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가는 길

영주, 무량수전과 소수서원이 있는 선비의 고장

몽당연필62 2009. 3. 12. 11:26

영주, 무량수전과 소수서원이 있는 선비의 고장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름난 절을 꼽을 때 어떤 이는 부석사부터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몇 해 전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이 널리 읽힌 적이 있는데, 무량수전이 바로 부석사에 있는 법당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은 고려말엽의 학자 안향 선생을 배향한 소수서원이다. 이처럼 소중한 문화재들을 지닌 고장 경북 영주로 여행을 떠났다.


경상북도의 북부에 위치한 영주(榮州)시는 669㎢의 면적에 1읍 9면 13동으로 이뤄졌으며 인구가 약 11만 명이다. 북서쪽으로 소백산맥 줄기가 드리워져 소백산 주봉인 비로봉(1439m)을 비롯해 국망봉(1421m)·연화봉(1394m)·도솔봉(1315m) 등이 솟았고, 북쪽은 강원 영월군, 북서쪽은 충북 단양군과 닿았다.

 

 

영주를 찾은 여행객은 가장 먼저 어디를 들를까 생각하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부석면의 부석사(↑)로 길을 잡았다. 학교 다닐 때 부석사 무량수전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외웠던 데다(요즘에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을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친다-문화재청 봉정사 극락전 설명 자료), 몇 해 전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이 널리 읽히면서 더욱 유명해진 사찰이 부석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 이름난 절을 꼽을 때 부석사를 맨 처음 떠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터이다.


‘배흘림기둥’으로 더욱 유명해진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로 오르는 언덕길에는 은행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고 곧 일주문(↓)이 나타나는데, 일주문에 걸린 편액이 태백산(太白山) 부석사란다. 당연히 소백산(小白山) 부석사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찌된 것일까. 그런가 하면 경내 범종루 편액에는 봉황산(鳳凰山) 부석사라 적혀 있다.

 

 

이 의문은 사찰 건립의 역사를 들으면서 풀리게 된다. 부석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서기 676년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창건한 사찰로, 삼국유사에 ‘의상이 태백산에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또 부석사가 있는 산의 이름이 봉황산인데, 소백산이든 봉황산이든 크게 보아 태백산의 갈래이므로 태백산 부석사라 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범종루와 안양루의 마루 밑으로 난 길을 거쳐 돌계단을 오르니, 아! 눈앞에 무량수전이 펼쳐진다. 비록 우리나라 최고(最古) 목조 건물의 자리는 내놓았지만, 배흘림기둥으로 인해 더욱 유명해진 바로 그 부석사 무량수전이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 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 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 때 짓고 고려 현종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때 불에 타 버렸다. 지금의 무량수전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지은 것이니 무려 633년 세월을 견뎌온 건물이다. 규모는 앞면 5칸과 옆면 3칸인데, 칸을 구분하는 기둥들이 모두 배흘림이어서 한층 단아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또 지붕은 옆면이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대개의 불전들이 불상을 정면으로 배치한 데 비해 무량수전은 왼쪽 옆면으로 모신 것이 특징이다.

 

 

사찰에서의 무량수전은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법당으로, 극락전 또는 아미타전이라고도 하며 대웅전 다음으로 많다고 한다. 무량수(無量壽)는 아미타여래가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다는 데서 유래한다. 또 배흘림기둥(↑)은 중간이 굵고 위와 아래로 가면서 점차 가늘어지는 형태의 기둥이다.

 

 

무량수전 왼쪽 뒤편에는 부석사라는 절 이름이 생기게 한 넓적한 바위가 있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공부할 때 그곳 선묘낭자가 대사를 연모했는데, 대사가 귀국하자 낭자도 용이 되어 따라왔으며, 대사가 이곳에 절을 지을 때 이교도들이 방해하자 그 용이 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올려 물리쳤으므로 부석(浮石↑)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위에는 한자로 새긴 부석이라는 글자가 또렷이 남아 있다.


안향 선생 모신 소수서원 일대 선비촌으로 단장

그러고 보니 영주는 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 더욱 친숙한 고장이다. 순흥면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외웠던 소수서원도 있는 것이다. 소수서원 인근에는 소수박물관과 선비촌이 있어 영주를 ‘선비의 고장’으로 부르게 한다.

고려 때의 유학자 안향 선생(1243~1306)을 배향한 소수서원은 풍기군수였던 주세붕 선생이 중종 37년(1542) 안향 선생 연고지에 사묘를 세워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 학사를 건립하여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데서 비롯되었다. 명종 5년(1550)에는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조정에 건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을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도 시초가 되었다.

안향 선생은 우리나라에 성리학(주자학)을 최초로 도입하였고 교육과 인재양성에도 힘쓴 인물이다. 그는 충렬왕 14년(1288) 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주자전서(朱子全書)와 공자·주자의 화상(畵像)을 가지고 돌아와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선생의 학풍은 이후 정몽주·김종직·김굉필·이황·기대승·이이 등으로 이어지며 유학의 근간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우리의 정신세계와 실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서원 안에는 안향 선생의 위패를 모신 문성공묘와 유생들이 모여 공부하던 강학당(↑), 기숙사인 학구재, 그 밖의 부속 시설들이 있고, 서원 밖에는 앞쪽에 탁청지라는 연못이 있으며 뒤쪽에 수백 그루의 노송이 숲(↓)을 이뤄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지금이라도 어디선가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올 것만 같다.

 

 

 

소수소원 앞으로 흐르는 죽계천을 건너면 소수박물관(↑)이 나온다. 소수박물관은 유교와 관련된 전통문화 유산을 체계화하고, 소수서원을 통해 민족정신의 뿌리를 찾아볼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다. 또 영주의 유물과 유적을 보존·전시함으로써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체험하는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영주시청이 발행하여 제공하는 관광지도 표지에는 ‘선비의 고장 영주’라는 문구가 있다. 영주는 어떻게 선비의 고장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을까. 그것은 우선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 선생이 이곳 사람인 데다, 주세붕과 이황 등 대학자들이 군수(당시는 풍기군수)로 거쳐갔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소수서원이 세워지면서 350여 년 동안 무려 4000여 명의 유생들이 이곳에서 학문과 인격을 닦고 선비정신을 실천하였으니 어찌 선비의 고장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영주시는 소수서원 및 소수박물관과 연계하여 선비정신을 고양하고 전통문화를 재조명하기 위해 서원 지척에 선비촌(↑)을 조성했다. 5만 7700㎡(1만 7500평)의 부지에 세워진 선비촌은 와가·초가·누각·원두막 등의 시설물에 저잣거리까지 갖춰 예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초입에 선비 동상(↓)이 서 있는 이곳에서는 각종 체험과 전시 등의 이벤트를 통해 옛 선비들의 생활상을 느껴볼 수 있다.

 

 

인삼은 약효 좋고, 사과는 달고, 죽령은 높다

단종의 숙부이자 수양대군(세조)의 동생으로서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순흥에 안치되었다가 사사당한 금성대군(1426~1457)의 신단(↓)이 소수서원 가까이에 있어 잠시 살펴보고, 내친김에 벽화가 그려진 읍내리 고분까지 들렀다가 죽령으로 향하는 길. 사과밭 대신 인삼밭이 많이 눈에 띈다 싶더니 인삼으로 유명한 풍기읍이다.

 

 

풍기인삼은 소백산록에서 흘러온 유기물이 풍부하게 쌓인 토양에서 재배돼 조직이 치밀하고 특유의 향이 강하며 유효사포닌 함량도 높다고 한다. 인삼의 고장에 왔으니 인삼시장(↓)을 둘러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시장은 현대식 건물로 깨끗하게 단장되었는데, 가게마다 충실한 수삼을 잔뜩 쌓아놓고 손님들과 흥정에 여념이 없다. 진열장에도 인삼 진액부터 젤리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가공품들이 그득하다. 비록 잠시나마 인삼 냄새를 원 없이 맡았으니 조금은 약이 되지 않을는지.

 

 

인삼과 함께 사과도 영주를 대표하는 농산물로 꼽힌다. 영주는 사과가 익을 무렵 낮과 밤의 온도 차가 매우 커 사과의 당도가 높고 색택도 뛰어나다고 한다. 해마다 인삼은 400여㏊에서 800여t, 사과는 3000여㏊에서 5만여t이 생산된다.

 

 

풍기읍에서 죽령을 향해 달리다 희방사 가는 길로 잠시 빠졌다. 희방사 아래에 영남 제일이라는 희방폭포(↑)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겨울 가뭄이 길었던 데다 해발 850m의 고지대라 물이 있을까 걱정하며 폭포에 다다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물줄기는 약하고 대신 거대한 얼음기둥이 서 있다. 하지만 물 떨어지는 높이가 28m나 된다니, 여름에 다시 찾는다면 시원하게 떨어지며 물보라를 일으키는 장관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이윽고 죽령(竹嶺). 소백산 도솔봉과 연화봉 사이 해발 689m의 고개이며 충북 단양군과 경계를 이루는 죽령은 예부터 문경새재·추풍령과 함께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158년에 죽령길이 열렸다니 인적을 허용한 세월이 무려 2000년에 가깝다. 지금이야 죽령을 자동차로 넘고 산 밑 터널로는 기차와 고속버스도 씽씽 달리지만, 그 옛날 선비며 장사치며 군사들은 이 고개를 넘기 위해 하릴없이 다리품을 팔아야 했을 터이다. 사람들이 걸어서 넘었던 죽령 옛길과 고갯마루에 복원된 주막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은, 그 힘든 고개를 자동차로 단숨에 올라와버렸다는 미안함 때문이었던가.

 

 

이번 여행에서 계획한 마지막 행선지는 문수면 수도리 전통마을. 아직 해가 짧은 시기인데 굳이 영주시내 가흥동에 있는 마애삼존불상(↑)을 보고 부랴부랴 수도리에 도착하니 사위는 벌써 어둠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굽어지며 삼면을 감돌아 흐르는 모습이 마치 섬 같기도 해 무섬마을로도 불리는 수도리(↓)는, 교통이 불편했기에 전통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다. 정자와 고택이 어우러지고 내성천 백사장이 아름다운 이 마을은 반남(潘南) 박씨와 선성(宣城) 김씨들이 향약을 만들어 생활하면서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와 외나무다리 축제 등을 열기도 한다.

 

 

섬 아닌 섬 수도리뒤로 하고 돌아서는데, 내성천 백사장 위로는 풀려가는 얼음 대신 점차 짙어가는 봄빛이 함께 흐르고 있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