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가는 길

부여, 백제의 역사는 애절하고 문화는 찬란하다

몽당연필62 2009. 2. 6. 13:19

부여, 백제의 역사는 애절하고 문화는 찬란하다

 

백마강과 낙화암 그리고 조룡대는 백제가 당나라 군대에 의해 최후를 맞았던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700년 왕조가 마지막을 맞던 날, 백제 여인네들은 망국의 한을 안고 낙화암에서 흐르는 강물에 꽃잎처럼 몸을 던졌다. 백제는 여인네들의 피로 백마강을 석양처럼 붉게 물들이며 저물어갔다.

 

백마강 일몰


어려서 즐겨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 가운데 ‘세월 따라 노래 따라’라는 것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그야말로 ‘흘러간 가요’들을 많이 들려주었는데, 여기서 자연스럽게 배운 노래가 ‘꿈꾸는 백마강’이다. 더 자라서는 ‘백마강’이라는 노래도 알게 되었다.

 

처연한 곡조의 노래들로 먼저 알게된 고장

처연하기 그지없는 곡조의 이 노래들에 나오는 백마강·낙화암·고란사 등의 이름과 학교에서 배운 백제 역사가 어우러지면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바로 이 노래들의 무대인 충청남도 부여.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서 이들 노랫말보다도 더 애절한 패망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고도이다.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를 달리다 탄천IC에서 빠져나와 한동안을 더 가면 부여읍을 눈앞에 두고 백제역사재현단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다리를 하나 건너고 ‘백제문’이라는 조형물을 통과하며 언덕을 넘으니 곧바로 백제역사재현단지가 나타난다.

 

 

규암면 합정리 일원 약 100만 평의 부지에 조성된 이 단지는 백제시대 왕궁과 거리, 생활상 등을 재현해 화려했던 백제의 문화를 재조명하고 계승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백제역사문화관(↑)은 출토된 유물보다는 백제시대의 주요 유적이나 역사적 사실을 모형으로 축소하거나 그래픽, 영상으로 표현하여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왕의 사비 천도 행렬, 시장 등의 모형(↓) 들을 둘러보노라니 그 모습이 너무나 정교하여 마치 백제시대에 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부여읍으로 가기 위해 길을 되돌아 나와 다시 다리를 건너는데 다리 이름이 백마강교다. 그렇다면 다리 아래로 흐르고 있는 강이 바로 백마강 아닌가. 백마강은 길이 395㎞에 이르는 금강을 부여에서만 달리 부르는 이름인데, 지류가 아닌 본류로서 특정 지역에서만 이렇게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강이 우리나라에 또 있을까. 백마강은 그만큼 부여의 역사에서 너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할 것이다.

부소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부여읍 시가지는 군청 소재지로 보나 이름이 알려진 정도로 보나 예상했던 것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다. 그러나 현재의 규모가 작다고 해서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마저 작은 것은 아니다. 부여읍은 서기 538년 26대 임금 성왕이 천도하여 660년 31대 임금 의자왕 때 멸망하기까지 6왕 123년에 걸쳐 백제의 수도였으며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곳이다.

부여에 왔으니 낙화암부터 찾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터. 부소산으로 오르는 길과 백마강으로 유람선을 타고 가는 길을 가늠하다가 유람선을 타기로 결정하고 구드래 선착장으로 향했다. ‘구드래’는 ‘큰 나라’라는 뜻으로 백제를 의미하는 말이라는데, 이곳에서 낙화암까지 유람선이 수시로 다니고 있었다.

구드래 선착장에서 낙화암 선착장까지 물길은 채 10분이나 걸릴까한 가까운 거리. 말이 유람선이지 일엽편주나 다름없는 조그마한 통통배에 올라 백마강 푸른 물결을 헤치노라니 마치 백제의 마지막 날이라도 보러 온 양 마음 깊은 곳에서 묘한 비장감마저 솟는다.

 

 

무심히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며 잠시 깊은 감회에 젖었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강기슭에서 갑자기 솟아 꼭대기에 정자 하나를 이고 있는 암벽과 그 옆으로 절 하나가 보인다. 이 암벽에는 붉은 한자가 씌어져 있으니, 바로 낙화암(落花巖↑)이다! 그렇다면 절은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고란사 아니겠는가.

낙화암 선착장에 내리자 어디선가 ‘꿈꾸는 백마강’의 구성진 가락이 들려온다. 곳곳에 스피커를 설치해 찾아오는 이들에게 노래를 들려주는 모양이다. 선착장 바로 옆 강변에 조룡대라는 바위가 있고, 고란사를 거쳐 낙화암까지는 숨이 채 거칠어지기도 전에 끝나는 짧은 산길이다. 백마강과 조룡대 그리고 낙화암이 있는 이곳이야말로 백제가 당나라 군대에 의해 최후를 맞았던 아픈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망국의 한 어린 백마강과 낙화암

조룡대(←)는 강물이 불면 섬이 되고 줄면 뭍과 연결되는 조그마한 수중 바위이다. 이곳에는 백제를 공격했던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관련된 설화가 깃들어 있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무너지고 의자왕마저 당나라로 끌려간 뒤 고요하던 백마강이 돌연 이변을 일으켜 당나라의 군선과 군졸들을 삼키기를 한 달이나 계속했다. 이에 소정방이 연유를 알아본즉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의 혼이 용으로 환생하여 부리는 조화라는 것이었다. 소정방은 낚시에 용이 좋아한다는 흰 말의 고기를 미끼로 끼워 마침내 용을 낚았고 백마강도 잠잠해졌다. 이때부터 소정방이 용을 잡기 위해 올라탔던 수중 바위를 조룡대(釣龍臺)라 하였고 용이 낚인 부근의 강 이름도 백마강(白馬江)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선착장에서 낙화암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고란사(↑)는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백제 여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 때 지은 절이라고 한다. 절 이름은 뒤쪽 바위에서 자라는 고란초에서 유래하였다. 고란사는 법당·요사채·범종각의 건물로 이뤄져 매우 단출한데, 절 뒤편 바위틈에서는 할아버지가 한 잔 마시면 3년 젊어질 것을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갓난아기로 변하고 말았다는 전설의 고란약수가 솟아오르고 있다.

고란약수 서너 모금을 마시고 십여 년은 젊어졌을 것이라는 흐뭇한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해 등성이를 오르니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육각 정자가 있고 그 너머로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침내 낙화암에 오른 것이다.

 

 

낙화암(↑)은 백마강 기슭에 거의 수직으로 솟아난 약 40m 높이의 암벽인데, 발 아래를 내려다보니 현기증이 날 듯 아찔하기만 하다. 백제의 700년 왕조가 마지막을 맞던 날 이곳에서 무수한 여인네들이 망국을 슬퍼하며 흐르는 강물에 꽃잎처럼 몸을 던짐으로써 절의를 지켰으리라. 암벽에 새겨진 낙화암이라는 글씨는 조선 때 우암 송시열이 쓴 것으로 전하며, 백화정은 이 여인네들의 원혼을 달래고 추모하기 위해 1929년 건립했다고 한다.

낙화암에 머무는 동안 마침 대여섯 명의 군인들이 이곳을 찾았다. 그 군인들을 보는데 갑자기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한 나라가 종언을 고했던 비극의 현장에서 국토와 겨레의 안위를 책임진 군인들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다소 무거워진 마음으로 낙화암을 떠나,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세워져 백마강을 비롯한 부여군 일원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누각 사자루까지 둘러보고 다시 유람선을 이용해 구드래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유람선에서는 한 무리의 일본인 관광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일본은 백제로부터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았기에 일본인들이 자기들의 문화 원류를 보기 위해 줄을 이어 부여를 찾는다고 한다.

 

찬란하게 꽃피었던 백제 문화의 보고

부여가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서 망국의 한을 지닌 곳이라고는 하나, 남아있는 모든 것들이 마음에 슬프게 와닿는 것은 결코 아니다. 100년이 넘게 한 나라의 수도였던 데다 백제 문화의 완성된 모습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부여읍 동남리에는 정림사지와 정림사지박물관, 국립 부여박물관, 궁남지 등이 몰려있어 백제 문화의 진수를 누릴 수 있다.

 

 

정림사가 있었던 터 정림사지(↑)에는 6세기 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8.33m의 5층 석탑과 고려 때 만들어진 석불좌상이 남아있는데, 석탑의 정돈된 형태나 장중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이 백제시대 석탑의 특징과 백제인의 솜씨를 잘 보여준다. 탑의 몸체돌에는 백제를 공격한 소정방의 공적이 새겨져 있어 당시 상황을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림사지 옆으로 자리한 정림사지박물관은 백제가 부여를 도읍으로 삼았던 시기의 불교와 그 중심에 있었던 정림사를 주제로 백제의 불교문화를 재조명하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고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곳에서는 불교가 백제에 전래된 과정을 비롯해 백제의 건축 양식과 기술 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국립 부여박물관은 부여지역뿐만 아니라 부드럽고 온화한 백제문화 전반을 이해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선사실, 백제실, 불교미술실 등의 전시실이 갖춰져 있으며 특히 박물관 앞 로터리 한쪽에 대형 백제금동대향로 조형물(↑)을 설치해 눈길을 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높이 61.8㎝, 몸통지름 19㎝의 청동 주조물인데 백제의 정신과 예술적 역량이 응집된 최대의 걸작품이자 세계적인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계백공원, 서동공원, 선화공원 등 부여읍 곳곳의 공원들도 그 이름만으로 부여가 백제문화와는 떨어져 설명될 수 없는 곳임을 말해준다. 하루 일정의 마지막 행선지로 계획했던 궁남지로 가는 길에 먼저 인근의 서동공원을 찾으니, 계백장군의 오천결사대 충혼탑과 결사대 출정상(↑)이 석양빛을 받아서인지 장엄하면서도 비장한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는다. 그렇다. 계백은 풍전등화와 백척간두의 국운 앞에 사랑하는 가족을 베고 결사대 오천 명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선 인물이니 그 출정상인들 비장함을 풍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궁남지(↑)는 궁의 남쪽에 있는 연못이라는 의미로, 무왕 35년(서기 634년)에 조성한 왕궁의 정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못 가운데 섬을 만들어 ‘선인이 사는 곳’이라 하고 못 주위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백제의 정원 꾸미는 기술이 대단히 발달했음을 알 수 있는 유적이다. 궁남지는 지금도 버드나무로 빙 둘려있고 그 주변의 드넓은 습지에는 연꽃이 심어져 여름이면 그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궁남지를 만든 무왕은 어렸을 때 이름이 ‘서동’으로,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와의 국경을 넘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 이 연못을 사이에 두고 서동공원과 선화공원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은, 물론 후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그렇게 조성하고 이름 붙인 것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그만큼 아름답고 위대했다는 것 아닐까.

계획했던 곳들을 모두 둘러보고 나니 아직 두어 뼘 정도 해가 남아 있다. 서둘러 백제대교를 건너 낙화암 건너편 백마강 기슭으로 달렸더니, 마침 붉디붉은 해가 산 위에서도 강물 속에서도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349년 전 바로 이곳에서 백제는 저 해처럼 백마강을 여인네들의 피로 붉게 물들이며 저물어 갔으리라.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