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가는 길

의성, 마늘도 많고 탑도 많고 왜가리도 많다

몽당연필62 2011. 6. 2. 16:27

의성, 마늘도 많고 탑도 많고 왜가리도 많다


세상의 온갖 식물들에게 신록의 옷을 입히고 있는 초여름의 제법 따가운 햇살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경북 의성 땅으로 들어섰다. 마늘이 특산품으로 첫손에 꼽히는 고장이라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라, 눈에 보이는 논도 밭도 온통 마늘로 덮여 있다.

마늘은 우리 건국신화에서 사람 되기를 원하는 곰과 호랑이가 먹었다는 친숙하고 오랜 역사를 지닌 농산물. 이 마늘로 유명한 고장이 바로 경북 의성군이다. 의성에서는 이른 봄부터 초여름까지 어디를 둘러봐도 넓게 펼쳐진 푸른 마늘밭(↓)을 볼 수 있는데, 재배 면적이 약 1500㏊, 연간 생산량이 약 1만 5000t이나 된다.

의성 마늘은 한지형(내륙 추운 지역에서 재배하는 마늘을 가리키며, 남부 해안지역 따뜻한 곳에서 재배하는 마늘은 난지형이라고 한다)으로 전국 마늘 생산량의 4% 정도를 차지하며, 한지형만 따지면 24~25%를 차지해 전국 제1위의 점유율을 보인다고 한다. 의성 사람들은 이곳 마늘이 조상 대대로 재배해온 토종으로 즙액이 많아 적은 양으로도 양념 효과가 높고 김치의 신맛을 억제하는 기능도 탁월하다고 자랑한다.


여름에 춥고 겨울에 따뜻한 빙혈과 풍혈

끝없는 초원처럼 펼쳐진 마늘밭을 가르며 춘산면 빙계계곡 입구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삼복 때 시원한 바람이 나오며 얼음이 얼고 엄동설한에는 더운 김이 무럭무럭 솟아나는 신비한 굴 빙혈이 있어 일대가 얼음 빙氷자가 들어가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 빙혈이 있는 산은 빙산, 그 산을 감돌아 흐르는 내는 빙계, 마을은 빙계리인 것이다.

빙계계곡 초입은 빙계서원(↓)이 장식하고 있다. 바로 앞에 빙계가 흐르고 있고 정문을 겸한 2층 누각에 ‘빙월루’라는 현판을 단 이 서원은 한눈에 보아도 최근에 새로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조선 명종임금 때인 1556년 창건되어 김안국·이언적·류성룡·김성일·장현광 등의 위패를 모셨는데 1868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다가 2006년 지역 유림의 뜻에 따라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서원을 지나니 곧바로 빙계계곡(↑)이 펼쳐진다. 계곡이 크게 깊지는 않아도 절벽과 기암이 나름의 운치를 자랑하고 있다. 더구나 계곡 바닥에 널린 여러 바위 가운데 가장 높은 바위 위에는 ‘경북팔승지일(慶北八勝之一)’이라는 아담한 비석도 세워져 있다.

빙혈(↑)은 빙계계곡을 끼고 있는 빙계리마을 뒤에 있다. 산기슭의 바위 아래에 네댓 명이 들어 설 수 있는 넓이의 공간이 있는데, 여기에서 입춘이 되면 찬 기운이 나고 한여름엔 얼음이 얼며 입추가 지나면 차차 녹아 동지에는 훈훈한 바람이 나온다고 한다. 빙혈에 들어서니 제법 더위가 느껴지는 5월인데도 써늘한 기운이 느껴지며 오싹 소름이 돋는다. 빙혈 안쪽 벽면은 유리문으로 막혔는데, 창에 물방울이 맺혀있고 손으로 만져보니 섬뜩할 만큼 차갑다. 마침 빙혈에 들어선 노인들의 “와 이리 춥노.” “참말로 얼음굴이 맞는갑다.” 하는 이야기가 결코 엄살로 들리지 않는다. 빙계리에는 여름엔 찬바람이 나오고 겨울엔 더운 바람이 인다는 풍혈도 있다. 이 일대 크고 작은 바위 사이에서는 거의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편이라니 신기할 따름이다.

빙혈에서 불과 몇 십 걸음 떨어진 곳에는 높이 8.15m의 탑 하나가 고즈넉하게 서 있다.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빙산사지 오층석탑이다. 절은 언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석탑만 홀로 남아 천년 풍파를 견뎌온 것이다.


삼한시대 부족국가 조문국의 도읍 금성면

빙계계곡에서 의성읍으로 가려면 금성면을 지나게 되는데, 이 금성면은 역사나 문화적인 면에서 볼 때 의성군의 보배와 같은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전통 가옥이 잘 보존된 마을이나 탑 그리고 옛 무덤은 물론이고 공룡의 자취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산운마을(↓)은 의성에서 ‘대감마을’로 불리는 전통 양반촌으로, 조선 명종 때 입향한 영천이씨 집성촌이다. 이곳에는 소우당·운곡당·점우당 등 100~200년 이상 된 고택을 비롯해 40여 동의 전통 가옥이 즐비하다. 포장을 하지 않아 흙길 그대로인 골목을 걸으며 조금 큰 소리라도 내면 담장 너머 어디선가 ‘에헴!’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금성면 중심지인 탑리는 말 그대로 탑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탑리 오층석탑(↑)은 통일신라 때 세워졌다. 석탑이면서도 목조 건물의 양식을 겸한 것이 특징이며 국보 제77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빙계리 빙산사지 오층석탑은 탑리 오층석탑을 모방하여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대리리에는 문익점 면작 기념비와 경덕왕릉을 비롯한 옛 무덤들이 있다. 면작 기념비는 이 땅에 면화를 들여온 문익점의 손자 문승로가 의성 현령으로 있을 때 면화를 심어 퍼뜨린 것을 기념해, 1935년에 건립했다. 인근 제오리에는 의성 땅에 면화 재배를 시작한 경위 등을 적은 목면 유전비도 세워져 있다.

경덕왕릉(↑)은 신라 경덕왕이 아닌 삼한시대 부족국가인 조문국 경덕왕의 무덤으로, 봉분 둘레가 74m, 높이가 8m나 된다. 조문국에 대한 사료는 매우 미미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벌휴왕 2년(185)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벌했다’는 한 조항뿐이다. 그러나 사학자들은 경덕왕릉을 비롯한 40여 기의 고분들로 미루어 금성면 일대가 조문국의 도읍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제오리에서는 약 1억 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300여 개의 공룡 발자국 화석이 도로변 경사면에서 1989년 발견되었다. 우리나라의 공룡 발자국 화석이 주로 남해안 일대에서 발견되는 것에 비해 제오리 화석은 내륙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며, 좁은 면적에 매우 많은 발자국이 있다는 것도 중요하다.

이처럼 고택을 비롯한 유적과 화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금성면을 비롯한 의성군 일대는 오래 전부터 생물의 서식 환경이 적합했고 사람이 터 잡고 살기에도 좋은 지역이었던 모양이다.


사촌마을 가로숲은 만취당이 있어 수백 년 푸르렀을까

안평면 석탑리로 가는 길에 의성읍에 들러 잠시 문소루에 올랐다. 문소루는 창건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안동 영호루와 더불어 영남의 4대 누각으로 꼽히며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지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효종 때와 6·25전쟁 때 불에 탔고 1983년에 다시 지어졌다. 문소루에서는 의성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금성면 탑리가 그러하듯 안평면 석탑리 역시 탑과 관련된 지명이다. 이 마을 뒤편 산자락에 방단형 적석탑(↑), 그러니까 네모진 모양으로 돌을 5층까지 쌓아올린 탑이 있는 것이다. 대개의 석탑은 바위나 커다란 돌을 쪼개고 다듬어 쌓지만, 적석탑은 불규칙한 모양의 자연석들을 석탑의 형태처럼 계단식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이 탑은 2층의 4개 면 중앙마다 석불상을 모시는 감실을 설치했는데 현재 불상은 남쪽과 동쪽 두 군데 감실에만 남아 있다. 학자들은 불상의 양식으로 보아 적석탑이 고려 때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도대체 누가 왜 이러한 적석탑을 세웠는지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전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의성군의 북동쪽에 드는 점곡면 사촌(沙村)마을로 향했다. 사촌마을은 1392년 안동김씨들이 입향하고 1750년 경 풍산 유씨들이 합류해 살아온 유서 깊은 양반마을. 특히 퇴계 이황의 제자로 부호군을 지낸 김사원이 선조 15년(1582)부터 3년에 걸쳐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이름 지었다는 만취당(晩翠堂, ↓)은 임진왜란 이전에 건립된 보기 드문 목조 건물로, 현판의 글씨를 천하의 명필 한석봉이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오래도록 푸르기를 기원하며 지었을 당호의 이 유서 깊은 건물도 주변 조경은 그런대로 되어 있으나 마당 안으로 들어가 보면 마치 쇠락한 양반가를 상징하는 듯 군데군데 헐리고 뜯긴 채 세월과 세상사의 덧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촌마을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가로숲(↑)이다. 안동김씨들이 입향할 때 마을 서쪽에 남북 방향으로 흐르는 하천을 따라 나무를 심어 만들어진 800m 길이의 가로숲은 ‘서쪽이 허하면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풍수지리설과 강한 바람을 막기 위한 목적에서 조성했다고 한다. 400~600년 정도 된 상수리나무·느티나무·팽나무 등 10여 종이 20~30m 높이로 울창한 숲을 이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가로숲은 오늘날 방풍림으로서의 기능은 물론이고 경관을 아름답게 하는 자원으로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왜가리 도래지에선 왜가리 축제가 열린다

의성군은 동쪽과 북쪽에 높은 산이 많고 서쪽에는 제법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그러니 산이 있는 곳에 어찌 유서 깊은 사찰 몇 개 없으랴.

단촌면 고운사(↑)는 신라 신문왕(681) 때 의상조사가 창건했고 나중에 최치원 등이 가운루를 비롯한 건물을 더 지으며 중건했다고 하니 무려 13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도량이다. 고운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군의 전방기지로 삼아 식량을 비축하고 뒷바라지를 한 곳이라고도 한다. 가운루는 계곡 위에 세워진 커다란 누각으로 3쌍의 가늘고 긴 기둥이 계곡 바닥에 발을 담근 채 거대한 몸체를 떠받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또 고운사에 이르는 길에는 500m 정도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져 호젓한 분위기 속에 산책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의성에는 고운사 외에도  금성면 수정사, 안평면 옥련사, 안사면 지장사, 다인면 대곡사 등 많은 사찰이 있다.

의성에서의 마지막 행선지로는 왜가리(↑) 서식지인 신평면 중률리로 잡았다. 신평면은 의성의 동쪽 지역이 중심이 된 이번 여행의 동선에서 상당히 벗어난, 그러니까 북서쪽에 위치한다. 특히 중률리는 우리나라 최대의 왜가리와 백로 도래지로 2006년부터 왜가리 축제까지 열리는 곳이다. 왜가리와 백로는 해마다 2~3월에 찾아와 7월 중순 떠나는데, 5000여 마리의 새들이 산을 덮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왜가리는 백로와 비슷한데 등이 청회색을 띠기 때문에 청학이라 하고, 백로는 백학이라 한단다. 왜가리는 의성군을 상징하는 새이기도 하다.

의성은 인구가 6만여 명, 행정 조직이 1읍 17면이나 되는 큰 군이다. 이번 여행은 주로 동쪽에 치우쳤으니 실은 의성의 절반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셈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음에 또 의성을 찾을 이유가 될 것이기에 위안으로 삼는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