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않은 편지

[공처가의 편지 8] 당신의 건망증에 의혹이 있다!

몽당연필62 2009. 5. 4. 12:38

당신의 건망증에 의혹이 있다!


“당신은 어느 때 ‘나도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오? 나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건망증에서 그것을 깨닫곤 하오. 사실 당신의 건망증도 만만치 않은데, 더러는 그 건망증이 편파적이거나 차별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소. 시부모 생신은 곧잘 잊어먹어도, 친정 형제들 결혼기념일은 해해년년 빠뜨리지 않고 챙겨주니 말이오.”


 

해가 바뀌었나 싶더니 어느덧 5월, 세월 참 빠르구려. 하기야 시골의 부모님께서도 농사일은 하시지만 이미 등 굽고 눈 어두우시니…. 부모님께서 들으시면 괘씸타 하실 터이나, 요즘 들어 부쩍 나도 늙어간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오. 흐르는 세월에 소중한 것들은 저 멀리 떠내려 가버리고, 힘겹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만 자꾸 떠내려 와 내 앞에 쌓이는 느낌이오. 젊은이는 꿈을 먹고 살고 노인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데, 그렇다면 나는 꿈은 소식이요 추억은 과식이니 확실히 젊은이는 아닌 것 같소.

당신은 어느 경우 ‘나도 나이를 먹었구나’ 혹은 ‘나도 이젠 늙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오? 언제부턴가 뽑아내기를 포기한 흰머리? 샤워하고 나와보면 죽은 척하고 있는 남편? 훌쩍 커버린 키로 내려다보며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말대꾸하는 애들? 부쩍 자주 들려오는 친구들 부모의 부음?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이유와 경우에서 자신의 나이 들어감을 문득 느낄 것이오만, 나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건망증에서 그것을 깨닫곤 하오. 건망증이 아니라 머리가 나쁜 거라고? 그 무슨 섭섭한 소리! 내가 이래봬도 어려서 천재까지는 아니어도 영특하다는 소리깨나 들었고, 젊어서는 전화번호 수십 개를 머리 속에 넣고 다녔던 사람이오. 그런데 이제는 회사의 중요한 미팅 시간을 잊어먹고 거래처 면담 약속도 깜빡하기 일쑤인 것을 어쩔 수가 없구려.

얼마 전엔 회사 봄 야유회를 맞아 요새 유행하는 노래 하나를 배워보겠다고 가사를 적어 한참을 외우고 다녔소. 이마 훤한 중년 남자가 뽕짝이 아닌 최신 곡을 부른다면 그 얼마나 멋진 일이겠소. 하여, 중얼중얼 우물거리며 뭐라는지 알 수 없는 랩은 도전할 엄두가 안 나고 그래도 박자 맞추기 만만하다 싶은 댄스곡을 하나 골라 CD플레이어로 듣고 듣고 또 듣기를 반복했는데, 그것이 참 희한한 일입디다. 도무지 가사가 머리에 입력이 안 될뿐더러, 겨우 가사가 입에 붙었다 싶으면 멜로디가 또 오리무중인 거요.

하긴 우리는 기억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소. 노래 가사는 노래방에 가면 자막이 친절하게 알려주고, 전화번호는 휴대폰에 다 저장되어 있으니, 그런 것들을 굳이 머리 아프게 외울 필요가 없지 않겠소. 그러니 기억으로 저장되지 않을 수밖에. 이런 것을 건망증하고 구분해서 요새는 ‘디지털 치매’라고 합디다. 그런데 치매라면, 그것이 디지털이든 아날로그든, 건망증보다 훨씬 심각하고 치명적인 것 아니오?

문제는 내가 깜빡깜빡 하는 것이 디지털 치매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오. 교통카드를 어디에 뒀는지 찾지 못해 지하철 매표창구에서 승차권 구입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피우던 담배가 재떨이에서 연기 풀풀 날리고 있는데 또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일도 갈수록 늘고 있소. 회사 동료들과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을 때 절반쯤 베어먹은 단무지를 두고 또 다른 단무지를 집어들다 스스로 흠칫 놀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오.

건망증의 극치는 동창회에서 경험하게 되오. 술자리 내내 승진을 축하한다는 둥 아이는 무슨 학교 다니느냐는 둥 마누라는 어떻게 지내냐는 둥 지치도록 이야기 해놓고는, 다음 모임 때 지난번 이야기들은 까맣게 잊은 채 아이들을 어떻게 두었으며 마누라는 무슨 일 하는지를 다시 묻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 아니겠소. 그나마 다행이라면 동창회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이 워낙 건성인 데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막상막하여서 위안이 된다는 점이오.

물론 세상사 모든 것을 머리 속에 담은 채 기억하며 살아간다면 그것도 참 고통스럽고 비참한 일이 아닐까 싶소. 다행히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어서 어떤 아픔과 슬픔, 기쁨과 감동도 시간이 지나면 잊게 되니 머리는 새로운 기억과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것 아니겠소.

그런데 신기한 것은, 좋고 필요한 것은 곧잘 잊어버리면서도 쓸데없는 것은 참 오래도 생생하게 기억됩디다. 결혼이나 출산과 같은 개인적인 기쁨은 물론이고 월드컵 4강 진출, 남북 정상회담, WBC 준우승 등 국가적인 감동도 오래지 않아 희미해져 버리는데, 이별과 배반의 아픔이나 미움과 원망은 어찌 그리도 마음에 사무쳐서 지워지지 않는지. 그런 것들은 망각이나 건망증의 약효가 미치지 않는 것인지….

 

 

그런데 사실을 말하자면, 만날 깜빡깜빡 한다며 가끔 나를 타박하는 당신의 건망증도 솔직히 만만치 않다는 걸 아오? 물론 여자는 출산을 한 뒤 기억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건망증도 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소. 술과 담배에 절어 기억력이 감퇴하는 남자와는 근본적으로 그 이유가 다르다는 것이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 건망증은 당연한 거고 내 건망증은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좀 서운하구려.

냉장고를 열었을 때 거기서 발견한 다리미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오? 반찬통들 사이에 한자리를 떠억 차지하고 있던 텔레비전 리모컨은 또 무슨 경우요? 국 끓이다 전화로 친구와 수다 떠느라 태워먹은 냄비가 몇 개며, 쇼핑할 때 신용카드를 꺼내야지 아파트 출입 카드를 꺼낸 게 몇 번인지 아오? 심지어 세탁기에서 라면봉지가 나왔을 때는 진짜 내 마누라가 정신을 놔버렸나 한참 심각하게 걱정하기도 했소.

물론 당신의 건망증 덕분으로 내 건강이 더 좋아진 점도 있기는 하오. 시장에 가면 꼭 뭔가 한두 개를 잊어먹고 그냥 와 나중에 내가 달려가서 사오는 경우도 많고, 당신이 차를 쓰고 주차한 다음에는 아파트 주차장을 헤매며 자동차 찾아 3만 리를 몸소 체험하게 되니, 그로 인해 내 두 다리에 힘이 돌고 심폐기능도 덩달아 향상되지 않았겠소.

더러는 당신의 기억력 혹은 건망증이, 사안에 따라 편파적이거나 차별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러올 때도 있소. 생각해보건대 당신은 친정 부모님 생신은 말할 것 없고 형제들 결혼기념일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는 것 같습디다. 하지만 시부모 생신이나 시댁 형제들 모임 등은 유난히 잘도 잊어버리니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오.

그래도 나는 철석같이 믿고 있소. 당신의 건망증이 결코 편파적인 것은 아니리라고 말이오. 내가 날이 갈수록 건망증이 심해지듯이, 당신 또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건망증이 심해지는 것은 우리가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는 자연의 섭리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소. 그래서 결론을 내렸소. 당신의 건망증은 어디까지나 진짜 건망증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이오.

그런데…. 내가 가끔 당신한테 쓰고 있는 이 편지를 잘 받아보고 있기는 한 거요? 답장은커녕 편지를 읽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기억이 당최…. 뭐? 어머님이 그러시는데, 시골집으로 이따금 이상한 편지가 한 통씩 오고 있다고? 맙소사!


글·몽당연필 / 일러스트·김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