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에서 쓰는 글

서양화가 최철 개인전, 조립과 분해는 동의어다

몽당연필62 2009. 11. 11. 11:40

조립(組立)과 분해(分解)는 화폭에서 동의어가 된다


서양화가 최철 개인전

기간 : 2009년 11월 12일(목)~11월 18일(수)

장소 : 부천시청 아트센터(부천시 원미구 중동 1156)


최근 우연히 최철 화백의 작품 한 점을 소장하게 되었다. 최 화백이 교유한 지 삼십 년 넘은 지기지우인데도 그의 작품을 집 안에 들여놓고 감상하기는 처음이었다. 예술에 몸담고 살아가는 것은 같으나, 추구하는 분야가 그림과 소설로 서로 달랐던 때문이다.

이 작품은 별빛 영롱한 밤하늘과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유영하는 바다 속 풍경이 몇 개의 판에 나뉘어 있는 그림이다. 어떻게 보면 각각의 입체적인 판들이 하나의 평면으로 조립되는 중인 듯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하나의 평면이 각각의 부분으로 분해되면서 입체화하는 중인 듯도 하다.

어쨌든 최 화백의 작품은 우리 집에 와서 한동안 적지 않은 고생을 했다. 그림 앞을 오갈 때마다 나는 한숨을 쉬고 아내는 고개를 갸웃하고 아이들은 눈을 끔벅였으니,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그림이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가족이나 답답하기는 피차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던 차에 최 화백이 전시회를 앞두고 도록을 만든다면서 거기에 실을 글을 한 편 써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나는 그가 황토를 이용한 그림으로 화제의 중심에 선 적이 있었음을 알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화풍이나 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논할 계제가 아니니 사양했어야 마땅한 일인데 엉겁결에 그러마고 답하고 말았다.

그런데 맙소사! 글 쓰는 데에 참고하라며 보내준 작품 이미지들을 보니, 상당수가 집에 소장한 것과 같은, 조립 중인지 분해 중인지 모를 덩어리들이 화폭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작품 아닌가(문득, 이러한 표현 기법을 가리키는 미술 용어를 알고 싶어진다).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이 작품들이 막연하고 암담한 중에도 반가웠던 것은, 집에 있는 작품을 통해 비슷한 이미지에 익숙해졌던 덕분이다.   

 

나는 성인(聖人)인 예수와 부처 그리고 만인의 연인으로 일컬어졌던 마릴린 먼로와 오드리 헵번 등의 얼굴이 각각의 작품 속에서 왜 4개의 조각으로 나뉘었는지, 그 조각들이 어떤 각도와 비례를 유지하고 있는지, 조각들 너머의 배경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게다가 작품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내 사유(思惟)는 조립과 분해라는 말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채, 이 말들이 반의어가 아니라 사실은 동의어라고 단정을 지어버린다. 실제로 조립은 분해가, 분해는 조립이 가능하다는 것이 전제될 때 의미 있는 말이기는 하다.

문학 이론을 공부하다 보면 ‘그 나무에 그 열매’라는 말을 접하게 된다. 작품은 작가와 서로 독립되거나 분리된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이 어찌 문학에만 적용되랴. 그림 또한 화가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사회의 사람·시대·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관련을 맺으며 빚은 산물일 것이며, 최철 화백의 작품들 역시 다르지 않을 터이다.

필자는 단순하게 조립과 분해라는 말로 최철 화백의 작품들에 접근했지만, 같은 작품이라도 보는 이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최 화백의 작품들이 어떤 구성을 보이고 있으며, 그가 작품을 통해 자신이 영향 받은 사람과 시대와 환경을 어떻게 발현하고 있는지, 갤러리에서 직접 확인해보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이 될 것 같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