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않은 편지

[공처가의 편지 5] 여자보다 약한 존재, 남자

몽당연필62 2008. 8. 1. 09:25

여자보다 약한 존재, 남자


남자는 세 번만 운다는 말 다 헛소리요. 드라마의 애틋한 장면에 눈시울이 젖고, 양치질하다 칫솔대로 잇몸을 쳤을 때도 눈물을 찔끔거리오. 회식 2차로 끌려간 노래방에서는 높으신 분 돼지 멱따는 소리에 마음에도 없는 앙코르를 외치는 비굴을 감수해야 하오. 대한민국 남자들이 울고 싶은 대로 다 울면 아마 눈물이 강을 이루고 홍수가 날 거요.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많은 차별을 받고 있다고 말하오. 가정에서는 가사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직장에서는 중요한 업무나 승진에서 배제되고…. 틀린 말 아니오. 나 역시 남자지만, 쥐뿔도 잘난 것 없으면서 여자 앞에서 큰소리치고 온갖 개폼 다 잡는 남자들 많소.

그래도 최근 들어 양성 평등에 대한 공감대가 넓어지고 있는 것은 참 다행이라 할 것이오. 우리 회사를 보더라도 남성에 대한 여성의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은 거의 사라진 것 같소. 일의 성격에 따라 여직원에게 업무를 달리 주는 성 역할의 차이는 있어도 급여와 승진에 대한 차별은 많이 해소된 듯하니 말이오. 삼종지의와 남존여비의 오랜 관습에서 벗어난 우리 여성들에게,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천국까지는 아니더라도 살기에 제법 괜찮은 나라가 아닐까 싶소.

이렇게 여성의 권익이 신장되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남자들의 설 자리가 점차 좁아지고 목소리도 작아지고 있다는 점이오.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특히 가정에서 상실감과 함께 위기감을 크게 느끼고 있는 것 같소. 물론 그동안 가부장적 문화에서 절대 권력을 누려온 남자들이 기득권을 빼앗긴 데서 느끼는 상대적인 박탈감일 수도 있을 것이오.

 

이쯤에서 당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눈치 챘는지 모르겠소. 그렇다면 에두를 필요 없이 시야를 우리 집으로 고정하고 이야기를 해봅시다. 요즘 나 당신한테 서운한 거 많소. 당신 목소리는 너무 크고 나는 그러한 당신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오. 집안 대소사를 당신 혼자 결정하고 내 의견은 일언지하에 묵살하기 일쑤이니 답답하다 못해 서러울 때가 많소.

당신은 분명히 손사래를 치며 “내가 뭘 어쨌다고 그렇게 볼멘소리냐”고 말할 것이오. 한번 생각해보구려. 최근에만 하더라도 옷장은 두 짝을 사자니까 한 짝만 샀고, 시골 부모님 용돈 좀 올려드리자니까 흰자위 쏟아지게 눈을 흘겼고, 컴퓨터는 몇 만 원 싸다는 이유로 덩치만 큰 구식 모델을 선택했고, 몇 년 만에 집에 찾아온 친구들에게는 식당밥을 먹여 보냈고…. 이 모든 일을 형식적으로는 나와 의논했지만, 사실은 당신이 일방적으로 다 알아서 처리한 것 아니었소?

휴일을 보내는 것도 마찬가지요. 직장생활 하는 대부분의 남자들, 일주일 동안 일하며 지칠 대로 지쳐 쉬는 날이면 늦잠도 자고 빈둥거리며 텔레비전도 보고 하는 것이 낙일진대, 꼭 이불을 젖히고 애들 공부에 방해된다며 텔레비전을 탁 꺼버려야겠소?

 

남자들, 겉으로는 대범한 척해도 얼마나 소심하고 잘 삐치며 자존심에 쉽게 상처 받는지 아오? 당신이 내 의견을 무 토막 자르듯 싹둑 자를 때마다,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강제로 일으켜 세울 때마다, 내가 도대체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기도 하고 한 주일 동안 죽어라 일한 사람이 가사 분담이라는 미명 아래 이따 밥 먹고 나면 설거지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해 눈물이 앞을 가리곤 하오.

뚱딴지같이 남자가 눈물은 무슨 눈물이냐고? 그런 소리 마오. 남자는 세 번만 운다는 말 다 헛소리요. 눈물은 결코 여자의 전유물이 아니라오. 우리나라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도 눈시울이 뜨겁고, 드라마에서 이별 장면을 봐도 콧등이 시큰해지며, 자식이 선생님께 야단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눈물이 나오. 그뿐인지 아오? 발끝으로 문턱을 걷어찼을 때, 삐져나온 코털을 뽑다 실패했을 때, 양치질하다 칫솔대로 잇몸을 쳤을 때도 눈물을 찔끔거리오.

대한민국 남자들이 그놈의 체면과 품위 때문에 억지로 눌러 참는 것이지, 울고 싶은 대로 다 울면 아마 눈물이 강을 이루고 홍수가 날 거요. 이렇게 약한 존재가 바로 남자라는 허울 좋은 존재요.

나는 가끔 전업주부인 당신이 과연 직장인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해집디다. 남자건 여자건 월급쟁이는 정말 불쌍하오. 다달이 따지는 업무 추진 실적에 시달리고, 버스 타고 퇴근하다가도 윗분이 찾으면 득달같이 회사로 복귀해야 하오. 당신 알듯이 야근이나 철야도 밥 먹듯이 하잖소. 그 와중에 불시에 소집되는 회식에 참석해야 하며, 노래방에 끌려가 높으신 분 돼지 멱따는 소리에 마음에도 없는 앙코르를 외쳐드려야 하오.

우리 회사 직원 하나는 맡은 업무가 영업이라 거래처 접대를 자주 하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술을 자주 마시고 귀가도 늦곤 하오. 진저리가 난 그의 부인이 어느 날 또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이혼하겠다고 선언하는 통에 그는 어쩔 수 없이 ‘금주’ 하고 혈서를 썼다오. 그런데 면도칼로 손가락을 깊이 그었는지 혈서를 다 썼는데도 피가 그치지 않아 순간적으로 획이 많은 한문으로 ‘禁酒’ 하고 쓸 걸 하고 후회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소.

 

어쨌든 내가 꼭 술을 마시고 싶어 마시겠으며, 휴일이면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 피우겠소? 당신은 내가 피곤해할 때마다 “그렇게 힘들면 사표 내고 다른 일 알아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만, 당신의 그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내뱉는 사표 이야기가 내 가슴에 얼마나 아프게 꽂혀오는지 아오? 얼마 전 지방자치단체들이 업무 실적 부진한 공무원 내쫓겠다고 퇴출 비율 정해서 으름장 놓았던 것 당신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오. 그거 남의 이야기가 아니오. 나도 오늘 회사에서 상반기 영업 실적이 부진하다며 한소리 들었소. 이러다 어느 날 나도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구조조정의 칼날을 받게 되지나 않을까, 몇 올 남지 않은 머리털이 다 곤두선다오.

 

나는 슈퍼맨도 아니고 감정 없이 돈만 버는 기계도 아니오. 울고 싶어도 가장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가족에게는 힘들다 말 못하고 술잔에 눈물을 타 마셔야 하는, 그러나 한 번 내놓고 울기 시작하면 눈물로 술잔이 넘쳐버릴 여리고 약한 남자요.

집에 있는 당신도 애들과 내 뒷바라지하랴, 푼돈 쪼개 살림하랴, 힘들다는 거 모르는 바는 아니오. 하지만 지쳐 있는 남편에게 말 한 마디라도 조금만 더 따뜻하게, 조금만 더 부드럽게 해주면 안 되겠소? 이 뜨거운 여름, 해수욕장이나 계곡 대신 회사에서 피서 아닌 피서를 하고 있는 남편에게 말이오!


글 : 몽당연필 / 일러스트 : 김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