 학원 나오지 말라고 하겠어? 너무 아등바등, 돈 앞에서 벌벌 떨지 말자고 제발!

덕분에 나도 돈 좀 써보세. 남자들 힘이라는 게 말이네, 바로 돈이라네. 돈이 있으면 어깨에 힘이 빵빵하게 들어가고, 돈이 없으면 쭈그러져서 기력을 잃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모임에도 빠지고 그런단 말이네. 지난 번 고향에 사는 친구 하나가 모처럼 서울에 왔다고 연락을 해왔는데 빈말로라도 밥이나 같이 먹자는 말을 못하고 말았네. 정말 쪽팔리고 속상하더구만.

부모님께는 자식노릇도 하면서 살자고. 시시때때로 시골에서 보내는 먹을거리들을 넙죽넙죽 받아먹을 줄만 알았지, 노인네들 얼마나 힘들게 농사지어 택배로 부쳐주시는지는 깊이 생각도 안 해보고 있잖은가. 일전에 시댁에서 쌀 보내고 친정에서 김장김치를 부쳐왔을 때 내가 전화로 잘 받았다면서 돈을 보내겠다고 했더니 당신이 누구 맘대로 돈 보내겠다고 약속해? 하며 눈 부라렸지? 그놈의 돈이 뭔지, 돈 앞에서는 부모도 없구나 싶어 그때 정말 내 마음이 너무나 참혹했네.

 

덧붙여 제발 애들에게도 돈 쓰는 훈련을 시켜주세. 경제교육이라는 게 별것 있겠는가. 필요한 데에 규모 있게 돈 쓰는 습관을 들여주는 것이 곧 경제교육이지. 애들이라고 어디 돈 쓸 데 없겠는가.

내가 아무리 돈 좀 쓰며 살자고 해도 당신이 아무 생각 없이 막 쓸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내가 왜 모르겠는가. 알기 때문에 이런 말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네. 나야 뭐 워낙 깡촌에서 가난하게 자라 가난이 익숙하지만, 당신과 애들한테까지 가난을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는 늘 미안하고 면목이 없네.

내가 돈은 두고두고 열심히 벌어옴세. 이태백(20대의 태반이 백수)이 어떻고, 사오정(45살이면 정년퇴직)이 어떻고, 오륙도(56살 되도록 직장생활 하면 도둑놈)가 어떻고 해도, 내 어떻게든 잘 처신해서 가늘고 길게 오래오래 회사에 붙어있음세.

, 작년 흑룡의 해에 이어 뱀띠 해인 올해는 흑사년(黑蛇年)이라던데, 올해도 작년만큼이나 앞날이 캄캄하다는 의미인가 보네. 뱀띠 해면 그냥 뱀띠 해지 검은 뱀띠 해라니, 머리털 빠지기 시작한 후로 처음 듣는 말이네만 어쨌든 마음 답답해지는 것이 로또복권이라도 몇 장 사봐야 할 모양이네. 그런데 복권 사면 당신은 또 쓸데없이 복권이나 샀다고 타박하겠지?

그래도 생각해보니 로또복권은 사지 않는 것이 좋겠구만. 소풍가서 보물찾기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내 복에 수십 억짜리 복권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더구나 알뜰하고 살뜰한 당신 만나 사는 것이야말로 내 인생의 로또복권 당첨인 것을!

 

·몽당연필 / 일러스트·김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