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에서 쓰는 글

달력에서 사라진 권농일, 기억에서도 잊혀지는가

몽당연필62 2011. 5. 24. 10:43

달력에서 사라진 권농일, 기억에서도 잊혀지는가


지금은 달력에 표시조차 되지 않지만, 매년 5월 넷째 화요일은 농사를 권장하고 증산을 도모하기 위해 정부가 주관하는 ‘권농의 날(勸農日)’이었다. 올해 달력으로 치면 5월24일인데, 권농일은 광복 후 일손이 부족한 농촌의 모내기를 지원하기 위해 시작됐다.

정부는 1959년까지 6월15일에 권농일 기념식을 치르다 모내기를 하는 시기가 차츰 빨라지자 1960년부터 1972년까지는 6월10일로 앞당겨 치렀다. 모내기 일손을 더 쉽게 지원하기 위해 1973년부터는 6월 첫째 주 토요일로 권농일이 바뀌었고, 1984년부터는 5월 넷째 주 화요일로 또 다시 날짜를 앞당겼다.


권농일은 모내기철 농사 권장하던 정부 공식 기념일

권농일이 이처럼 정부가 주관하는 공식 기념일 가운데 하나였음에도, 우리는 불과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그런 날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 물론 정부가 1996년 권농일을 폐지하고 대신 ‘농업인의 날(11월11일)’을 공식 기념일로 제정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이지만, 우리 산업에서 농업의 비중이 줄고 먹을거리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 자체가 엷어진 것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비록 15년 전 권농일이 국가 기념일로서의 지위를 잃었다고는 하나, 해마다 이 시기가 되면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하면서 풍년을 꿈꾸던 마음마저 아주 사라져버렸겠는가. 권농의 정신은 이미 오랜 전통 속에서 우리에게 면면히 유전자처럼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인 권농행사는 선농단 친경(親耕)을 꼽을 수 있다. 예전에 임금들은 봄기운이 완연한 경칩 이후 길한 해일(亥日)에 서울 동대문 밖 선농단에서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제를 올리고 몸소 농사일을 했다고 한다. 선농단 친경은 일제 강점기 직전까지 행해졌으며 우리가 즐겨 먹는 설렁탕이 선농제를 지내고 끓여먹은 탕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왕비가 몸소 누에를 치고 고치를 거두던 일련의 의식인 친잠(親蠶)도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중요한 권농행사였다.

이처럼 농업을 만업의 근본으로 중시하는 역사적 바탕 위에서 우리 정부는 모내기철이 시작되는 무렵으로 권농일을 정해 농사를 장려했고, 때로는 대통령이 직접 농촌을 찾아 농민들과 함께 모내기를 하며 농업의 소중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농업 중시하고 먹을거리 귀하게 여기는 정신은 지켜야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농업기술이 발달해 농번기와 농한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먹을거리 역시 없어서 못 먹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먹기 때문에 섭취를 줄이느라 애쓰는 상황이다. 심지어는 농업 부문이 희생되더라도 공업 부문의 수출을 늘리는 것이 국가 전체에는 이익이라는 일부의 시각도 있다. 권농일이 사라진 것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이미 폐지된 권농일을 되살린다고 해서 우리 국민이 갑자기 농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고 농업의 위상이 높아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런 기념일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이 땅에 농업이 필요한 이유를 온 국민이 알아야 하며 농업 수호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들녘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이다. 이 모내기는 내년 이맘때에도, 십년 혹은 백년이 지난 뒤에도 계속 돼야 한다. 그리고 달력에서 사라진 권농의 날이 이젠 우리의 기억 속에서마저 희미해져 가고 있지만, 농사일을 권장하고 먹을거리를 귀하게 여기던 그 정신적 유전자만은 변형되지 않게 해야 한다. 본능처럼 ‘아, 이맘때가 권농일이었지!’ 하는 생각에 권농일 없는 달력을 보며 가져보는 단상이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