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가는 길

장수, 논개 태어난 땅에 사과는 붉게 익고

몽당연필62 2008. 11. 6. 09:18

 

 

장수, 논개 태어난 땅에 사과는 붉게 익고


여행이나 술자리에서 ‘무진장’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 이 말은 전라북도 동부 지역의 무주·진안·장수를 묶어 일컬은 것으로, 이곳이 전북에서도 오지에 속함을 빗댄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진장은 통영-대전간 고속도로가 열리면서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으며, 청정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한 관광산업도 활기를 띠고 있다. 무진장의 가장 남쪽인 장수군도 서울에서 3시간이면 닿을 수 있다.


전북 장수군은 534㎢의 면적에 1읍 6면으로 이뤄졌으며 인구는 2만 4000명이다. 동쪽으로 남덕유산 줄기가 드리워져 산지가 많은 편인데, 주요 농산물로는 쌀과 함께 사과가 꼽힌다. 특히 사과는 875㏊의 면적에서 연간 1만 6000t쯤이 생산된다. 513농가가 사과농사를 짓고 소득액이 475억 원이라니, 이들은 평균 9000만 원 이상을 사과농사로 버는 셈이다.


사과 재배 올해로 100년, 알려지지 않은 문화재도 많아

장수 사과는 1908년 재배를 시작해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는데, 장수에 도착하니 아닌 게 아니라 곳곳에 사과밭이 펼쳐져 있고 빨갛게 익은 사과도 눈에 들어온다. 도로 가까운 어느 사과밭에서는 대여섯 명의 아주머니들이 늦더위를 잊은 채 사과 수확에 한창이다. 양해를 구하고 밭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노라니 한 아주머니가 “탐스러운 우리 장수 사과 잘 좀 홍보해주세요” 하며 주먹보다 훨씬 굵은 사과 몇 알을 들려준다. 장수 여행은 이처럼 푸짐한 인심 속에 시작되었다.

장수군은 인근 지역과 비교할 때 빼어난 관광지나 이름난 문화재가 적은 편이다. 관광지의 경우를 보더라도 덕유산과 구천동을 거느린 무주나 마이산 및 탑사가 있는 진안에 비해 장수는 남덕유산(1507m)이라는 좋은 산이 있음에도 지명도가 떨어진다. 하지만 장수를 자세히 살펴보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보고 배울 역사적 현장이나 인물이 결코 적지 않다.

계남면 화음리에는 열녀 해주 오씨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수열비가 있다. 양사순이라는 사람의 아내인 오씨부인은 정유재란(1597) 때 왜병이 집에 침입하여 가슴을 만지며 희롱하자, 자신의 가슴을 칼로 잘라 왜병에게 던지고 자결했다. 나라에서는 훗날 오씨부인이 마을에 열녀의 기상을 심었다고 하여 수열비(樹烈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선조임금의 손자인 낭선군이 썼다고 한다.

 

 

화음리 맞은편 화양리의 흥학당(興學堂)도 의미 있는 문화재 자료이다. 정면(대청) 2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인 흥학당은 조선 선조 30년(1597) 계남면에 살고 있던 11개 성씨 대표들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교육 시설로 지은 것인데(흥학당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숙종 43년(1717)에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서 공부한 많은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해 명문 학당으로 전국에 이름을 떨쳤다는 것이다. 개화기 이후에는 한동안 학교로도 사용되었다니, 흥학당에는 학문에 정진했던 이 지역 선비들의 얼과 주민들의 교육열이 간직되어 있다고 하겠다.

계남면에는 우리 설화에 자주 등장하여 친근한 도깨비를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고 전통문화를 지키는 마을도 있다. ‘도깨비 마을’이라 불리는 장안리가 그곳으로, 이곳에서는 도깨비 형상과 방망이 등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해마다 도깨비 축제를 열기도 한다.


장수의 역사 인물 2덕, 3절, 5의

군청이 있는 장수읍은 인구 7000명 남짓한 소도시이다. 번화한 거리 대신 전원(田園)의 여유와 소박함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관공서 직원들이나 일을 보러 온 사람들이 잠시 들러 쉬기도 하는 장수리 군청 앞 방촌공원도 아담하기 그지없다.

 

 

방촌(尨村)은 조선 세종 때 무려 18년 동안이나 영의정에 재임한 청백리이며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꼽히는 황희(1363~1452)의 호이다. 그런데 개성에서 태어난 황희의 호를 딴 공원이 왜 장수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황희가 장수 황씨이며, 세자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세종)을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다 장계면 월강리에서 한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황희는 인근 선창리 창계서원에 배향되어 있기도 하다.

장수군에서는 지역을 빛낸 인물로 2덕(德)·3절(節)·5의(義)를 꼽는다. 2덕의 한 사람은 황희이고, 또 한 사람은 고려 말엽의 학자로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장계면 호덕리에 유배되었던 백장이다. 3절은 임진왜란 때 진주 촉석루 아래 의암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으로 투신해 순절한 논개, 조선 숙종 때 보필하던 현감이 사고로 죽자 책무를 다하지 못한 책임감에 사고 현장의 암벽에 타루(墮淚·통탄의 눈물을 흘린다는 뜻)라는 글자를 새기고 자결한 백씨 성의 관리, 정유재란 때 피난을 떠나지 않고 홀로 남아 왜군으로부터 향교를 지켜낸 향교지기 정경손이다. 또 5의는 만해 한용운의 스승이며 독립운동가인 백용성 조사, 일제하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작업에 참여한 정인승 박사, 대한제국 때 일제의 침략에 맞선 의병장 전해산·박춘실·문태서 장군이 선정되었다.

 

 

이들 인물과 관련된 유적은 곳곳에 남아 사실성을 더한다. 천천면 장판리의 타루공원에는 3절의 한 사람인 백씨 관리의 절의를 기리는 타루비가 세워져 있으며, 현감이 사망하는 사고의 원인이 되었던 꿩과 놀란 말의 그림도 암벽에 새겨져 있다. 향교지기 정경손의 의로운 행동을 칭찬하는 수명비(竪名碑)는 장수리 장수향교 입구에 있는데, 장수향교는 조선 태종 7년(1407) 세워진 유서 깊은 향교로서 원형이 보존된 대성전이 보물 제272호로 지정되어 있다. 번암면 죽림리 죽림정사는 백용성 조사의 생가 일대를 성역화한 사찰이다.

 

 

논개에 대한 이야기는 좀 자세히 해야겠다. 논개는 주(朱)씨 성으로, 1574년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함양에서 넘어와 이곳에 자리 잡고 서당을 차렸으니 원래 양반가의 딸이다. 그러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가세가 기울어 관비가 되었다가, 17세 때인 1590년 장수 현감을 지냈던 최경회의 부실(副室)이 되었다. 논개는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남편을 따라 제2차 진주성 싸움에 참전했는데, 이 싸움에서 패해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도 전사하자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 있는 논개 생가.

 

아름답게 단장된 주촌마을 모습. '논개생가마을'이란 푯말이 눈에 띈다.

 

 

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 의암사는 장수읍 두산리에 세워져 있다.

 

 

의암사 일원 풍경. 영정을 모신 사당이 연못 건너 산기슭에 안겨 있다.

 

논개가 태어난 원래의 주촌마을은 1986년 대곡저수지 축조로 수몰되었으나, 1997년부터 현재의 위치로 옮겨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과 석상 등도 건립했다. 생가 앞 오른쪽에는 논개가 태어나고 자란 곳임을 나타내는 비가, 왼쪽에는 남편 최경회 장군의 장수 현감시절 선덕을 추모하는 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관에서는 출생에서 순절까지의 논개 생애와 최경회 장군에 대한 사료들을 살펴볼 수 있다.

한편 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 의암사(義巖祠)는 장수읍 두산리에 세워져 있으며, 장수군에서는 그가 태어난 9월 3일(음력)을 장수군민의 날로 정해 논개 축제를 열며 숭고한 뜻을 받들고 있다.

 

 

장수읍 용계리 팔공산 자락에 있는 팔성사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유서 깊은 사찰이다. 백제 무왕 3년(603)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혜감스님이 수도처로 삼기 위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혜감의 제자 7명도 모두 근처에 암자를 1개씩 지었는데, 팔성사라는 이름은 바로 해감과 그의 제자 7명에서 유래했단다. 경내의 작은 정자인 세심정(洗心亭)에 앉아 대웅전과 극락전을 바라보는데 어디선가 물줄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정말 마음이 씻어지는 것인가, 몇 발짝만 나가면 속세가 있건만 마음이 더없이 편안해진다.

 

 

왕조시대에 임금으로부터 친필을 하사받았다면 대단한 영광이었을 것이다. 번암면 노단리의 어서각(御書閣)은 조선 영조임금이 장현경이라는 사람에게 친히 시를 지어 하사하자 장현경이 이것을 보존하기 위해 귀향하여 정조 23년(1799)에 세웠다는 누각이다. 현재의 어서각은 여러 차례 중수한 것으로, 입구에는 최근에 세운 철제 홍살문이 있으며 그 문을 지나면 다시 삼문이 나오고 그 안에 어서각이 자리하고 있다. 예전에는 일반 백성들이 어서각 마당에 출입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으련만, 지금은 여기에 마을 사람들이 고추도 펴서 말리고 고구마 따위의 고지도 널어놓고 있으니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다.


청정 자연환경과 관관자원으로 발전 가능성 높아

장수군이 비록 군세(郡勢)가 약하다고는 하나, 문화·관광·산업의 자원 개발마저 정체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의암사 앞에는 다양한 문화공연을 유치하고 알찬 생활체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한누리전당이 개관해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장계면 명덕리에 500실의 마방을 갖춘 경주마 육성 목장이 있고, 이와 함께 천천면 월곡리에 실내 승마장 등을 갖춘 리조트가 최근 완공돼 내방객이 늘면서 마필(馬匹)산업도 성장하고 있다. 또 곱돌(각섬석)로 만든 돌솥도 장수의 특산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남덕유산을 비롯한 소백산맥 연봉들이 빚어놓은 토옥동계곡·지지계곡·덕산계곡 등 청정 자연환경도 장수의 소중한 관광자원이다.

 

 

금강과 섬진강의 최상류 지역으로, 긴 물길이 시작되는 곳이어서 이름 붙여진 고장 장수(長水). 이곳이 아름답고 청정한 풍광과 사과·인삼 등 품질 좋은 농산물로 모두가 건강하게 오래도록 사는 장수(長壽)의 고장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리는데, 석양빛을 머금은 사과가 유난히 붉게 보인다.

변영로는 시 ‘논개’에서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하고 노래했던가. 논개의 마음이 붉은색이라면, 논개가 태어난 땅 장수에서 이 가을 붉게 익어가는 사과도 그의 마음 색깔을 닮았으리라.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