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않은 편지

[공처가의 편지 6] 당신의 천고마비

몽당연필62 2008. 9. 5. 10:19

당신의 천고마비


“당신의 우람한 팔뚝은 내 허벅지 굵기를 능가해버렸고, 잠을 잘 때 뒤척이다 다리를 내 몸에 걸치기라도 하면 가위눌린 듯 질식사의 공포에 시달리곤 하오. 게다가 당신을 안아올려 보려다 허리가 삐끗한 뒤로는 어리석은 모험 다시는 하지 않으리라 작정 했소. 그런데 당신, 정말 물만 먹어도 살찌는 체질 맞소?”


 

장마에 땡볕에 열대야에,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이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고 어느덧 가을이구려. 매미는 소슬한 바람을 맞아 울음소리에 힘을 빼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들이 시멘트 숲 도시에도 가을이 왔음을 알려주고 있소.

하늘도 좀 올려다보구려. 며칠 사이에 부쩍 파래지고 높아졌소. 시골집에는 벼가 제법 여물고 사과도 빨간빛을 띠어가고 있답디다. 천고마비(天高馬肥), 어느 누가 일컬었는지 몰라도 이 계절을 참으로 기발하고 적절하게 표현한 것 같지 않소?

아무튼 당신, 애들이 방학을 했는데도 휴가는커녕 학원 뒷바라지 하느라 학기 중보다 더 바쁜 여름 나느라고 고생 많았소. 이제 더위가 한풀 꺾였으니 몸도 마음도 쉬면서 재충전을 좀 하구려. 요즘 날이 서늘해지면서 여름 동안 운동을 쉬었던 사람들이 집 밖에 나와 다시 걷기를 하거나 줄넘기를 하는 모습이 많이 보이던데, 당신도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것이 좋겠소.

아…. 미안하오. 당신이 죽기보다 싫어하는 것이 운동이란 것을 내가 잠시 깜빡했더랬소. 하긴, 그 육중한 몸으로 달리기를 하다 보도블록이 깨지기라도 하면 얼마나 민망하겠으며, 줄넘기를 하다 땅이 꺼지기라도 하면 또 얼마나 남우세스러운 일이겠소. 나는 여름 내내 식욕도 없고 비지땀 흘리며 일하느라 허리띠를 한 눈금 줄였는데, 당신은 가끔씩 올라서보던 체중계를 이젠 아예 포기하고 침대 밑으로 넣어버렸으니 참 불가사의한 일이오.

여자들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다이어트 아니오? 한겨울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도 미니스커트를 입는 여자들의 속셈을 내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그 무서운 집념도 따지고 보면 치열한 다이어트의 결실 아니오?

내 말은 많은 여자들이 그러하니 당신도 다이어트를 하여 몸무게를 줄이고 찬바람에 당당하게 맨살 드러내 보라는 뜻이 아니오. 세상에는 보통 체형의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뚱뚱한 사람도 있고 깡마른 사람도 있으며, 그 몸매가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형성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외모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의 폭력이나 진배없지 않겠소.

얼마 전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에서 ‘출산드라’라 자칭하는 어떤 뚱뚱한 여자가 “날씬한 것들은 가라, 이제 곧 뚱뚱한 사람들의 시대가 오리니….” 하며 핏대를 세운 적이 있소.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웬 뚱뚱한 남자가 나와 ‘마른 인간 연구’ 어떻고 하며 떠듭디다. 그때 내가 “이것들이 약을 주는 거야, 병을 주는 거야?” 하며 당신 눈치를 살폈잖소.

나는 다만 연애와 신혼 시절 그 날씬하던 당신은 어디로 가고, 몸집 좋은 낯선 여자가 내 옆에 남아 있느냐는 것이오. 사실 애 둘을 낳고 키우며 조금씩 살이 찌기 시작했지만, 몇 년 전까지도 나는 당신이 뚱뚱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소.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장난이 아닌 거요. 당신의 우람한 팔뚝은 내 허벅지 굵기를 능가해버렸고, 잠을 잘 때 뒤척이다 다리를 내 몸에 걸치기라도 하면 가위눌린 듯 질식사의 공포에 시달리곤 하오. 게다가 당신을 안아올려 보려다 한번 허리가 삐끗한 뒤로는, 남편이란 작자가 허약해서 마누라도 못 들어올린다는 멸시를 받을지언정 다시는 어리석은 모험은 하지 않으리라 작정도 했소.  

이제 좀 더 찬바람이 나면 옷도 한 벌 사 입어야 할 텐데, 그것도 커다란 스트레스라오. 이 가게 저 가게 아무리 기웃거려 봐도 도무지 당신에게 맞는 옷이 없으니 이를 어쩐단 말이오. 우리나라 옷가게, 아니 의류업계는 참 나쁘오. 55사이즈나 66사이즈 옷만 잔뜩 쌓아놓고 있으니 이건 고객의 다양성을 철저히 짓밟는 처사가 아니며 뭐란 말이오.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해 88이나 99사이즈도 더러 갖다놔야 할 것 아니오?

게다가 더욱 기분 나쁜 것은 옷가게 주인인지 종업원인지 하는 작자들이오. 아니, 왜 다른 여자 손님한테는 “어머, 사모님! 어쩜 이렇게 맞춘 것처럼 딱 맞아요?” 하면서 온갖 아양을 다 떨고 기분을 맞춰주면서, 당신한테는 싸늘한 시선으로 위아래를 훑어보다가 비웃음 머금은 표정으로 “우리 가게에는 아줌마한테 맞는 옷 없어요!” 하는 거요? 손님이면 같은 손님인데 날씬하면 사모님이고 뚱뚱하면 아줌마라니, 어떻게 이런 천박한 구분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물론 같이 사는 나는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당신은 물만 먹어도 살찌는 체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식사 때 당신이 좀체 뭘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오. 이따금 주방에서 식구들 먹다 남긴 것 처리하거나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는 애들 간식 챙겨주다 잠시 시장기를 속이느라 김치에 밥 몇 숟갈 뜨는 것 말고는 통 먹는 게 없으니, 나는 이러다 당신이 영양실조라도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오. 그러니 당신이 사우나에 갈 때 물통에 커피라도 가득 담아가면 마음이 놓이고, 어쩌다 외식을 할 때 반찬그릇까지 싹싹 비워도 주위 사람들 눈치가 좀 보이긴 하지만 마음은 흐뭇해지는 것 아니겠소.

다만, 당신이 이렇게 먹는 게 부실한 데도 허리가 사라지고 나날이 늘어난 뱃살은 태평양 쓰나미처럼 하염없이 출렁이니 그 연유를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세상에 이런 일이!” 하며 근심할 따름이오.

이미 오래 전에 세계보건기구는 비만을 질병으로 선포했다고 하오. 병을 고치려면 병원에 가거나, 식습관을 바꾸거나, 운동을 하거나 해야 하지 않겠소. 아, 아! 눈 흘기지 마오. 내 말은 당신이 비만하다는 게 아니라 단지 일이 그렇다는 것이오.

나는 정말 집에서 당신이 뭘 제대로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없소. 이따금 한밤중에 주방에서 들려오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 혹 도둑이 든 게 아닌가 마음 졸이며 떨리는 손으로 골프채를 쥐었다가 문틈으로 보이는 어깨 떡 벌어진 당신의 뒷모습에 후유 안도의 한숨을 내쉴 뿐…. 그러니 당신은 분명히 몸이 부은 것이지 절대로 비만일 턱이 없소.

그러고 보니 곧 추석이구려. 차례 지내러 시골에 내려가면 산해진미가 기다릴 터이니 부모님 앞에서 안 먹을 수도 없고 이를 어쩐단 말이오. 어찌 음식뿐이겠소. 부모님은 햅쌀이며 옥수수며 고구마를 자동차 트렁크가 주저앉도록 실어주실 것이니 이것도 처리할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난감하오. 이래저래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구려. 하늘이 높아가는 만큼 당신은 먹은 것도 없이 살집만 늘어나니….

그런데 나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있으니, 솔직하게 말해보오. 당신 정말 물만 먹어도 살이 찌는 거 맞소? 내가 퇴근해 집에 들어가면 양푼이며 대접들이 왜 설거지통에서 몸을 불리고 있는 거요?


글 : 몽당연필 / 일러스트 : 김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