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가는 길

완주, 산과 들이 조화 이뤄 물산도 풍부하다

몽당연필62 2009. 2. 3. 10:23

완주, 산과 들이 조화 이뤄 물산도 풍부하다


전북 완주군은 그곳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럴 리가?” 하며 서운한 생각이 들지 몰라도, 전주의 그림자에 가려져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는 고장이다. 그러나 완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풍광이 좋은 8경과 우수한 농산물인 8품, 향토음식인 8미가 있다. 들녘과 산이 조화를 이루니 물산이 풍부하고 그 품질과 맛도 빼어나다. 완주의 진면목은 그곳을 직접 찾아보았을 때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대둔산

 

인구 8만여 명으로 군단위로는 제법 큰 규모인 전라북도 완주군은 어찌 보면 참 안타깝고, 또 어찌 보면 참 재미있는 고장이다. 안타깝다는 것은, ‘완주’라는 지명은 그런대로 귀에 익은데 전북 사람이 아니라면 그곳이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이가 그다지 많지 않아서다. 더구나 군청이 전주시에 있기 때문인지 ‘완주군’을 전주시 ‘완산구’와 혼동하거나, 전주시에 통합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반대로 재미있다는 것은, 완주군이 전주의 북쪽으로부터 동쪽을 거쳐 남쪽에 이르기까지 빙 둘러쳐져 마치 전주를 아기처럼 품에 안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완주군을 이루는 2읍 11면 가운데 서쪽에 있는 이서면은 전주와 김제에 둘러싸여 완주의 다른 어떤 땅과도 이어지지 않은 채 마치 섬처럼 홀로 놓여 있다. 완주는 만경강 중류인 서북쪽에 너른 평야가 드리워진 반면 다른 지역에는 산이 많아 땅의 생김새도 곳에 따라 매우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솔직히 말하자면, 완주를 여행하기로 정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도중에 여행지를 다른 곳으로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닌지 많이 망설였다. 다른 지역과 달리 손에 꼽을만한 관광지나 유적지가 별로 눈에 띄지 않고, 완주군이 자랑으로 내세우는 농특산물도 아직은 제철이 아니어서 취재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평지에 있어 더욱 친근하게 다가오는 사찰

그런데 오기 비슷한 마음이 생겼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명한 고장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고장을 소개하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다행히 완주에는 8경·8품·8미라는 것이 있으니 이것만 제대로 소개해도 좋은 정보가 되지 않겠는가.

 

 

완주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소양면에 있는 사찰 송광사다.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서기 867년) 도의선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며, 전라남도 순천에 있는 송광사와 이름이 같다. 규모는 순천 송광사보다 작지만 분위기가 아늑하고 봄이면 진입로부터 약 2㎞에 걸쳐 펼쳐지는 벚꽃길이 장관을 이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이 산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과 달리 송광사는 마을 한쪽 평지에 자리해 친근감을 준다.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거리도 채 100m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깝다. 일주문·금강문·천왕문을 차례로 지나 경내에 들어서니 먼저 십(十)자형 또는 아(亞)자형이라고 하는 종루(↑)가 눈길을 끈다. 이 종루는 처마 장식과 단청이 유난히 아름다운데, 십자형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특히 종루로는 유일하다고 한다. 대웅전 안에는 흙으로 빚어 법당에 모신 좌불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삼존좌불상이 있다. 높이 5m가 넘는 이 삼존좌불상은 나라에 어려운 일이 닥치면 땀을 흘리는 기적을 보인단다.

 

 

송광사에서 동상면 방향으로 추줄산(위봉산) 굽잇길을 넘노라니 길 양쪽 산허리를 돌로 쌓은 성 하나가 길게 둘러 감고 있다. 위봉산성(↑)이다. 위봉산성은 조선 숙종 원년(서기 1675년) 축조한 것으로, 유사시 전주 경기전에 모셔져 있는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안전하게 피난시키기 위해 쌓았으며 길이가 16㎞에 이른다. 실제로 동학농민혁명 때 전주가 동학군에 의해 함락되자 태조의 영정과 시조의 위패를 피난시킨 일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성벽 대부분이 허물어지고 성문도 하나만 남아 있는데, 그나마 문루는 없고 높이와 너비 각 3m의 반월형 석문만 남아 있다.

위봉산성 지척에는 또 하나의 천년고찰 위봉사가 있다. 위봉사 역시 마을과 인접해 평지나 다름없는 곳에 세워졌는데 백제 무왕 5년(604년)에 서암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일설에는 신라 말기 최용각이라는 사람이 전국 산천을 유람할 때 풀섶에서 상서로운 빛이 비쳐 가보니 세 마리의 봉황새가 있어 그 자리에 절을 짓고 위봉사(圍鳳寺)라 했다고 한다.

 

 

아담하고 정갈한 느낌을 주는 위봉사 경내에서는 사물(四物)을 안치한 종각(↑)이 관람객을 맞는다. 이 종각 안에는 큰 나무를 깎아 물고기 모양으로 만든 목어, 쇠를 구름 모양으로 만든 운판, 양면을 쇠가죽으로 메운 큰 북인 법고, 소리가 장엄하고 여운이 긴 범종이 있고 종각 옆에 사물에 대한 설명을 담은 안내판이 세워져 불교문화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젓한 드라이브 코스와 도립공원 대둔산

관광 안내도에는 위봉사 근처에 위봉폭포가 있다는데, 위봉사를 떠나며 두리번거려도 폭포라고는 보이지가 않는다. 완주에 폭포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던 터라, 있더라도 규모가 작아 이미 지나쳐버렸겠지 생각하며 길을 재촉하는 순간 갑자기 눈앞에 천길 낭떠러지처럼 깊은 계곡이 펼쳐지면서 어디선가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제법 우렁차게 들려온다. 계곡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지나왔던 길 바로 옆에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다.

위봉사 인근 산골짜기에서 흘러온 물이 모여 떨어지는 위봉폭포는 50m 높이의 상단과 10m 높이의 하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단 폭포 아래에는 오랜 세월 동안 떨어진 물에 바위가 패여 형성된 못이 있다. 폭포가 잘 바라보이는 도로변 휴게소에서 차를 파는 사람의 말에 따르면 비가 많은 여름에는 수량이 늘어 굉음과 함께 장관을 이루며, 이 모습을 보려는 관광객과 사진작가들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위봉폭포를 몇 번이나 뒤돌아보면서 완주군의 가장 동쪽 동상면에 있는 운장산계곡으로 향했다. 신월교라는 다리를 지나 운장산에 이르는 9㎞의 계곡은 동상호로 흘러드는 맑은 물과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원시림이 일품이다. 진안군과 경계를 이루는 운장산에 드리워진 이 계곡 일대가 전국 8대 오지의 하나로 꼽힌다니 산도 물도 맑은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그러고 보니 위봉사에서 운장산계곡(위 왼쪽)에 이르는 길이나 운장산계곡에서 대아수목원(위 오른쪽)을 거쳐 인공 저수지인 대아호를 둘러보는 길은 드라이브 코스로도 안성맞춤이다. 이 일대는 협곡과 호수가 조화를 이루고 인적이 뜸해 분위기가 호젓하며 싱싱한 민물고기 매운탕을 맛볼 수도 있다. 대아수목원은 전북산림환경연구소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대아호와 가까이 있는데 무궁화원·장미원·관상수원 등 전문 수목원이 조성되어 가족과 연인이 수목원 관람과 드라이브를 겸하기에 적합하다.

이번에는 또 하나의 큰 저수지인 경천호를 잠시 둘러보고 완주군의 최북단이며 충남 금산군·논산시와 경계를 이루는 운주면 대둔산으로 향했다. 높이가 878m인 대둔산은 도립공원으로서 전체 공원 면적 중 38.1㎢가 완주에, 나머지 24.5㎢가 금산과 논산에 속해 사실상 완주의 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산을 충청도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은 아무래도 서울에서 대둔산을 찾는 사람은 금산이나 논산 쪽에서 산행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대둔산 정상인 마천대까지는 등산로로 오를 수도 있지만 케이블카를 타고 중턱까지 가서 높이 81m, 길이 50m, 너비 1m의 구름다리(↑)를 건너보는 기분도 짜릿하다. 특히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한달음만 올라가면 눈앞에 펼쳐지는 웅장하고 거대한 암벽과 기암 무리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완주의 산들은 대개 능선이 부드러운데 유독 대둔산만은 정상을 중심으로 화강암반이 펼쳐져 색다른 느낌이 더욱 강렬하다.


8품은 농산물, 8미는 별미 음식

완주8경은 이제까지 돌아본 송광사, 위봉사·위봉폭포, 동상 운장산계곡, 대아저수지, 경천저수지, 대둔산 도립공원과 남쪽에 위치해 찾아보지 못한 모악산 도립공원, 죽림온천·금계계곡을 일컫는 것이다.

모악산은 완주·김제·전주에 걸쳐 솟았는데 산에 오르면 드넓은 호남평야가 발아래 펼쳐진다. 신라 말 견훤이 이곳에서 후백제를 일으켰고, 조선 말 강증산은 모악산 대원사에서 도를 깨우쳐 증산교를 일으켰다고 한다. 한편 죽림온천·금계계곡은 전주와 남원을 잇는 국도가 관통하는 상관면에 있다. 죽림온천은 알칼리성 중탄산나트륨형 유황온천으로 수영장과 숙박시설 등 부대시설이 잘 갖춰져 있으며 뒤편으로 수려한 경관의 금계계곡이 드리워져 있다.

대둔산을 내려오면서 완주의 8품과 8미 가운데 최소한 한 가지씩은 맛을 봐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마침 케이블카 승강장 가까이에 농특산품 판매장이 보인다. 운주면에서는 감과 대추가 많이 생산되며 특히 감은 곶감으로 가공돼 판매된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여행지에서 그곳의 특산품을 구입하곤 하는데 완주에서는 곶감(↙)을 한 상자 구입했다.

완주8품은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주산지별로 봉동 생강과 포도, 이서 배, 삼례 딸기, 비봉 수박, 동상·운주·고산·화산 등지의 감, 동상·상관 등지의 표고버섯, 경천 대추가 완주 8품에 든다. 들과 산이 알맞게 조화를 이룬 덕에 다양한 농산물이 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8품이 농산물이라면 8미는 별미 음식으로, 참붕어찜(↑)·민물고기매운탕·한우고기구이·순두부백반·도토리묵·토종닭백숙·보리밥·산채백반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참붕어찜 맛을 보기 위해 경천호를 끼고 있는 화산면 소재지의 한 음식점을 찾았다. 음식점 주인에게 참붕어찜을 주문하며 사진을 찍어야 하니 붕어가 부스러지지 않게 잘 조리해달라 부탁하고 카메라를 꺼냈더니 내심 불안해하는 눈치다. 참붕어찜 사진이 혹시라도 안 좋은 용도로 쓰이는 게 아닌가 걱정했던 모양이다. 잔가시를 발라가며 양념이 잘 밴 시래기와 함께 먹는 참붕어찜이 무척 얼큰했다.


농민이 신음하면 나라가 아픈 것이다

삼례읍 신금리 완주향토문화예술회관 옆에는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이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무엇인가. 폭압에 신음하던 농민들이 궐기하여 탐관오리와 외세에 항거한 역사적 사건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인 것이다.

삼례 지역은 1892년 수천 명의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에 시위를 했던 곳이며, 1894년에는 10만 여 농민군이 항일투쟁의 오색 깃발을 앞세우고 집결하여 나라를 바로잡고자 봉기한 반봉건·반외세 투쟁의 현장이다.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은 그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고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1992년 조성되었다. 이 광장에는 당시 농기구를 든 농민군의 봉기 모습을 형상화한 ‘대동의 장’과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추념의 장’, 농민혁명의 뜻을 기리기 위한 ‘선양의 장’ 등으로 나뉘어 각각 특성에 맞는 상징물이 들어서 있다. 완주에는 운주면에 대둔산 농민군 최후 항전지도 있으니 격동의 시기 우리 농민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장이기도 하다.

완주에서의 마지막 행선지는 용진면 구억리에 있는 신창(神唱) 권삼득 선생(1771~1841) 생가였다. 조선 후기 판소리의 명창인 선생의 본명은 권정(權政)으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음악적인 재질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글 배우기를 싫어하고 판소리만 배우다가 집안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그의 타고난 성대는 듣는 사람을 황홀하게 하여 조선 순조 때 판소리 8대 명창이자 양반광대로 명성을 날렸다.

 

 

양반으로 태어났으면서도 힘겨운 광대의 삶을 자청했던 진정한 예인 권삼득 선생. 그는 흥부가를 잘 불렀고, 새타령을 부를 때는 인근 숲에서 새가 날아들었다고 한다. 권삼득 선생의 생가(↑)와 묘에는 오늘날에도 소리를 하는 후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완주를 떠나면서, 우리나라 땅덩이가 좁다고 말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잘 모르는 고장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달았다. 이름으로는 자주 들어왔으면서도 그곳이 정작 어디에 있는 고장인지, 그곳의 무엇이 유명한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던 완주. 특히 농민이 아프면 나라가 아픈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완주 여행은 그래서 더욱 보람이 있었던 ‘완주의 재발견’이었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