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가는 길

남해, 충무공의 마지막 숨결 어린 보물섬

몽당연필62 2008. 12. 3. 09:20

남해, 충무공의 마지막 숨결 어린 보물섬


지금으로부터 410년 전인 1598년 11월 19일(음력), 남해와 하동 사이의 좁은 바다 노량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철수하려는 왜 수군이 일전을 벌이고 있었다.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까지 무려 7년에 걸친 전쟁의 최후 결전인 이 노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크게 승리했지만, 이순신 장군은 관음포 해역에서 끝내 적의 총탄을 피하지 못하고 전사했다. 남해는 바람 앞의 등불이었던 나라를 목숨 바쳐 구했던 충무공의 마지막 숨결이 어린 고장인 것이다.

 


새벽 일찍 길을 나섰는데도 워낙 먼 곳이다 보니 남해 관문인 남해대교(↑)를 건넜을 때는 벌써 해가 중천이다. 1973년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현수교로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를 연결하는 길이 660m의 남해대교를 건너 남해군으로 접어들었다. 남해바다의 경남 서쪽 끝에 자리한 남해(南海)군은 3개의 유인도와 73개의 무인도로 이뤄진 섬 지역. 하지만 남해대교 외에 창선·삼천포대교를 통해 사천시와도 이어졌으니 교통의 불편함은 없다. 면적이 357㎢인 남해에는 1읍 9면의 행정구역이 있고, 인구가 5만 명 남짓이다.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던 그 바다

남해 땅에 이르자 맨 먼저 설천면 노량리의 충렬사(↓)를 찾았다. 충렬사는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으로, 충무공이 순국한 지 34년이 되는 1632년에 지역 선비들에 의해 세워졌다. 경건한 마음으로 사당 경내를 둘러보는데 사당 바로 뒤편에 있는 한 기의 묘가 눈길을 끈다. 노량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이 관음포 앞바다에서 전사하자 시신을 이곳으로 모셔 안치하였다가 나중에 충남 아산으로 운구하였는데 그 때의 가묘라고 한다.  

충렬사에서 바라보면 노량해협의 거친 물살이 마치 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가깝다. 410년 전 바로 이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은 강토를 유린하고 물러나려던 왜적들의 퇴로를 막고 최후의 일전을 벌였으리라. 200여 척의 전선으로 구성된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수군이 두 배가 넘는 500여 척의 전선에 나눠 탄 왜군들을 깨뜨리고 무찌르던 그날의 의기와 함성을 머리에 그리며 노량을 바라보노라니 찬 바람이 아니더라도 옷깃이 저절로 여며진다.  

이어 찾은 곳은 고현면 차면리에 있는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 장군의 마지막 말씀 ‘戰方急愼勿言我死(지금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를 길쭉한 바윗돌에 새겨 세워놓은 이곳은 1598년 음력 11월 19일(올해 양력으로는 12월 16일) 노량해전 말미 관음포 해역 싸움에서 왜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영구를 맨 처음 내렸던 육지이다. 유허에는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大星隕海)’라는 뜻의 액자가 걸린 이락사(↑)가 고즈넉하게 서 있고, 그 옆으로는 거북선 형상의 현대식 건물 이순신 영상관이 막바지 공사 중이다.  

이락사에서 바다쪽으로 이어진 동산을 5분쯤 오르니 이순신 장군이 최후를 맞았던 관음포 앞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첨망대있다. 첨망대에서 바라본 바다(↑)는 거울처럼 잔잔하고, 크고 작은 배들과 함께 멀리 광양과 여수의 산업시설들도 눈에 들어온다. 이 그림 같은 아름다움과 평온에는 이순신 장군의 넋이 깃들어 있으리라.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섬… 바닷가 다랑논도 예술작품

남해는 섬이기 때문에 자연환경은 물론 주민들의 생활도 바다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바다는 남해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자연을 선물해주었고, 사람들은 이 자연을 삶에 받아들이며 순응해왔다. 특히 설천면 문항마을과 창선면 지족마을을 비롯한 여러 바닷가 마을들은 어촌체험마을로서 바다와 인간이 공존하는 지혜를 보여주는 산교육장이 되고 있기도 하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일부를 이루는 남해의 바다와 자연은 그 자체로 혹은 인간에게 손길을 허용한 모습으로 더욱 아름다워지기도 한다. 남면 선구마을과 항촌마을 사이 2㎞에 걸쳐 반달형으로 펼쳐진 몽돌해안(↑)은 해변이 모래가 아닌 검은빛의 몽돌로 깔린 것이 이색적이다. 얼마나 오랜 세월 파도가 바위와 돌덩이들을 갈아댔으면 동글동글한 몽돌이 되었을까.  

몽돌해안 인근 가천마을(↑)은 바닷가에서 산기슭까지 층층이 조성된 다랑논의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이 마을은 다랑논이 유명해지면서 아예 ‘다랭이마을’로 불리며 광광지가 되었는데, 농촌을 체험하려는 도시민들이 많이 찾는 것은 물론 국토대장정의 코스로도 자주 이용되고 있다. 마치 예술작품 같은 가천마을의 다랑논은 관광객들의 눈에 아름답고 신기한 농촌풍경이리라. 하지만 바닷가 마을이면서도 바다를 포기하고 농사를 짓기 위해 비탈을 파 수십 층의 논배미들을 만들었던 이곳 사람들의 힘겨웠던 노동과 삶까지도 그들이 이해할 수 있을는지….

해수욕장은 대개 여름 한 철 동안만 사람들이 붐비는 곳. 그런데 상주면 상주리의 상주해수욕장(↓)은 이러한 통념을 비웃기라도 하듯 계절과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남쪽지방이라 겨울에도 큰 추위가 없을 뿐만 아니라, 몇 해 전 서면 서상리에 축구·야구 등 운동선수들의 전지훈련 시설을 갖춘 남해스포츠파크가 개장했기 때문이다. 모래 색깔이 워낙 희고 고운데다 물이 맑아서 ‘상주은모래비치’로도 불리는 상주해수욕장은 폭 120m의 백사장이 2㎞에 걸쳐져 있다. 상주해수욕장은 1970년대에 듀엣 둘다섯이 불러 큰 인기를 얻었던 노래 ‘밤배’의 배경이기도 한데, 지난 11월에는 이곳에 ‘밤배’ 악보와 가사를 새긴 노래비가 건립되기도 했다.  

 

 

삼동면 물건마을 물건방조어부림(↑)도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보여주는 소중한 유산이다. 350여 년 전 1.5㎞ 길이의 몽돌해안을 따라 바람과 해일을 막고(防潮) 숲이 드리운 그늘에 물고기들이 많이 몰려들도록(魚付林) 하기 위해 조성한 이 숲에는 팽나무 등 키 큰 나무 2000여 그루를 비롯해 모두 1만여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사람들은 바닷가에 나무를 심었고, 자라서 숲이 된 나무들은 사람들에게 평안과 휴식을 주고 물고기들을 풍성하게 불러왔다. 사람과 나무와 바다의 아름다운 동행 아닌가.


마늘과 유자가 특산물로 꼽히고 해맞이 축제도 풍성

남해에 들어선 순간부터 논이건 밭이건 어디에서나 파릇하게 자란 작물을 볼 수 있었다. 바로 남해의 대표 농산물 마늘(↓)이다. 해풍을 받으며 자란 남해 마늘은 특유의 향이 강하고 알이 굵으며 저장성도 좋다고 한다. 전국 마늘 생산량의 7%를 남해가 차지한다니 경지가 비좁은 것을 생각하면 적지 않은 비중이다. 남해 마늘의 명성을 드높이고 마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이동면 다정리에 문을 연 전시관 ‘보물섬 마늘나라’는 남해 마늘에 대한 자부심을 말해준다.  

유자도 남해의 특산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데,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란 유자(↑)는 과피가 두껍고 향이 뛰어나며 쓰지 않아 전국에서 가장 높은 값에 거래된단다. 최근에는 유자술과 유자차 등 가공식품도 다양하게 개발돼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남해는 해안선의 길이가 302㎞나 된다. 그만큼 수산자원이 풍부하고 양식업과 연근해 어업도 발달했다는 이야기다. 7300여㏊의 넓은 양식장에서는 우럭·광어·전복·우렁쉥이·피조개·굴·미역·바지락·보리새우 등을 양식하고, 연안 바다에서는 감성돔·삼치·멸치·도다리 등을 많이 잡는다. 따라서 남해 여행에서는 싱싱한 회를 쉽게 맛볼 수 있는 재미가 더해진다.

한편 남해 곳곳에서는 새해 첫날 아침이면 해맞이 축제가 벌어지기도 한다. 상주면 은모래비치, 삼동면 양화금, 남면 가천마을, 창선면 적량 등이 해맞이의 명소로서 축제를 개최하며, 한려해상국립공원과 미조면 미조항에서는 선상 해맞이 축제를 열기도 한다. 바다를 온통 붉게 물들이는 일몰도 여러 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


금산에서 한려수도 절경과 함께 어둠에 잠기

남해군에서 가장 큰 섬인 남해도와 두 번째로 큰 섬인 창선도를 잇는 창선교에 들르니 다리 아래 지족해협에 죽방렴(竹防廉)들이 설치되어 있다(↓). 죽방렴은 좁은 바다 물목에 대나무로 만든 그물을 세워놓은 원시적 어업도구이자 방식인데, 이곳에 설치된 죽방렴들은 길이 10m 정도의 참나무 말목들을 물이 흘러오는 쪽을 향해 입 벌린 V자 형태로 갯벌에 죽 이어박아 발처럼 엮은 것이다. 방식이 원시적이라고는 하지만 물살에 떠밀려와 갇힌 물고기들을 상처 하나 없이 잡을 수 있으니 값은 오히려 더 높게 받는다고 한다.  

곳곳에 드리워진 남해의 아름다운 풍광에 취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두어 뼘밖에 남지 않아 마음이 조급해진다. 금산 보리암에 올라 일몰을 보려면 길을 서둘러야 한다. 금산은 원래 이름이 보광산이었으나,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한 후 조선 창업을 이루자 그 보답으로 산을 온통 비단으로 덮겠다고 한 데서 금산(錦山)이라 하게 되었단다. 금상 정상 가까이에 있는 보리암(↓)도 신라 때 원효대사가 보광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인데 조선 왕실이 원당으로 삼으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꿨다. 금산은 해발 681m로 그리 높지 않지만 기암괴석이 산 전체를 둘러싸고 아름다운 해안과 맞물려 절경을 이루고 있다.  

 

다행히 찻길이 보리암 바로 아래에까지 나 있어 보리암에 어렵지 않게 도착했다. 하지만 짧은 해는 그새를 못 참아 상사바위 너머로 자취를 감춰버렸고 사위도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노을이 잔불처럼 아직 타고 있는 가운데 금산과 보리암과 한려수도의 절경(↑)을 두 눈 가득 담을 수 있으니! 보물처럼 아름다운 섬 남해가 어둠에 잠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