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가는 길

강진, 언제나 푸른 다산과 영랑과 청자

몽당연필62 2009. 11. 10. 18:49

강진, 언제나 푸른 다산과 영랑과 청자


강진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대가인 다산 정약용이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현대 순수 서정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김영랑이 태어나고 자란 곳도 강진이다. 강진은 또 고려 때 가장 우수한 청자를 생산해낸 지역이기도 하다. 다산초당과 김영랑의 생가 주위에 숲을 이룬 대나무 때문일까, 아니면 고운 청잣빛 때문일까, 가을이 깊어 겨울로 넘어가고 있음에도 강진의 느낌은 푸른색으로 다가온다.


강진군은 전라남도 남서쪽에 자리하여 이웃 해남군과 함께 한반도의 가장 남쪽에 드는 땅이다. 북서쪽에 월출산이 마치 머리처럼 솟아 있고, 지형은 턱 밑까지 들어온 바다 강진만을 두 팔을 벌려 보듬은 듯한 모양이다. 1읍 10면의 행정구역에 면적이 500㎢이며 인구는 4만 명이 조금 넘는다.  

우스갯소리일 수도 있고 안타까운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강진은 좀 억울한 고장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국립공원 월출산(↑)은 그 자락을 강진 땅에도 상당 부분 펼쳐놓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암 월출산’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서울이나 광주에서 강진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영암에서 월출산을 먼저 보게 되기 때문에 굳어진 일종의 고정관념이라 하겠다. 월출산은 높이가 809m로 그리 높지 않지만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산세가 웅장하고 수려하니, 그 아름다움은 강진 쪽의 월출산이라고 해서 어찌 다르겠는가.

 

월출산 자락에 안긴 금릉경포대 계곡과 천년 고찰 무위사

강진에서 월출산을 오르려면 성전면 월남리의 금릉경포대 계곡 등산로를 가장 많이 이용한다. 금릉경포대는 흔히 경포대(鏡布臺)라고 하는데, 동해안 강릉의 경포대(鏡浦臺)와 음은 같지만 가운데 글자 ‘포’의 한자 표기가 다르고, 강릉의 경포대가 바다와 가깝지만 금릉경포대는 산중의 계곡이라는 점도 다르다.  

월출산 최고봉인 천황봉과 구정봉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흐르는 금릉경포대 계곡(↑)은 가뭄 때 수량이 적은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월출산이 거느린 여러 계곡 가운데 그 아름다움이 가장 빼어난 관광지이다. 크고 작은 바위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이 곳곳에 폭포와 못을 이뤄 놓아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즐겨 찾고 가을이면 단풍도 제법 볼만 하다. 전라남도 교육위원회가 금릉경포대 계곡 입구에 청소년 야영장을 설치한 것도 청소년들이 이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도록 하고자 하는 취지일 터이다.  

금릉경포대 계곡 인근에 조성된 넓은 녹차밭(↑)을 보며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월하리에 천년 고찰 무위사(↓)가 있다. 무위사는 규모는 작아도 서기 617년에 관음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어 역사가 1390년이나 될 만큼 유서가 깊다. 무위사 경내에는 국보 제13호로 지정된 극락보전이 있는데, 이 건물은 서기 1430년(세종 12년)에 세워진 맞배지붕 형태의 목조로서 조선 초기 건축양식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강진의 사찰로는 무위사 외에 백련사(도암면 만덕리), 정수사(대구면 용운리), 금곡사(군동면 파산리) 등도 천년 사찰로 꼽힌다. 특히 강진만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만덕산 기슭의 백련사는 고려 때 8국사와 조선 때 8대사를 배출한 것으로 전해지며, 주위 경사지에 70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자생 군락을 이뤄(↓) 봄이면 붉은 동백꽃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한편 월출산이 강진의 명산이라면, 탐진강은 그 지류인 금강천과 더불어 곳곳에 기름진 평야를 만들어준 고마운 하천이다. 탐진강은 영산강·섬진강과 더불어 전남의 3대 강으로 꼽히며 해마다 여름이면 둔치 공원에서 은어축제가 열린다.


다산의 실학사상이 집대성되고 영랑의 현대 서정시가 움튼 곳

‘강진’ 하면 연상되는 인물로는 조선 후기 실학자이며 ‘목민심서’를 저술한 다산 정약용과,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작품을 통해 한국 현대 서정시에 새 지평을 연 시인 김영랑이 있다.

정약용은 경기도 광주 마재(현재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사람인데 1801년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사옥으로 인해 경북 포항으로 유배되었다가 몇 달 뒤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그는 1818년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 동안 강진에 묶여 있으면서 제자를 양성하고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오늘날 다산학(茶山學)이라 불리는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정약용은 유배 초기 강진읍 동성리에 있는 주막의 뒷방을 ‘생각·용모·언어·동작 등 네 가지를 마땅하게 해야 할 방’이라는 뜻으로 ‘사의재’라 이름 짓고 제자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리고 몇 군데 거처를 옮기며 8년을 지내다가 도암면 만덕산 기슭에 초당(당시엔 초가였으나 1958년 옛터에 기와집으로 다시 세웠다)을 짓고 유배가 풀릴 때까지 10년을 지냈다. 다산초당(↑)은 정약용이 후학을 양성하고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의 대부분을 완성하거나 초를 잡아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산실인 것이다.

 

다산초당에서 남쪽으로 800m쯤 내려오면 1999년에 문을 연 다산유물전시관(↑)이 있는데, 이곳에는 정약용의 영정·연보·가계도·학통·유물 등이 전시되어 그의 일생과 업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다. 또 전시관 뒤편에 2005년 세워진 다산수련원은 청소년들에게 다산의 사상을 전파하면서 수련활동과 문화예술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김영랑은 본명이 김윤식으로, 1903년 강진읍 남성리에서 태어났다. 강진보통학교를 마치고 상경해 휘문의숙에 다니던 그는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학교를 그만두고 강진에서 의거를 하려다 체포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김영랑은 또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는 곧은 절개를 보여주기도 했다.  

김영랑은 1931년 정지용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서정시들을 발표했다. 그는 우리 문학사에서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하여 순수 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인은 1950년 전쟁의 와중에 사망했지만, 그의 생가(↑)에는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여러 시비에 새겨진 주옥같은 작품들을 읽으며 살아있는 시혼을 만나고 있다.


전라병영성이 있던 요충지, 고려청자 생산의 중심지

남해바다가 땅을 두 쪽으로 갈라놓으려는 듯 깊숙이 치고 들어와 만(灣)을 이룬 강진은 예부터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바다는 왜구 등 해적이 쉽게 침입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왜구가 강진만을 타고 강진읍에 상륙하면 이웃 해남·영암·장흥 등 곡창이 곧바로 위협을 받게 되며, 내륙도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강진읍 북쪽에 위치한 병영면 성동리의 전라병영성(↑) 흔적은 강진의 이러한 지리적 특성을 보여주는 산물이다. 전라병영성은 1417년(태종 17년) 축조되어 1895년 폐영될 때까지 500년 가까운 동안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육군의 총 지휘부였고, 제주도에 표류 중이던 네덜란드 사람 하멜 일행이 이곳으로 이송되어 7년 여 동안 머무른 곳이기도 했다. 병영(兵營)면이라는 행정지명은 이처럼 군사적 요충지에 왜구를 막을 목적으로 병영을 설치한 데서 유래했던 것이다.

전라병영성은 폐영 후 차츰 허물어져 흔적을 잃어가다가 1997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성곽 복원과 함께 하멜 기념관이 세워졌는데, 특히 병영성 관문이던 홍교(무지개다리)는 다행히 거의 원형을 잃지 않아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바다는 강진을 위태롭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해상을 이용한 대량 운송의 이점으로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으니, 고려 때 대구면 일대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간 청자가 그것을 말해준다. 이곳에서는 9세기부터 14세기까지 집단적으로 청자를 생산했고, 그 중에서도 사당리가 제작 기술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의 청자 생산 중심지였던 것이다.  

대구면 일대에서 발굴된 고려청자 가마터는 무려 180여 곳이나 되며,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우리나라 청자의 80% 이상은 사당리에 있었던 가마에서 생산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조상의 숨결이 살아있는 사당리에는 현대에 이르러 다시 민간요를 집단화한 청자촌이 조성되어 많은 도예가들이 고려청자 재현에 나서고 있으며, 청자박물관(↑)도 세워져 이 지역에서 출토된 진품 청자들을 전시하며 천년의 신비를 보여주고 있다.  

사당리에는 또 수령이 500년 이상이고 높이 16m, 밑부분 둘레 8.1m인 푸조나무(↑)가 여러 전설과 함께 신목으로 여겨지며 보호되고 있어 마을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작지만 활기 넘치는 미항 마량…고금도와 다리로 연결

강진의 남쪽 끝은 마량면 마량항이다. 마량항은 아담한 포구이지만 인근 해역에 어종이 풍부하며 특히 돔·농어·우럭 등이 잘 낚여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다. 포구 규모에 비해 횟집이 즐비하고 평일에도 주차장마다 차들로 꽉 차는 것은, 싱싱한 해산물을 맛보려는 미식가들과 낚시꾼 그리고 인근의 풍광을 즐기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량항 앞바다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떠 있고 특히 해질녘이면 황혼에 물들어가는 바다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낸다.  

바다에서 올라오자면 마량은 강진의 첫머리인 탓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어서 예전에는 만호성(萬戶城)이 석축되어 있었다. 지금은 성벽이 대부분 허물어지고 일부만 남아 있는데(↑), 만호성의 흔적은 바다로부터의 침략자를 온몸으로 막아야 했던 고난의 역사를 미뤄 짐작하게 한다.  

마량항은 최근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지난 2007년 6월 마량항과 완도군 고금도를 잇는 길이 760m의 고금대교(↑)가 개통된 것이다. 고금대교가 놓이면서 마량과 고금도는 30분 뱃길에서 5분 찻길로 바뀌었으며 이 일대가 새로운 해상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마량의 발전은 곧 강진의 발전이며 우리나라 농어촌의 발전일 터. 더 많은 낚시꾼과 미식가와 관광객들이 마량항을 찾아와, 마량항의 미래가 다산과 영랑의 정신 그리고 고려청자처럼 곧고 푸르기를 기원하며 강진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