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가는 길

거창, 이름만큼 꿈도 거창하다

몽당연필62 2012. 8. 1. 16:19

거창, 이름만큼 꿈도 거창하다

 

 

거창사건 추모공원.

 

역사 속의 상처와 자부심을 함께 지닌 고장

거창에 도착하여 맨 먼저 신원면 대현리에 있는 거창사건 추모공원을 찾았다. 거창사건이란 6·25전쟁 중인 195129일에서 11일까지 사흘 동안 신원면 일대에 거주하는 719명의 양민들이 일부 국군에 의해 집단적으로 희생된 참화를 말한다. 당시 국군은 이곳 주민들이 공비와 내통했다고 하여 적이 이용할만한 모든 것을 없애버린다는 뜻인 견벽청야(堅壁淸野)’라는 이름의 작전을 펼쳐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했다. 거창사건은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순박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날벼락을 맞은 현대사의 비극이었던 것이다.

     (전략)

산 자여, 보아라.

여기 이렇게 누워있는 이들도 살고 싶었던 사람들이다.

잘못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두 번 죽었던 희생자들

천지신명이시여 이들을 받으소서.

하늘이시여 용서와 화해를 내리소서.

     (후략)

2004년 준공된 추모공원은 위령탑과 묘역·역사교육관·위패 봉안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령탑을 지나 묘역으로 올라가는 입구 양쪽 벽면에는 거창 출신 표성흠 시인이 쓴 거창사건 위령탑 건립에 부쳐라는 글이 새겨져 읽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또 역사교육관에서는 거창사건의 개요와 당시 상황,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지역에서 기울인 노력 등을 각종 자료와 사진, 영상 등으로 보여주며 우리 아픈 역사의 생채기에 새살을 채워넣고 있다.

거창읍에서는 먼저 대동여지도가 소장되어 있다는 거창박물관으로 갔다. 김천리에 있는 거창박물관은 1988년 거창유물전시관으로 출발했다가 1993년 박물관으로 거듭났는데, 가야시대 토기를 비롯한 그릇류와 민속품 등 대부분 거창지역에서 출토되고 수집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어 지역성이 잘 드러나는 박물관이다.

박물관 규모는 아담했다. 문을 들어서니 전시관 중앙 유리관 속에 가로 3m 세로 7m나 되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전시되어 있다. 대동여지도는 1861년 목판 22첩으로 판각되어 처음 제작되었고 1864년 수정본이 재간되었는데, 이곳에 소장된 대동여지도는 1864년도 재간본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파리장서 비.

거창읍 상림리의 파리장서(巴里長書)’ 비는 거창 사람들마저도 그 존재를 잘 알지 못하지만,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과 함께 거창 사람들의 절의를 안고 서 있는 비석이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자, 전국의 유림 대표 곽종석·김복한 등 137명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일제의 침략상을 알리고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장문의 문서를 보내 세계만방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게 된다. 이 독립 청원서를 일컬어 파리장서라고 하는데, 파리장서 운동을 가장 앞장서서 이끌었고 일제에 붙잡혀 모진 고초를 겪은 곽종석이 바로 거창 사람이다. 거창에서는 곽종석 외에도 6명이 파리장서에 연서하여 의기를 드높였으니 실로 파리장서 운동의 진원지였다 할 것이다. 거창에서는 이를 기념해 1977년 파리장서 비를 세웠다.

 

풍부한 관광자원불교문화재도 곳곳에 산재

경남 서북부에 자리한 거창은 덕유산·가야산과 접해 있고 지리산 줄기의 영향도 받는 고장이니 산세 좋고 물 맑은 것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다. 위천면 황산리에 있는 수승대는 거창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덕유산에서 발원한 위천(혹은 위천천이라고도 한다) 물길이 바위를 깎고 갈아 빚은 절경이다.

 

수승대.

물에 떠 있는 거북과 같은 형상이라 거북바위라고도 불리는 수승대는 본래 위천 가운데에 놓인 높이 10m의 커다란 천연 바위를 가리키는데, 삼국시대 때 백제는 이곳에서 신라로 떠나는 사신을 배웅했다. 처음 이름은 사신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해 근심 수() 보낼 송()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 하였으나, 조선 때 퇴계 이황의 권유로 수승대(搜勝臺)라는 이름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수승대 일원은 사철 청류가 흐를 뿐만 아니라 송림이 우거지고 요수정(樂水亭) 등 정자가 있어 여름철 피서지로 이름이 높다. 또 이곳 야외극장에서는 해마다 여름에 국제연극제가 열려 지역 특유의 관광상품으로 각광받고 있으며(2012년 연극제 기간은 727~812), 거창 신씨 집성촌으로 전통 한옥이 있는 황산마을은 고가에서의 민박이라는 색다른 즐거움도 제공하고 있다.

위천면에는 수승대 말고도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있으니 상천리의 금원산 자연휴양림이다. 금원산은 숲이 울창하고 물과 공기가 맑아 산림욕을 하기에 적합하며 계곡과 폭포 등 산악경관도 빼어나다. 특히 문바위라 불리는 커다란 바위를 지나 산길을 조금 오르면, 가섭사라는 절이 있었던 바위굴 암벽에서 마애삼존불상을 볼 수 있다. 보물 제530호로 지정된 이 마애삼존불상은 고려시대 부처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서기 1111년에 제작한 것으로 전해온다.

거창읍을 가운데 놓고 보았을 때 거창사건 추모공원이 있는 신원면은 남쪽이고 수승대가 있는 위천면은 서쪽이다. 이번에는 동쪽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다시 거창읍을 지나는 길에 양평리 석조여래입상을 찾았다.

 

             양평리 석조여래입상.

보물 제377호인 양평리 석조여래입상은 화강암으로 만든 석가상이며 전체 높이가 3.7m로 그리 큰 편은 아니다. 하지만 몸이 머리에 비해 약간 가늘고 늘씬한 체격이 세련된 조각과 함께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면서 9세기 통일신라 때 불상 조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거창에는 가섭사지 마애삼존불상과 양평리 석조여래입상 외에도 불교유적이 풍부하다. 거창읍 상림리 석조관음입상도 보물 제37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형문화재로는 거창읍 대동리 심우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김천리 송림사지 석조여래좌상, 위천면 상천리 강남사지 석조여래입상, 북상면 농산리 석조여래입상, 가조면 수월리 고견사 석불 등이 있다.

거창읍에서 가조면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남하면 둔마리에 벽화가 그려진 고분이 있다기에 어렵사리 찾아가니 장방형으로 석축을 하여 흙을 가두고 그 위에 봉분을 둔 무덤이 나타난다. 둔마리 벽화고분임을 나타내는 안내판에는 고려시대 무덤으로 석실 벽에 악기를 연주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붓의 움직임이 자유롭고 생기가 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무덤을 한바퀴 빙 둘러봐도 석실로 들어가는 통로나 관리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고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석실은 폐쇄하였고 대신 벽화 모형을 거창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단다. 사정이 이러한 것을 알았으면 박물관에 들렀을 때 찬찬히 둘러볼 것을 하고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사과와 시설원예작물 등 농산물도 다양

둔마리를 지나 고갯길을 넘으면 거창의 가장 동쪽 지역인 가조면이다. 가조면에는 미녀봉이라는 높이 930m의 산이 있다고 했다. 고개를 지나 내리막길로 접어들며 가조면 들녘 건너편 산들의 능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미녀는커녕 사람의 얼굴을 닮은 능선조차도 눈에 띄지 않는다. 마침 길가에서 풀을 베는 사람이 있어 미녀봉을 물으니 멀리 능선을 가리키며 임신한 여자가 오른쪽으로 머리를 두르고 누운 형상이라고 가르쳐준다. 사람의 형상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고 의심하자 그 사람은 산을 내려가서 보면 미녀봉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윽고 산길을 벗어나 들이 시작된 곳에 이르러 다시 미녀봉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멀리 보이는 산의 능선이 영락없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 잘 빗은 것 같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누웠는데 긴 이마와 오뚝한 코, 벌린 입, 봉긋한 가슴, 만삭의 배까지 갖춘 여자의 모습이다.

 

머리를 오른쪽으로 두르고 누운 여인의 형상인 미녀봉. 

가조면 들녘에는 비닐하우스가 단지를 이루고 있었다. 거창군의 대표적인 농산물로는 쌀 외에 사과가 꼽히는데, 가조면에서는 수박과 딸기 등 시설원예 작물이 주종을 이룬다. 특히 수박은 크기가 작고 껍질이 얇아 깎아서 먹는 복수박이라는 품종이 유명하다. 이곳 복수박은 토양순환제에 의한 유기농법으로 재배되어 맛과 당도가 뛰어나다고 한다.

거창(居昌)은 어쩌면 이름 덕을 많이 보는 고장인지도 모르겠다. 일단 뭔가 거창(巨創)한 것이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거창 사람들은 스스로 고장 이름에서 용기를 얻으며 거창한 꿈을 현실로 이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