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가는 길

옥천, 금강 감도는 그곳이 꿈엔들 잊힐리야

몽당연필62 2009. 10. 13. 10:07

옥천, 금강 감도는 그곳이 꿈엔들 잊힐리야


충북 옥천군은 대전광역시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남한 땅의 거의 한가운데에 해당하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또 금강 상류 지역으로서 굽이굽이 물길이 아름다운 데다 제법 너른 들도 골골이 들어앉아 있어, 옥천(沃川)이라는 이름이 아무렇게나 붙여진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옥천군은 537㎢의 면적에 1읍 8면의 행정구역이 있으며 5만 4000명쯤의 주민이 산다. 서쪽의 대전광역시를 비롯해 동쪽의 경북 상주시, 남쪽의 충북 영동군, 북쪽의 보은군과 접하고 있는데 대전의 위성도시이자 근교 농업지로서 중요성이 강조되는 고장이다.

옥천 땅에 들어서니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곳이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로 시작되는 ‘향수(鄕愁)’의 시인 정지용(1902~1950)의 고향임을 알겠다. 곳곳에서 그의 시 제목이나 시구를 딴 문구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지용의 주옥같은 시들은 시비는 물론 건물 벽이나 가게의 간판, 거리의 플래카드 등에서 빛나고 있다.


옥천을 빛낸 시인 정지용과 의병장 조헌

잊혀져가는 우리 고향의 정경을 풍경화처럼 그려낸 정지용은 옥천읍 하계리에서 태어나 현재의 죽향초등학교인 옥천공립보통학교와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20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詩作) 활동을 한 그는 초기에는 모더니즘 경향의 시를 주로 발표했으나 후기에는 서정적이고 토속적인 시들을 많이 창작했다.

정지용은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평양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광복 후 좌익 문학단체에 관여한 경력 때문인지 이후 우리 문단에서 그의 작품을 언급하는 것은 금기였다. 다행히 1988년 해금되어 작품들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으며, 특히 1995년에는 ‘향수’가 통기타 가수 이동원과 테너 박인수에 의해 노래로 불려짐으로써 온 국민이 흥얼거리는 노래가 되었다.  

정지용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생가(↑) 옆에는 그의 동상과 함께 문학관(↓)이 세워져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또 1988년부터 해마다 5월에 열리고 있는 지용제는 전국 규모의 문학축제로 성장했는데,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은 물론 천재 시인 이상과 청록파 시인들을 등장시켰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자리가 되고 있다.  

한편 하계리 지척인 교동리는 옥천향교(↓)가 있으며 고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나고 자란 마을이기도 하다. 육 여사가 1925년 태어나 1950년 박 대통령과 결혼할 때까지 살았던 집은 현재 복원 및 정비를 위한 공사가 진행 중이며, 내년부터 방문객들을 맞게 될 것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헌 선생 유적지로 가는 길에 안내면 장계리의 장계관광지를 찾았다. 1980년 금강을 가로막은 대청댐이 완공돼 생긴 대청호반을 끼고 1986년 조성된 장계관광지(↓)는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다양한 놀이기구와 호반을 조망하며 거닐 수 있는 산책로, 산림욕장 등을 갖춰 이 지역 사람들에게 아늑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또 정지용 시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알려주는 조형물(↓↓)을 비롯해 여러 개의 시비가 곳곳에 세워져 정지용을 자랑스러워하는 옥천 사람들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장계관광지는 단순한 유원지가 아니라 옥천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민속의 향기도 함께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관광지로 들어서면 입구에서 먼저 옥천향토전시관(↓)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에 선사시대 유물과 옥천의 인물 및 민속 등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전시관 야외 연못에 복원된 신라 때의 돌다리 청석교(↓↓)와 동이면 청마리의 제신탑(祭神塔) 모형도 눈길을 끈다.  

 

 

중봉 조헌 선생(1544~1592)의 유적지는 몇 군데에 나뉘어 있다. 군북면 이백리에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던 서당인 이지당이 있고, 안내면 도이리에 선생이 서실로 지은 후율당(↓)이 있으며, 안남면 도농리에는 선생의 묘소·사당·신도비 등이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후율(後栗)당은 율곡 이이의 학맥을 잇는다는 의미로 지은 것이라니 선생의 학풍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경기 김포에서 태어난 선생은 관직에 있던 중 1584년 모함으로 파직되자 옥천에 후율정사(현재의 후율당)를 짓고 학문에 몰두했다. 임진왜란이 나기 직전 선생은 영·호남의 왜적 방비책을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592년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승군과 함께 청주를 수복했다. 이어 전라도를 지키기 위해 금산에 당도했으나 전력의 열세로 7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이에 선생의 문인들이 유해를 거둬 합장하니 곧 금산의 칠백의총이다. 다만 선생의 유해는 별도로 옥천으로 모셔졌다고 하며, 사당인 표충사(↑) 뒤에 묘소가 있다.  

 

한편 조선 후기 문신이며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1607~1689)도 옥천 사람이다. 이원면 용방리에는 정조 2년(1778)에 세운 송우암 유허비(↑)가 있어 선생이 이 마을에서 탄생하고 살았음을 알려준다. 송시열 선생은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의 스승을 지냈고 노론의 영수로서 당파싸움의 회오리 속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무려 여든셋의 나이에 사약을 마시고 눈을 감은 인물이다.


금강은 한반도 뒤집은 모습의 땅도 빚었다

옥천은 금강 상류 지역으로서 굽이굽이 물길이 아름다운 데다 제법 너른 들도 골골이 들어앉아 있어, 옥천(沃川)이라는 이름이 아무렇게나 붙여진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금강은 특히 대청댐에 이르러 호수가 됨으로써 옥천의 산수를 더욱 아름답게 하고 휴양과 휴식의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안남면 연주리 둔주봉에서 내려다보이는 한반도 모습의 땅도 금강이 빚은 선물이다. 금강이 휘돌아 흐르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깎고 쌓은 동이면 청마리 야산이 그곳인데, 다만 아쉬운 것은 한반도 지도를 좌우로 반전시킨 모습(↑)이라는 점이다. 또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인근 금강유원지도 나들이 장소로 인기가 높다.

장계관광지에서 대청호반을 보고 둔주봉에서 금강의 물돌이를 감상한 다음 상류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동이면 청마리로 가기 위해 다리를 건너니 금강 물살이 제법 급하다. 금강은 이쯤에서는 강이라기보다 커다란 계곡쯤으로 보인다. 청마리 청마분교 운동장 한쪽에는 제신탑(祭神塔)이라는 것이 있다. 돌덩이들을 바닥 지름 9m의 원추형으로 쌓은 제신탑은 마한 때부터 마을 경계 표시이자 문을 지키며 액을 막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학교는 폐교되었고 제신탑 주위도 잡초가 무성하다. 운동장에 거목으로 성장한 몇 그루의 플라타너스들과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제신탑은, 외국에서 들여온 것은 흥하고 우리가 오랫동안 소중하게 지켜왔던 가치들은 쇠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듯하다.  

가을의 해는 생각보다 짧아서, 자칫하다가는 계획했던 일정에 차질이 생기게 마련이다. 옥천 제일의 명산이라는 장령산(656m) 동쪽자락 중턱의 사찰 용암사에 이르니 어느덧 이내가 내려앉고 있다. 군북면 추소리 부소무니 선경(대청호에 아랫부분이 잠긴 암벽의 아름다운 풍광)도 볼 만하다는데 그곳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하게 생겼다. ‘부소무니’는 추소리를 구성하는 3개의 자연마을 가운데 한 마을의 이름이다.  

옥천읍 삼청리 용암사는 신라 진흥왕 13년(552)에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흥망성쇠를 거듭하여 현재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대웅전 옆 언덕 위에 세워진 쌍삼층석탑(보물 제1338호)과 절 뒤 암벽의 마애불(충북도유형문화재 제17호)은 천여 년의 세월을 견디며 고즈넉하게 서 있다. 특히 마애불 앞에서 바라보는 여명과 일출은 절경 중의 절경이어서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 옥천에서는 정지용 시인을 기리는 5월의 지용제 외에도 몇 개의 축제가 더 열린다. 해마다 3월 하순이면 이원면 묘목유통센터(↑) 등지에서 과수를 비롯한 묘목의 전시 및 판매와 접목 시연 등을 하는 옥천이원묘목축제가 열린다. 이 지역이 묘목 유통의 메카가 된 것은 70여 년 전부터 우량 과수묘목 생산을 위해 노력해온 결과라고 한다. 또 7월에는 옥천 포도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포도축제가, 9월에는 조헌 선생의 호국 정신을 선양하는 중봉충렬제가 열리고 있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