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가는 길

공주, 옛 영화 다시 꿈꾸는 백제 고도

몽당연필62 2009. 12. 9. 10:05

공주, 옛 영화 다시 꿈꾸는 백제의 고도


최근 세종시가 수정이냐 원안 고수냐 하는 문제로 온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2015년까지 정부부처들이 이전할 계획이었던 행정중심 복합도시 건설사업에 대한 논란 때문이다. 세종시가 건설되는 곳은 충남 공주시와 연기군 일대. 특히 공주는 과거 백제의 왕도였기에 수도 이전에 버금가는 프로젝트인 세종시 건설을 통해 옛날의 영화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충남 공주(公州)시는 941㎢의 면적에 약 13만 명의 주민이 사는 고장이며 1읍 10면 5동의 행정구역으로 이뤄져 있다. 공주는 백제 22대 문주왕이 서기 475년에 위례성에서 천도해와 26대 성왕이 서기 538년 부여로 옮겨갈 때까지 5대 왕에 걸쳐 64년 동안 백제의 왕도였기에 백제의 역사나 문화를 떼어놓고 말할 수 없는 고장이다.  

금성동에 있는 공산성(↑)은 대표적인 백제 성곽으로, 문주왕이 공주를 도읍으로 정할 때 왕성으로 삼았던 곳으로 추정된다. 공산성은 앞으로는 금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어 물류가 편리하고, 인근에 너른 들이 있어 백성들의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데에도 부족함이 없는 조건을 지녔다.


백제가 터 잡기 전부터 사람 살기 좋은 곳이었다

둘레가 2660m인 공산성은 백제 때 흙으로 쌓은 성이었으나 조선 선조와 인조 때 돌로 고쳐 쌓아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 백제 때의 도성으로서 처음 이름이 웅진성이었으나 고려 초에 공산성으로 바뀌었고 조선 후기에는 쌍수산성으로도 불렸다. 공산성 안에는 왕궁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건물 터(↓)를 비롯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각 시대별 유적이 다양하게 남아 있다.  

공산성과 같이 금성동에 속하지만 예전 행정지명이 공주읍 송산리였던 곳에는 저 유명한 송산리 고분군이 있다.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 밀집한 것을 가리키는데, 모두 17기의 무덤이 있었지만 현재 복원된 것은 주인을 알 수 없는 1~6호분과 무령왕릉 등 7기뿐이다.  

이 가운데 25대 무령왕(재위 501~523년)과 왕비의 합장릉인 무령왕릉(↑)은 1971년 발견되었는데, 발견 당시 도굴이 되지 않은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2906점의 유물이 쏟아져 이 가운데 12종 22점이 국보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무령왕릉은 특히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하고 무덤이 축조된 시기도 정확하게 밝혀진 고분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꼽히고 있다.  

웅진동에 있는 국립공주박물관(↑)은 이러한 백제의 유적과 유물 그리고 문화를 체계적으로 보전하고 계승하는 소중한 공간이 되고 있다. 무령왕릉에서 발굴한 유물을 전시하는 무령왕릉실과 원삼국 시대부터 부여로 천도하기 전까지 공주를 중심으로 한 백제문화를 보여주는 웅진문화실, 공주 일원에서 출토된 석조유물들을 전시한 야외전시장 등으로 구성된 공주박물관은 백제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주는 백제가 옮겨오기 훨씬 전부터 사람이 살기에 아주 좋은 고장이었던 모양이다. 이곳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터를 잡아 무리를 지어 생활하며 주먹도끼·돌망치·자르개 등 도구를 사용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흔적들은 금강변인 장기면 장암리의 석장리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는데, 석장리박물관은 우리나라에서 첫 선사박물관으로서 선사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알 품은 금닭과 승천하는 용 형국의 계룡산과 천년 고찰들

대전·논산 등과 경계를 이루는 계룡산(↓)은 높이가 845m로 그리 높은 편이 아니지만, 신라 때 5악 가운데 서악으로 제사를 지냈고 조선시대에는 중악단을 세워 산신제를 지낼 만큼 신령스러운 산으로 꼽혀왔다. 특히 조선 초에는 이성계가 계룡산 신도안에 왕도를 건설하려 했던 명당으로 알려졌다. 이때 무학대사가 산의 형국이 ‘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이요, 용이 날아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이라 하여 닭(鷄)과 용(龍)을 따서 계룡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영향이었는지 계룡산에서는 늘 무속신앙과 각종 신흥종교가 번성했고, 산 자체가 이들의 수도장으로 이용되어 계곡 곳곳에 교당·암자·수도원·기도원 등이 자리를 잡았던 적도 있었다. 아무튼 계룡산이 지리산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계룡산은 동쪽에 동학사, 서쪽에 갑사, 서남쪽에 신원사 등 품마다 천년 고찰을 안고 있다. 비구니들의 불교 전문 강원(講院)으로서 여승들이 불경을 공부하는 동학사는 신라 성덕왕 23년(724)에 창건되었으며, 고려말·조선초 삼은의 위패를 모신 삼은각과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냈던 숙모전 등이 있다. 갑사(↑)는 신라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로 420년 백제시대에 고구려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는데, 특히 가을 정취가 아름다운 사찰로 정평이 나 있다. 신원사도 의자왕 때인 서기 652년에 창건했다니, 계룡산은 산 자체의 아름다움과 함께 이러한 명찰들이 있어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한편 공주의 사찰을 이야기 할 때 사곡면 태화산 동쪽 산허리에 있는 마곡사도 빠뜨릴 수 없다. 마곡사는 현재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지만 643년 창건되었고, 절을 감돌아 흐르는 계곡물이 태극 형상을 하고 있으며, 예부터 기근이나 전란의 염려가 없는 길지에 자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백범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황해도에서 일본군 장교를 처단한 후 마곡사에서 계를 받은 뒤 수행했다는 백련암이 인근에 있다. 마곡사 입구 마을인 운암리(↑)는 2000여 점이 넘는 장승들로 공원을 조성하여 장승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갑사가 가을 정취를 자랑하는 데 비해 마곡사는 봄 풍경이 좋다.


천주교 순교지, 동학혁명 전적지, 박동진 전수관도 있어

공주가 선사시대와 백제 문화의 보고라고 하여 근세의 유적은 없을까. 그렇지 않다.

먼저 금성동에는 천주교도 순교지인 황새바위 성지(↓)가 있다. 공주는 충청도 감영이 있던 곳이기에, 1800년대 천주교 박해가 극심했던 때 신도들은 공주로 이송되어 처형되곤 했다. 공주 감영에 기록된 순교자만도 248위이고 무명 순교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하는데, 당시 신도들이 항쇄(죄인의 목에 채우는 널빤지로 된 형틀. 흔히 ‘칼’이라고 한다)를 찬 채 언덕의 바위 앞으로 끌려나와 처형되었기 때문에 순교 터를 항쇄바위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황새바위 성지에는 천주교 전래 200주년이던 1984년에 세운 순교탑이 있어 천주교 신자들은 물론 둘러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금학동의 우금치 전적지는 제2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최대 격전지로 농민군의 함성이 서린 곳이다. 농민군은 1894년 2월 1차 봉기 때 정부가 약속했던 사항들을 제대로 실행하지 않자 이해 11월 2차로 봉기하여 공주를 공격하고자 우금치 일대에 집결해 관군 및 일본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하지만 농민군은 신무기를 갖춘 조일 연합군에 의해 패퇴하고 전봉준 등 지도자들도 체포되거나 죽음을 맞았다. 이 역사의 현장에는 동학혁명군위령탑(↑)이 세워져 반제·반봉건을 외치며 분연히 떨쳐 일어섰던 농민군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공주는 우리 전통문화와 스포츠를 통해 코리아를 세계에 알린 사람들이 태어난 고장이기도 하다. 판소리 대가 고 박동진 선생과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박찬호가 이곳 공주 사람인 것이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는 말로도 친숙했던 박동진 명창(1916~2003)은 판소리 다섯 마당을 완창하여 현대 판소리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까지 우리 판소리를 알리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무릉동에는 박동진 명창의 맥을 계승하고 생애와 업적 등도 살펴볼 수 있는 박동진판소리전수관(↓)이 있다.  

우리 국민이 외환위기에 따른 IMF(국제통화기금)체제에서 고통받고 있을 때 미국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희망과 용기를 전해주었던 메이저리거 박찬호는 아직도 선수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어느덧 노장이 되었지만, 보다 넓고 큰 무대에 대한 동경을 현실로 이루는 개척자였다는 점에서 우리 스포츠사에 전설로 기록될 것이다.

매듭이 지어지지 않고 있는 세종시 문제가 어떻게 정리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공주는 어떤 식으로든 세종시와 연계되지 않을 수 없으며, 세종시 문제가 잘 풀리면 공주 역시 잘 풀리게 될 것이다. 공주는 과거 백제의 왕도였기에, 수도 이전에 버금가는 프로젝트인 세종시 건설을 통해 옛날의 영화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