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가는 길

단양, 신선이 다스리는 살기 좋은 고장

몽당연필62 2008. 12. 9. 14:39

단양, 신선이 다스리는 살기 좋은 고장


단양의 지명은 ‘연단조양(鍊丹調陽)’이라는 말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연단’은 신선이 먹는 환약이고 ‘조양’은 빛이 골고루 따뜻하게 비친다는 의미이니, 곧 단양은 신선이 다스리는 살기 좋은 고장으로 풀이된다. 단양이 이처럼 인간계와 선계가 융화한 지명이라면 필시 그곳의 풍광도 하나하나가 선경이요 비경일 터.

 

우리나라의 여러 지역이 관내 명승들을 묶어 팔경이니 구경이니 하는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다. 강릉과 논산은 팔경이요, 이천과 산청은 구경이다. 그런데 팔경을 오롯이 두고도 부족하여 제2 팔경까지 둔 곳이 있으니, 바로 충청북도 단양군이다.

산과 물이 조화를 이뤄 빚어낸 단양의 아름다움은 예전에도 몇 번 지나치면서 주마간산이나마 살펴본 바가 있어 그 빼어난 풍치를 짐작해오던 터였다. 다만 ‘단양팔경’이라는 말을 제법 여러 차례 들었음에도 그중 하나도 찾아보지를 못해 늘 아쉬웠기에, 이번에야말로 여덟 군데 모두 온전히 둘러보리라는 다짐에 날을 세웠다.


바위는 흐르는 물에 몸을 깎고

마침 전에 구해 둔 관광안내도를 통해 단양팔경의 위치를 대략 알 수 있었기에, 중앙고속도로에서 단양에 접어들자마자 망설임 없이 대강면 사인암리의 사인암부터 찾았다. 조그마한 마을 앞 하천을 따라 난 샛길로 잠시 들어가자 사진에서 보아 익숙한 풍경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사인암이다.

 

 

시리도록 물이 맑은 운계천을 허리에 걸친 사인암은 높이 70여 미터, 길이 100여 미터쯤 되는 바위벽. 시루떡처럼 바위가 켜켜이 쌓여 벽을 이루고, 가장 높은 부분에 커다란 바윗덩어리 한 개가 화룡점정처럼 놓여 위용을 더한다.

이 바위벽은 단양 사람으로 고려 말엽의 학자인 우탁 선생이 사인(舍人) 벼슬에 있을 때 자주 찾던 곳이다. 사인암이라는 이름은 이 사실에서 비롯한 것으로,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인 임재광이 지었다고 한다. 사인암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단원 김홍도는 사인암을 그려오라는 어명을 받고 진경에 취했다가 일 년 만에야 겨우 그려냈다고 전한다.

사인암이 굽어보고 있는 운계천 바닥, 물이 닿지 않은 여기저기에 돌과 자갈로 쌓아올린 작은 탑들이 수십 기 서 있다. 저마다 정성으로 쌓고 간절한 기원도 담았으련만, 사람이 쌓은 돌탑은 자연이 빚은 걸작 앞에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만 느껴진다.

단양의 지명이 신선이 다스리는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데서 유래했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곳에는 신선이 노닐었던 흔적(?)이 곳곳에 널려 있다. 단양팔경 가운데는 신선 선(仙)자가 들어가는 것이 3개나 있는데, 단성면 선암계곡 상류로부터 차례로 놓인 상선암·중선암·하선암이 그것이다.

상선암(↓)은 원래 크고 널찍했던 바위가 오랜 세월 물길에 패이고 매끈하게 닳은 것으로 올망졸망한 바위들을 거느린 채 그 틈새로 청류를 흘려보내고 있는데, 물이 어찌나 맑던지 소(沼)를 이룬 부분은 두어 길은 넘을 바닥이 무릎도 안 잠길 것처럼 얕아 보인다.

 

 

중선암(↑)은 상선암으로부터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아래쪽에 있다. 다른 곳의 바위들이 검붉은 색을 띤 반면 이곳은 흰색에 가까우며 고만고만한 여러 개의 바위들이 계곡에 흩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가운데 유독 큰 바위를 옥염대라 부르는데, 여기에는 ‘사군강산 삼선수석(四郡江山 三仙水石)’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글귀는 조선 숙종 때 충청도 관찰사였던 윤헌주 선생이 남긴 것으로, 사군이란 당시의 단양·영춘·제천·청풍을 일컫는다고 한다. 중선암을 비롯한 인근 바위들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저마다 이름을 남겨, 바위에 각자된 것만도 300개가 넘는다. 이들은 신선 바위에 이름을 남김으로써 자신도 신선과 같은 경지에 들어설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인지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 없다.

 

 

하선암은 남한강 본류와 가까운 단성면 대잠리에 있다. 3층으로 된 널따란 반석 위에 크기나 생김새가 마치 설악산 흔들바위와 비슷한 바윗덩이가 동그마니 얹혀 있는데, 받침대처럼 괴고 있는 돌을 빼고 밀면 쉽게 굴러내릴 것만 같다. 이 바위는 원래 부처바위(佛岩)라 불리다가 임재광이 선암으로 고쳐 불렀고, 후에 퇴계 이황 선생이 하선암이라 했다고 한다. 임재광은 사인암도 작명했던 사람이니, 좋은 곳 두루 찾아다니며 이름 붙이기를 즐겼던 모양이다.

단양팔경의 절반을 차지하는 사인암과 상선암·중선암·하선암은 모두 오랜 세월 흐르는 물에 자신의 몸을 맡겨 점점 동글게 깎이고 있다. 세속의 인간들이 찾아와 물놀이를 하는 동안에도, 이 바위들은 언젠가 자신을 다시 찾아와 노닐 신선을 기다리느라 청류에 몸을 씻어 모난 데를 갈아내며 도를 닦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암벽은 충주호반에 몸을 담그며

단양을 이야기할 때 남한강 혹은 충주호를 빼놓을 수 없다. 남한강은 단양에서 유난히 크게 굽이지며 흐르는데, 1980년대에 아래쪽인 충주에 댐이 건설되고 거대한 담수호가 형성되면서 단양 땅도 상당부분 물에 잠기고 말았다.

 

 

충주호는 많은 단양 사람들에게 수몰에 따른 이주 등 아픔을 주었지만, 홍수의 시름에서 해방되고 나룻배 대신 유람선이 다니는 등 새로운 관광자원 개발에 따른 도약의 발판이 되기도 하였다. 단양팔경의 절반인 나머지 넷은 이 충주호반에 몸을 담그고 있으며, 유람선을 타고 둘러보는 중요한 관광 코스가 되었다.

깎아지른 듯한 장엄한 기암절벽이 거북을 닮았고 물 속 바위에도 거북 무늬가 있다는 구담봉(↓)을 보기 위해 단성면 장회리의 장회나루로 달렸다. 겨울 막바지라 충주호의 물이 많이 줄어 장회나루 인근에 개흙이 넓게 드러나 있다. 하지만 눈앞에 드리워진 충주호와 옅은 안개 속에 모습을 드러낸 건너편의 바위산 구담봉은 굳이 유람선을 타지 않아도 이곳이 충주호 유람선 관광의 거점임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구담봉 인근의 옥순봉(↑)은 유람선을 타고 가서 보는 것이 제격이나, 남한강(충주호)에 걸쳐진 옥순대교를 건너 제천시 수산면 상천리에서 바라보는 것도 운치가 있다. 희고 푸른 바위들이 대나무 순 모양으로 우뚝 솟아 옥순봉이라 불리는데, 퇴계 이황 선생이 석벽에 단양의 관문이라는 뜻으로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는 글귀를 새겨 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옥순봉을 단양과 제천 두 지역이 서로 자기네 관광지라고 홍보하고 있다. 단양은 단양팔경에 제천은 제천십경에 각각 옥순봉을 포함하고 있으며, 문화관광 담당 공무원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마다 당연히 자기 고장의 명소로 알고 있는 것이다. 옥순봉이 행정구역으로는 제천시 수산면에 들지만, 단양과 제천의 경계에 있기도 하거니와 절개 있는 선비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모습이 더없이 수려한 때문이기도 하다.

단양팔경에 순위를 매기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겠지만,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단양읍 도담리의 도담삼봉이 첫 손가락에 꼽힌다. 맑고 푸른 물이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 한가운데에 세 개의 바위 봉우리가 솟았는데 가운데 가장 큰 봉우리가 남편봉, 좀 작은 북쪽 봉우리가 처봉, 남쪽 봉우리가 첩봉으로 불린다고 한다. 처봉은 첩을 들인 남편이 미워 돌아앉았고, 첩봉은 아기를 밴 모습으로 남편봉을 바라보고 있다.

 

 

조선 개국공신인 정도전 선생이 이곳을 자주 찾아 ‘삼봉’을 자신의 호로 삼았을 만큼 예부터 많은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았던 도담삼봉은 평상시에는 3개 봉우리가 제대로 보인다. 그러나 충주호에 물이 그득 차면 남편봉에 세워진 누각 삼도정 아래까지 물결이 넘실거리고, 처봉과 첩봉도 어깨참까지 잠긴다.

 

 

한편 도담삼봉에서 불과 300여 미터 떨어진 야산 중턱에는 수십 척 높이의 커다란 바위가 무지개처럼 서서 문 모양을 이루고 있으니, 바로 석문(↑)이다. 석문을 통해 내려다본 남한강은 뛰어내려도 좋을 듯 가깝게만 느껴진다. 아마 진실로 신선이 존재한다면 이 석문을 통해 남한강을 오르내리지 않을까.

단양팔경이 이처럼 하나같이 물과 함께 하니, 단양의 아름다움은 남한강과 그 지류들이 빚어 선물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자연의 시간에는 자투리임을 말해주누나

단양에서는 이처럼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를 더듬어보고 자연이 이뤄놓은 신비를 느낄 수 있는 곳도 많다.

단양은 삼국시대 때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쟁패하던 접경이었다. 영춘면 하리의 온달산성이나 단성면 하방리의 단양적성은 이 지역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려주는 유적이다. 특히 신라의 축성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단양적성 정상 부근에는 진흥왕 12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적성비가 남아 있는데, 이는 국내에 남아 있는 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단양읍 고수리의 고수동굴, 노동리의 노동동굴, 천동리의 천동동굴 등은 수억 년에 걸쳐 생성된 석회암 자연 동굴. 고수동굴(↓)에 들어가니 천장과 벽면에 매달린 무수한 종유석과 바닥에 돋은 석순, 동굴 안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다시 여러 갈래로 나뉜 작은 동굴들이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채 나그네의 발길을 허락한다.

 

 

석회암이 녹고 녹아 동굴을 이루고 몇 미터나 되는 종유석과 석순을 키우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던 것일까. 온달이 활을 쏘고 진흥왕이 칼을 휘두르며 웅지를 품었던 게 불과 140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들의 생애 또한 몇 십 년에 지나지 않았으니, 단양은 이처럼 인간의 삶과 역사가 자연의 시간 앞에서는 한낱 티끌과도 같음을 가르쳐주는 고장이기도 하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