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가는 길

해남, 땅끝이면서 땅의 시작

몽당연필62 2008. 12. 24. 02:31

해남, 땅끝이면서 땅의 시작


한반도의 땅줄기가 곳곳에 고산과 준령을 만들며 남으로 남으로 달리다, 해남벌에 이르러 잠시 숨을 고른 뒤 마지막 힘을 써 빚어올린 사자봉. 서울에서 461㎞ 떨어진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갈두마을 산 43-6, 높이 122m의 이 아담한 봉우리에 올라서면 다도해가 그림처럼 펼쳐지면서 더 이상 이어지는 땅이 없음을 알게 된다. 바로 땅끝이다.

 


밤이 늦기도 했거니와 장거리 운전의 피로 때문에 땅끝마을인 갈두에 도착하여 숙소를 잡자마자 잠에 취했는데, 어느 결 한기에 눈을 뜨니 마침 동녘이 열리고 있는 참이다. 날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던 터라 애당초 기대를 하지 않았건만, 어찌 된 조화인지 하늘에선 구름 대신 새벽달이 빛나고 있다.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사자봉 정상의 땅끝전망대로 달렸다. 땅끝에서 일출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예정에 없던 일이기에 몸보다 마음이 몇 배나 빨리 전망대로 줄달음친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찾은 땅의 끝자락

전망대에 도착해 거칠어졌던 숨결이 잦아들기 시작할 무렵, 바다 저편 섬 너머에서 태양이 온 세상을 붉은빛으로 물들이며 솟기 시작한다. 바다에서 떠오르는 것이 아니고 그나마 구름을 뚫고 나오는 것이지만, 땅끝에서 맞는 일출은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으로 다가온다. 지금까지 아파트 발코니에서 보았거나 동네에 있는 산에 올라서 보았거나 일출은 매한가지였을 터. 그런데 묘하게도 한 해의 끝자락 무렵 땅끝에서 일출을 맞는 동안 신산한 삶의 무게가 햇빛에 어둠 스러지듯 감쪽같이 사라져버리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해남에서의 일정은 이렇게 땅끝전망대에 올라 일출을 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해남읍에서 자동차로 채 한 시간이 안 걸리는 거리에 있는 땅끝 사자봉은 바닷가에 솟구쳐서 기암괴석이 많고 숲도 울창하다. 그 정상에는 남해바다에 드리워진 섬들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와 봉화대가 있고, 여기서 바다쪽으로 난 계단길을 따라 450m쯤 내려가면 마침내 땅끝탑을 만나게 된다. 땅끝탑을 머리에 인 절벽은 남해와 서해를 휘도는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이곳이 바로 배를 타거나 바다를 건너지 않고 갈 수 있는 우리나라 육지의 남쪽 끝자락인 것이다.

 

 

1987년 높이 10m, 바닥 면적 3.6㎡의 삼각형으로 세워진 땅끝탑(↑) 하단부에는 손광은 시인의 시가 새겨져 길손의 눈길을 붙잡는다. 손 시인은 “이곳은/우리나라 맨끝의 땅/갈두리 사자봉 땅끝에 서서/길손이여/토말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게/(중략)/수천년 지켜온 땅끝에 서서/수만년 지켜갈 땅끝에 서서/꽃밭에 바람 일듯 손을 흔들게(후략)” 하며 땅끝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이 어찌 ‘땅끝’이기만 할 것인가. 오히려 바다가 끝나고 대한반도가 시작되는 육지의 첫머리인 것이다. 과거 대륙 문화가 남방을 통해 유입될 때, 제주도에서 군마를 실어올 때, 가장 먼저 만났던 이곳이야말로 육지가 시작되는 희망의 땅이었을 터이다.

 

 

땅끝탑에서 500여 m 떨어진 사자봉 북동쪽 해안에는 ‘땅끝마을’이라 불리는 갈두마을(↑)이 있다. 이곳은 반농반어의 전형적인 해안 마을인데, 땅끝 일대가 관광지로 개발되고 보길도 등 다도해를 찾는 관광객이 늘면서 숙박시설도 많이 들어서고 제법 활기가 넘친다.


미황사와 대흥사, 달마산과 두륜산

사자봉과 땅끝탑, 갈두마을 등을 둘러보고 해남읍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 송지면 서정리를 지날 무렵 오른쪽으로 바위산 하나가 마치 병풍처럼 펼쳐진다. 울퉁불퉁한 암봉과 절벽으로 형성된 능선은 마치 공룡의 등줄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름마저 세속과는 거리를 느끼게 하는 달마산이다.

높이 489m인 달마산은 산행 거리가 약 6㎞이고 3시간이면 주파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이다. 하지만 수려한 바위 능선과 억새풀, 상록수가 어우러지고 다도해를 조망하는 재미가 있어 등산로가 까다로운 데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그리고 등산로가 시작되는 중턱에는 미황사라는 사찰을 품고 있다.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의조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니 무려 12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미황사 경내에 발을 들이니 곳곳에 ‘묵언수행 중’이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말소리를 내기는커녕 발걸음 옮기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스님들의 묵언수행이 아니더라도 대웅전 지붕 너머로 바라보이는 달마산의 위엄에 먼저 압도되었기 때문이리라. 이렇듯 바위들로 이뤄진 달마산과 우리나라 육지 최남단의 천년 고찰 미황사가 빚어낸 절경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나그네를 떠나보낼 줄 모른다.

한편 해남의 산과 절 가운데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기로는 삼산면의 두륜산과 대흥사가 먼저 꼽힌다. 도립공원인 두륜산은 높이가 703m로, 정상에 서면 멀리 완도와 진도를 비롯하여 다도해의 작은 섬들이 바라다 보인다. 소백산맥의 최남단인 해남반도에 우뚝 솟아 있어 난대성 상록 활엽수가 곳곳에 군락을 이루며, 특히 수백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동백나무 숲과 이른 봄 붉게 타오르는 동백꽃이 유명하다. 두륜봉 길목에 커다란 바윗덩이가 자연적으로 놓여 만들어진 구름다리, 가을이면 두륜봉과 가련봉 사이에 펼쳐지는 억새밭도 두륜산의 명물로 꼽힌다.

임진왜란 이후 사명대사 등이 스승인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을 봉안하면서 조선 불교의 중심이자 호국 불교의 도량으로 자리잡아 13 대종사와 13 대강사를 배출한 대흥사는 창건 연대가 정확하지 않다. 서기 426년 혹은 508년 백제 때, 544년 신라 때 세워졌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지만 최소한 통일신라 말기 이전에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하지만 국보 제308호인 북미륵암의 마애여래좌상을 비롯해 서산대사 부도와 유물, 천불전과 천불상 등 경내와 암자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은 대흥사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말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녹우당에서 윤선도와 윤두서를 만나다

해남의 대표 성씨로는 해남 윤(尹)씨가 첫손에 꼽히고, 이 가문의 인물로는 ‘오우가’, ‘어부사시사’ 등을 지은 고산 윤선도와 자화상을 그린 화가 공재 윤두서가 있다. 윤선도는 윤두서의 증조부이고, 윤두서는 이웃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목민심서’를 쓴 정약용의 외증조부가 된다. 해남 윤씨 가문은 조선 중후기 문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들을 다수 배출한 명문가인 것이다.

 

 

해남읍 연동리에 있는 윤선도의 고택이자 유적지인 녹우당(↑)을 찾으니, 한눈에 기품 있는 양반가의 종택임을 알아보겠다. 담 밖에서 수백 년 된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집을 지키는 데다 안채 뒤쪽으로는 큰 대밭이 이어진다. 대나무들이 바람결에 이파리를 흔들어 내는 ‘쏴아’ 하는 소리가 마치 물소리처럼 느껴지는데, 어디선가 윤선도가 나와 오우가라도 읊조릴 것만 같다. 그 또한 이곳에서 시문을 익히며 대나무의 기상을 배웠으리라.

 

 

녹우당 곁에는 고산유물관(↑)이 있다. 유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수많은 서책과 임금이 내린 교서, 문서,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 전시된 유물들이 모두 윤선도의 것만은 아니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묘사로 동양인의 자화상 가운데 최고로 꼽힌다는 윤두서의 자화상을 비롯해 그의 아들 낙서, 손자 청고의 3대에 걸친 그림들도 함께 선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윤두서는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는데, 시·서·화에 두루 능한 선비로서 유학과 경제·지리·의학·음악 등에도 뛰어난 천재였다고 한다. 그의 생가는 현산면 백포리에 남아있지만 사람이 살지 않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어느덧 서쪽으로 제법 기운 해를 가늠하며 고산유물관을 나와 윤선도 유적지를 등지는데, 버스에서 내린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녹우당을 찾고 있다. 일행들이 경상도 말투를 쓰는 것으로 미루어 그들도 윤선도를 만나기 위해 먼 데서 여기까지 왔나보다.


해남 물감자, 월동배추, 한눈에 반한 쌀

영암이나 강진 등 해남 인근에서 해남 사람을 놀릴 때 ‘해남 물감자’니 ‘해남 풋나락’이니 하는 표현이 있다. 감자는 전라도에서 고구마를 달리 이르는 말이고, 풋나락은 말 그대로 아직 이삭이 여물지 않은 풋벼다. 그런데 왜 하필 물감자고 풋나락일까.

해남은 들이 너른 고장이어서 예부터 이런 농산물이 많이 생산됐다. 특히 고구마는 지금은 삶았을 때 속살이 파근파근한 밤고구마 품종을 많이 심는데, 전에는 물렁물렁해서 쪽 짜면 마치 홍시처럼 쪼르륵 흘러 점심 대용으로 먹기에 그만인 품종이 많았다. 결국 물감자나 풋나락은 ‘무르다’, ‘덜 익었다’는 놀림말로 통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해남 사람들의 인심이 드세지 않고 순박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황산면 우항리에 있는 공룡 화석산지를 보러 가는 길에 밭에서 고구마를 캐고 있는 여남은 명의 아주머니들을 만났다. 캐놓은 고구마를 보니 껍질이 붉은 것이 필시 ‘물감자’는 아니다. 그런데 아주머니들의 고구마 홍보가 장난이 아니다. 카메라를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고구마가 잘 보이도록 연출을 하고 포즈까지 취하며, “우리 해남 고구마 참말로 맛있어라우. 그랑께 홍보 잘 해주쑈잉” 하는 당부까지 곁들인다. 촬영이 끝나고 밭둑에 앉아 삶은 고구마를 함께 먹으면서 결코 물감자가 아닌, 해남 사람들의 야물면서도 순박한 인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 해남 풋나락도 더 이상 풋나락이 아니다. 최근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가 시중에 유통되는 브랜드 쌀 가운데 소비자들의 까다로운 입맛을 충족시킨 12개의 우수 브랜드 쌀을 선정해 발표했는데, 이곳 해남 옥천농협이 생산하는 ‘한눈에 반한 쌀’이 당당히 최우수상을 받았던 것이다.

 

 

해남에서는 또 겨울철에도 비닐하우스가 아닌 너른 들에서 파란 농작물을 눈이 시리도록 볼 수 있다. 기온이 따뜻한 까닭에 배추가 얼지 않아 월동배추를 많이 재배하기 때문이다. 해남 월동배추는 절임배추로 가공되어 전국 주부들의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다.


울돌목,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땅끝에서 예정에 없었던 일출을 본 것처럼, 별 기대를 안 했는데 뜻밖에도 큰 소득을 얻는 경우가 있다. 우수영 울돌목으로 가는 길에 ‘웬 공룡 발자국?’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들렀던 우항리 공룡·익룡·새발자국 화석산지가 그랬다. 해가 지기 전에 우수영에 도착해야 했으므로 마음이 급했는데 이곳에서 생각보다 오래 머물게 될 줄이야.

 

 

우항리 화석산지는 수천만 년 전에 시루떡처럼 차곡차곡 쌓여 생성된 지층과 공룡, 익룡, 새의 발자국들이 보존된 곳이다. 종잇장처럼 켜켜이 쌓인 지층이 수백 m나 띠를 이루며 이곳에 얼마나 잦은 지각활동이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그 지각활동 때 묻혔을 공룡들은 바위에 남은 50~90㎝ 크기의 발자국(↑)으로만 자신들이 한때 지구를 지배한 생명체였음을 증명해준다.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우는 해를 보며 서둘렀건만 울돌목에 도착하니 해가 이미 진도대교 난간에 걸려 있다. 울돌목은 바로 이순신 장군이 거센 물살을 이용해 12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왜선을 물리친 명량대첩이 벌어졌던 곳. 아닌 게 아니라 진도대교 아래에 놓인 명량해협(↓)이 거센 물살을 흘려보내며 아우성을 친다. 해협의 바닷물이 서로 부딪쳐 우는 소리에 붙여진 이름이 울돌목이라지만 물살의 빠르기와 거칠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할 수조차 없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전투에 임할 때 장졸들에게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며 독려했다고 한다. 그는 또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면서 왜군의 북진을 차단하고 식량 창고인 호남을 지켜냈다.

이순신 장군의 전승지를 가꿔 조성한 명량대첩공원에 어둠이 내리면서 울돌목의 급류가 더욱 빨라지고 물소리도 더 커져만 가는데, 그 물소리에 섞여 어디선가 강강술래 가락이 들려온다. 강강술래 발원지도 이곳이라 했던가.

하루해가 기울고, 한 해도 함께 저물었다. 머리 속에 자꾸만 ‘끝’자가 맴도니 뭐든 마무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공연히 조급해지는 시기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끝이라는 것이 실은 시작과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는, 마치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열두 달이 끝나고 다시 새로운 열두 달이 시작된다는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가르침을 땅끝의 고장 해남에서 새기며 하루를, 한해를 접는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