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가는 길

함양, 두 개의 국립공원이 빚은 선경

몽당연필62 2012. 5. 17. 08:00

함양, 두 개의 국립공원이 빚은 선경

 

경남 서부에 위치한 함양(咸陽)군은 남쪽에 지리산국립공원, 북쪽에 덕유산국립공원을 두르고 있다. 병풍처럼 펼쳐진 영봉들은 골골이 맑은 물을 흘려보내고, 이곳에 터 잡고 사는 사람들도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자연만큼이나 맑기만 하다. 하지만 산 높고 골 깊은 고장이라고 해서 함양을 머나먼 오지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남북을 잇는 통영-대전 고속도로와 동서를 잇는 88올림픽 고속도로가 바로 함양에서 교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함양군은 면적이 725이고 110면의 행정구역에 4만 명이 조금 넘는 주민들이 살고 있다.

해발 1,000m 이상의 산봉우리가 15개나 있는 함양군은 선경(仙境)과도 같은 아름다운 계곡을 곳곳에 감추고 있다. 흐르는 물이 거울처럼 투명한 지리산 자락의 백무동계곡 모습.

 

천년 문화의 향기 속에 성장하는 학생들

함양군 여행은 함양읍에 있는 천연기념물과 문화재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먼저 대덕리와 운림리에 걸쳐 조성된 상림(上林)을 찾았다. 천연기념물 제154호인 상림(↓)은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의 하나로 꼽히는데, 신라 진성여왕 때 함양태수였던 고운 최치원 선생(857~?)이 강둑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를 심으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함양읍을 흐르는 위천의 홍수를 막고자 둑을 쌓고 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80~200m, 길이 1.6, 면적 21에 이르는 상림은 120여 종류 약 2만 그루의 온대 활엽수가 우거져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은 물론이고 군민들의 휴식처와 학생들의 자연학습장으로도 사랑받는다.

운림리 함양초등학교 교정에는 수령 6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높이가 21m이고 가슴높이의 둘레가 8.3m나 되는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407호로서 조선시대 영남학파의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1431~1492)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객사인 학사루 앞에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학생들은 대학자의 혼이 서린 나무를 보며 꿈을 키우고, 교정이라고는 하나 큰길에 접해 있어 오가는 사람들도 잠시 발길을 멈춰 눈길을 주곤 한다.

교산리의 함양석조여래좌상(보물 제376)도 함양중학교 안에 있는 것이 특징. 석조여래좌상(↑)은 고려 때의 석불좌상으로 앉은 불상의 높이가 2.45m이며 대좌를 포함하면 무려 4m가 넘는 거대한 조각이다. 얼굴이 많이 닳고 불상 뒤의 광배(光背)와 머리·오른손·무릎·대좌 등이 일부 깨진 게 오히려 학생들에게 역사와 문화의 향기를 전해주는 듯하다.

 

변강쇠와 옹녀가 함양 땅에 묻혀 있다?

함양읍에서 지리산 자락에 안긴 마천면으로 가는 길, 천왕봉을 비롯한 연봉들이 눈앞에 펼쳐진다는 오도재(悟道嶺)를 막 오르기 시작할 무렵 길가(나중에 알아보니 휴천면 월평리라고 한다)에 이정표 하나가 나타난다. ‘변강쇠·옹녀의 묘라는 간이 알림판이다. 판소리 열두 마당 가운데 변강쇠가의 주인공으로 하층 유랑민들의 비극적인 삶을 대변하지만 천하의 잡놈과 음녀로 알려져버린 변강쇠와 옹녀가 함양 땅에 묻혀 있다? 묘의 거리가 150m밖에 안 된다니 마음이 솔깃해진다.

산으로 난 길을 잡아 50~60m쯤 들어가자 다시 안내판이 있고 옹녀샘이라는 팻말도 보인다. 샘은 바위틈에서 물이 떨어져 고이는데 물받이가 커다란 바가지 정도이며 주변에 잡풀이 많이 자라 찾는 이가 많지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 옹녀샘을 지나 제법 경사가 심한 산길을 오르는데 산딸기가 빨갛게 익어 정력에 좋다는 복분자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숨이 약간 차오를 무렵 이윽고 산등성이에 오르니 눈앞에 옹녀의 상으로 보이는 현대식 조형물(↑↑)이 나타난다. 그런데 뭐가 좀 이상하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변강쇠와 옹녀의 모습을 좌우로 절반씩 앞뒤를 바꿔 새긴 것임을 깨닫는다. 변강쇠와 옹녀의 묘(↑)는 이 조형물로부터 2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나란히 누운 두 개의 무덤 앞에 한글로 새긴 묘비명을 세웠고, 조화도 꽂아두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변강쇠와 옹녀의 묘를 찾아 참배 아닌 참배를 하고 다시 길을 재촉하니 어느덧 오도재 정상 직전. 그런데 이건 또 뭐람? 수십 기의 장승들이 공원을 이루고 있다. ‘변강쇠와 옹녀의 사랑 이야기라는 테마 공원(↑)이다. 하지만 ‘19공원도 아닐 터인데 장승들 상당수의 머리 모양이 남자 거시기의 모습이다. 변강쇠와 옹녀를 문화관광 상품으로 활용하는 함양 사람들의 익살이리라.

장승공원 바로 위 오도재 정상 전망대에서 올라왔던 길(↑)을 한번 내려다본 다음 지리산제1문을 지나 천왕봉 지리산조망공원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비가 흩뿌리는 날씨라 지리산은 연봉들을 먹장구름 속에 감추고 보여주지 않는다(↓).

 

지리산과 남덕유산이 만들어낸 선경

지리산의 품에 고즈넉이 들어앉은 마천면은 지리산 등반이나 관광의 기착지이다. 천왕봉·제석봉·촛대봉·세석산장·벽소령대피소 등의 길목일 뿐만 아니라, 거울처럼 맑은 물이 끊이지 않는 칠선계곡·백무동계곡·한신계곡 등이 드리워져 있기도 하다. 훗날 기회가 된다면 지리산만을 따로 다룬 여행기를 써도 좋으리라.

마천면에는 국가가 지정한 보물이 두 개 있다. 덕전리 고담사의 마애여래입상(보물 제375)과 추성리 벽송사의 삼층석탑(보물 제474)이 그것. 고담사 마애여래입상(↑)은 불신 높이가 580에 이르는 고려 초기의 것이며, 벽송사 삼층석탑은 높이 350로 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지만 제작 시기는 조선 중종 때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고 한다.

한편 벽송사 인근 서암정사(↑)는 천연의 암석과 조화를 이루는 사찰로 풍광이 매우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지리산의 장엄한 산세를 배경으로 자연암반에 무수한 불상을 조각한 통행로도 아름답거니와, 10여 년에 걸쳐 석굴에 극락세계를 조각하여 조성한 법당의 화려함과 웅장함에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게 된다.

궂은 날씨 때문에 지리산권역을 찬찬히 살펴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누르며 함양군의 북쪽에 해당하는 용추계곡과 화림동계곡 방면으로 달리다 수동면 원평리에 있는 남계서원(↑)에 들렀다. 남계서원은 명종 7(1552) 일두 정여창 선생(1450~1504)을 기리기 위해 창건했으며 명종 21(1566) 사액서원이 되었다. 남계서원은 1543년 경북 영주에 세운 백운동서원(현재의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서원이라고 한다.

정여창 선생은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김종직 문하로 유학적인 이상사회 건설을 꿈꾸었던 그는 개울 건너에 있는 지곡면 개평마을 사람인데, 그의 고택(↑)은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이 지역의 대표적인 양반 고택으로 꼽히고 있다.

용추계곡은 안의면 기백산 자락을 흐르는 물길이다. 계곡 초입에 들어서니 커다란 물레방아가 돌고 있는 연암물레방아공원(↑)이 나오는데, 이 공원은 열하일기를 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 선생(1737~1805)이 안의현감을 지낼 때 풍구·베틀·양수기·물레방아 등 새로운 동력기를 보급함으로써 이용후생(利用厚生)에 힘쓴 것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것이다. 물레방아공원에서 조금 더 올라간 곳에는 화가 난 용이 15m 높이에서 몸부림치듯 힘차게 떨어진다는 용추폭포(↓)가 있으며, 폭포 옆에는 해인사의 말사인 용추사가 자리 잡고 있다.

화림동계곡은 해발 1,507m의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남강의 상류)이 서상면과 서하면을 흘러내리면서 무수한 못과 기이한 바위들을 만들어놓은 20가 넘는 계곡이다. 이 계곡에는 농월정·경모정·동호정·군자정·거연정(↓) 등 많은 정자들이 있고 곳곳에 못이 형성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함양은 남쪽의 지리산국립공원, 북쪽의 덕유산국립공원으로 인해 어디를 가나 선경처럼 아름답고 신비한 풍광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함양에서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전북 장수군과 경계를 이루는 서상면 금당리의 논개 묘(↑). 임진왜란 때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한 논개의 묘는 1976년 발견되었으며 해마다 음력 77일에는 추모제도 거행되고 있단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