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가는 길

예산, 윤봉길의 충의와 수덕의 사랑이 흐른다

몽당연필62 2009. 4. 2. 14:50

예산, 윤봉길의 충의와 수덕의 사랑이 흐른다


충남 예산(禮山)군은 542.8㎢의 면적에 2읍 10면의 행정구역으로 이뤄졌다. 쌀·사과·한우·버섯 등이 특산물로 꼽히는 농촌지역이지만, 수덕사와 덕산온천 등 빼어난 관광자원과 휴양지가 있으며 인구도 9만 명이나 되는 제법 번성한 군이다.

예산은 특히 1932년 중국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의거로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농민운동을 전개한 곳이기에 충의(忠義)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또 수덕도령과 덕숭낭자의 사랑 이야기가 창건 설화로 전해오며 여승을 많이 배출하는 수덕사도 예산에 있는 사찰이다.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 이루기 전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난 윤봉길(1908~1932)은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이듬해 이 지역에서 3~4월에 걸쳐 일어났던 3·1운동의 민족적 분노를 목격하고 식민지 노예교육을 거부하며 자퇴했다. 대신 한학을 배운 그는 1922년 배용순과 결혼했고 신문학을 독학한 뒤 1926년 문맹퇴치운동을 시작으로 농촌계몽을 시작했다.

 

 

윤봉길은 농촌계몽을 위해 ‘농민독본’을 저술했는데, ‘농민은 세상 인류의 생명창고를 그 손에 잡고 있다. 우리 조선이 돌연히 상공업의 나라로 변하여 하루아침에 농업은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이 변치 못할 생명창고의 열쇠는 의연히 지구상 어느 나라의 농민이 잡고 있을 것은 사실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여기에 들어 있다.

1929년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 충격을 받아 민족운동에 대한 방향전환을 모색하던 윤봉길은 이듬해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는 편지를 남긴 채 가족도 모르게 집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만주를 돌며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던 그는 193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했으며, 김구를 찾아가 민족의 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밝힌 1932년 4월 29일 천장절(일본 왕의 생일)을 맞아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일본의 상하이사변 전승축하기념식에서 물통과 도시락에 장착한 폭탄을 던져 상하이 파견군 시리카와 대장 등을 즉사시켰다.

 

 

조국 독립의 열망과 대한 남아의 기개를 만방에 떨치고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은 일제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고,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총살되어 순국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 불과 스물다섯이었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1946년 고국으로 모셔와 광복 후 첫 국민장으로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하였으며,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시량리에는 윤봉길 의사 사적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그가 태어나 4세까지 살았던 생가 광현당(光顯堂)과 성장기부터 만주 망명 때까지 살며 농촌계몽활동을 펼쳤던 저한당(抯韓堂)이 복원되어 있으며 영정을 봉안한 사당 충의사(忠義祠)도 세워져 있다. 특히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훙커우공원 의거를 자세히 알려주는 기념관과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는 주옥같은 말씀들을 새겨놓은 어록탑을 둘러보노라면, 일제로부터 이 나라를 거저 되찾은 것이 아니라 윤봉길 의사와 같은 선열들의 충의가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방 견성암이 있는 수덕사

윤봉길 의사 사적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495m) 자락에는 백제 위덕왕(554~597) 때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덕사가 자리 잡고 있다. 수덕사는 백제 무왕때 혜현법사가 강론을 했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화상이 중건했으며 조선 고종 2년(1865년)에 만공선사가 중창한 고찰로서 우리나라 선종(禪宗) 불교의 수도장으로 유명하다.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때인 1308년 건립된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목조 건축물이다. 이 대웅전은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우리나라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로 꼽히며, 백제 계통의 목조건축 양식을 이은 고려시대 건물로서 형태미가 뛰어나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되어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이곳 수덕사는 목사의 딸로 태어난 우리나라 개화기의 신여성이자 문인이며 자유연애를 지향했던 김일엽(1896~1971)이 불교에 귀의해 수도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김일엽의 동갑내기 친구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1896~1948)도 이혼 후 중이 되려고 경내의 수덕여관에서 3년 동안 머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민요가수 송춘희 씨가 불렀던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 주인공이 바로 김일엽이었다고 전한다. 이처럼 불교에 귀의하려는 여성이 수덕사를 찾고 실제로 많은 여승이 수덕사에서 배출되는 것은 수덕사에 딸린 견성암이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여승) 선방(禪房)이기 때문이다.

 

 

수덕사 창건과 관련해서는 하나의 전설이 있다. 홍주마을 수덕도령이 건넛마을 덕숭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져 청혼했으나, 덕숭낭자는 여러 번 거절 끝에 자기 집 근처에 절을 지어줄 것을 조건으로 허락했다. 수덕도령은 절을 짓기 시작했으나 탐욕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완공 순간에 절이 불타버렸다. 그는 다시 절을 지었지만 역시 마음이 정갈하지 못해 또 불이 나고 말았다. 수덕도령은 세 번째에야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며 절을 지어 무사히 완공했고, 낭자와 결혼하여 끌어안는 순간 낭자가 사라져버렸는데, 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 이후 절 이름은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고 산은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 수덕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덕산면 대동리에는 우리민족 고유의 건축미를 응집하고 표현하여 고건축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이고 세계인들에게 그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해서 건립한 한국고건축박물관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박물관은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국내의 대표적인 사찰, 탑, 불상 등 17종의 축소 모형 100여 점과 국보급 문화재 축소 모형들을 전시해 국내 학생은 물론 해외 교포들에게 한국 건축에 대한 우수성을 인식시켜주고 있다.

 

 

또 덕산면 상가리에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묘가 있다. 대원군은 원래 절터이던 이곳이 후손 2대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절을 불태운 뒤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였는데, 7년 후 훗날 고종황제가 되는 차남 명복을 낳았다.

덕산면에는 이렇게 윤봉길 의사 사적지와 고찰 수덕사, 고건축박물관, 남연군의 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면사무소 소재지 일대에 온천관광지까지 조성되어 있으니, 이 지역이야말로 예산 관광과 휴양의 백미라 하겠다.


달밤에 볏단 나르던 ‘의좋은 형제’는 전설이 아니다

덕산면 지역을 둘러보고 이번에는 신암면으로 향했다. 용궁리에 추사 김정희의 고택이 있기 때문이다. 김정희(1786~1856)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금석학자로 특히 서예에서 독특한 추사체를 탄생시킨 인물. 추사 고택은 그가 태어난 집이며 그의 증조부가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택은 문간채를 들어서면 서쪽에 안채, 동쪽에 사랑채가 배치된 구조인데 명문가의 집답게 위엄이 느껴진다. 김정희는 이곳에서 학문적 소양을 쌓았고 훗날 큰 정치가로 성장했을 터이다.

 

 

고택으로부터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는 수령 약 200년 정도의 백송 한 그루가 서 있다. 김정희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가져온 종자를 심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예산에서의 일정은 예당저수지를 돌아보며 마치기로 했다. 예당저수지는 응봉면과 대흥면 사이를 막은 저수지로 1963년 완공되어 예산군과 당진군에 걸쳐 펼쳐진 홍문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는데 둘레가 무려 40㎞에 이른다. 당연히 낚시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일대에 매운탕 등 민물고기 요리를 하는 집도 많다.

 

 

 

응봉면 후사리 일대에는 예당관광지가 조성되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휴식과 문화 향수의 공간이 되고 있다. 특히 예당저수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는 조각공원과 야외공연장, 산책로, 야영장 등이 설치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 나온 ‘의좋은 형제’ 이야기를 기억하시는지. 가난하지만 의좋게 살아가는 형제가 추수를 한 뒤 밤이 되자 형은 동생에게 동생은 형에게 더 많은 볏단을 쌓아주려다가 달이 떠서 서로를 알아보고 얼싸안았다는 그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그냥 지어낸 이야기나 전설이 아니다. 응봉면에서 저수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광시면 방향으로 가면 대흥면 동서리가 나오는데, 여기에 ‘의좋은 형제’의 실제 주인공인 이성만·이순 형제의 효제비가 있는 것이다. 효제비 옆에는 형제가 볏단을 옮기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도 세워져 있다.

 

 

이 효제비는 원래 연산군 때 인근 상중리에 세운 것으로 예당저수지로 인한 수몰 위험이 있어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 비문은 ‘성만·순 형제가 보모를 극진히 봉양하다 부모가 죽자 성만은 어머니 묘소를 순은 아버지 묘소를 지켰고, 3년상을 마친 뒤에는 아침에는 형이 아우 집을 찾고 저녁에는 아우가 형 집을 찾았으며, 음식 한 가지만 생겨도 서로 만나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광시면 관음리에는 구한말 유학자이며 의병장인 면암 최익현(1833~1906)의 묘가 있다. 최익현은 경기 포천 사람으로 을사조약 후 의병활동을 하다 일제에 붙잡혀 대마도에 유배되어 순절하였다. 최익현의 묘는 원래 논산에 있었는데, 참배객이 많자 1910년 일제의 명령으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오는 2012년이면 충남도청이 예산군 삽교읍과 홍성군 홍북면 일원으로 이전해온다. 도청이 오면 유관기관과 공기업들도 상당수 옮겨오게 마련. 도청을 중심으로 2030년까지 12만 명이 거주하는 신도시가 건설된다니, 예산은 충남의 새로운 중심지로서 더욱 크게 발전해갈 고장이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