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가는 길

진천, 살아서 지내기에 으뜸인 고장

몽당연필62 2008. 10. 21. 10:08

진천, 살아서 지내기에 으뜸인 고장


우리나라의 모든 고장은 서로 자기네 동네가 살기 좋은 곳이라고 자랑한다. 어떤 고장은 빼어난 산수와 풍광을 자랑하고, 어떤 고장은 너른 들과 맛 좋은 농산물을 자랑한다. 또 어느 곳에서는 아름다운 해안 풍광과 바다를, 어느 곳에서는 오랜 전통이나 후한 인심을 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그런데 이런 말 저런 말 다 필요 없이 ‘살아서 지내기에는 으뜸’이라는 고장이 있으니 바로 충북 진천군이다.


진천군에 들어서면 어디서나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는 것이 눈에 띈다. 간판에도, 현수막에도, 인쇄물에도, 심지어 지역 특산물이나 축제에까지도 이 말은 빠지지 않는다. 생거진천을 쉽게 풀이하면, 진천은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진천은 적당한 높이의 산과 기름진 들이 조화를 이뤄 예부터 곡물과 임산물이 풍부했으니 살기 좋은 고장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면 생거진천이라는 말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여기에는 하나의 전설이 있다. 옛날에 진천에 살던 어느 생원의 딸이 용인으로 시집가서 아들을 낳고 살다가 남편이 죽어서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래서 어린 아들을 시집에 두고 진천으로 개가해 또 아들을 낳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데, 용인에 두고 온 아들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용인의 아들이 장성하여 친어머니를 모시겠다고 진천으로 찾아오자, 진천에서 태어난 아들은 화를 내며 용인에서 온 아들과 싸우다 원님께 소장을 내어 해결해 달라고 하였다. 고을 원님은 고심 끝에 “어머니가 살아서는 진천에서 지내고(生居鎭川), 죽어서는 용인으로 모셔 제사를 지내라(死居龍仁)”는 판결을 내렸다. 여기서 생거진천이란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헤이그 밀사 사건 100주년…이상설이 진천 사람

진천을 찾은 날은 가을 안개가 더디게 걷혀가고 있었다. 막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제법 너른 들을 보며 처음 향한 곳이 진천읍 산척리의 이상설 선생 생가. 2007년이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된 해이고, 밀사 중의 한 사람인 이상설(李相卨) 선생이 바로 진천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상설은 1870년 태어나 7세 때 서울로 올라가 영어와 러시아어를 배웠고, 1907년 고종황제의 밀사로 이준·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가서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끝내 나라가 일제에 강점되자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펴다 1917년 병사함으로써 그리 길지 않으면서도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돼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했던 이상설 선생의 동상과 사당 숭열사. 생가는 동상 오른쪽에 있다.

선생의 생가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작고 아담한 초가인데 최근에 복원했는지 관리 상태는 양호해 보였다. 생가를 둘러싼 탱자나무의 날카로운 가시는 서릿발보다도 더 날카로운 선생의 독립의지를 보여주는 듯하고, 뒤꼍에 우거진 대나무는 마음껏 푸르고 곧은 것이 선생의 기개를 보여주는 듯했다. 또 생가 옆에는 선생의 사당인 숭열사(崇烈祠)가 세워져 기울어가는 나라를 걱정하고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고귀한 뜻을 되새겨볼 수 있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 진천농교

이번에는 문백면 구곡리의 세금천에 놓인 진천농교를 찾았다. 진천농교는 그냥 ‘농다리’라고도 불리는데, 고려 때 지네 모양으로 쌓은 길이 약 94m, 너비 3.6m, 교각 사이의 폭 80㎝ 정도의 돌다리이다. 이 다리는 돌덩이만으로 다리를 놓은 방법이나 다리가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축조한 기술이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의 하나라고 한다.

직접 다리를 건너보았다. 돌덩이를 세워 만든 24개의 교각과 교각 사이로 강물이 폭포수같은 소리를 내며 제법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다리 중간쯤에 상판을 이루는 돌덩이들이 조금 허물어져 있기는 해도 건너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다리 주위에는 칸나가 화려하게 피어 가을을 더욱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문백면 구곡리에 놓인 진천농교는 그냥 ‘농다리’라고도 불리는데, 고려 때 지네 모양으로 쌓은 길이 약 94m, 너비 3.6m, 교각 사이의 폭 80㎝ 정도의 돌다리이다.

진천농교 옆에는 정자와 데크가 설치돼 휴식과 사진 촬영을 할 수 있으며, 가까이에 농다리전시관도 세워져 있다. 이 전시관은 지난 8월 열린 농다리축제 때 개관했는데 천년의 숨결, 농다리의 사계, 국내 및 세계의 다리 이야기, 농다리의 역사와 우수성, 영상 자료, 진천군 홍보 코너 등의 전시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무인 김유신 장군이 태어나고 문인 송강 정철이 묻힌 곳

진천과 관련이 있는 인물로는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 외에 삼국통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신라 명장 김유신과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도 빠뜨릴 수 없다.

김유신 장군은 진천읍 상계리 계양마을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마을 태령산 정상에는 장군의 태를 묻은 태실(胎室)이 있다. 태실은 왕가에서 아이를 출산할 때 나온 태를 따로 보관한 시설로, 인근 태령산·태봉·태산 등의 지명도 태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김유신 장군의 태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에 속해,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장군은 흥덕왕 때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봉되었는데 영정을 봉안한 사당은 진천읍 벽암리에 있는 길상사이다. 이곳은 사계절의 경치가 빼어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 길상사.

김유신 장군이 태어나고 성장한 상계리와 인근 문봉리 일대에는 유허비가 세워지고 공원과 국궁장이 조성되는 등 삼국 통일의 위업을 기리는 사업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특히 진천에서는 유난히 화랑과 태권도 정신을 강조하는 것을 느낄 수 있으니, 이는 김유신 장군이 화랑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 중기 문신이며 시인인 송강 정철은 문백면 봉죽리에 잠들어 있고 인근에 그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정송강사가 세워져 있다. 정철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향리인 전라도 담양에서 수학했고 강원·전라·함경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관동별곡’ ‘훈민가’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우리 문학사에 빛나는 주옥같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처음 경기 고양시에 묻혔고 진천에 별 연고도 없는 그가 이곳에 잠든 것은 1665년 우암 송시열이 현재의 자리에 묘 자리를 정하고 후손들이 이장을 했기 때문이다.  

송강 정철의 무덤 인근에 세워진 정송강사는 송강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바로 아래에 송강 시비 및 송강기념관이 있다.

정송강사에는 송강기념관이 세워져 정철 문학의 향기를 맡을 수 있으며, 시비(詩碑)도 세워져 있다. 시비에는 ‘사미인곡’의 일부가 새겨져 있는데 ‘인생은 유한한데 시름도 그지없다. 무심한 세월은 물 흐르듯 하는고야(후략)’ 하는 내용이 당쟁의 와중에서 풍운의 세월로 점철되었던 그의 삶을 되새겨보게 한다.


통일 염원으로 세운 통일대탑, 천주교 박해 현장 배티성지

진천읍 연곡리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큰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 또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비문이 없는 백비도 보존돼 왔다. 이러한 역사적 바탕 위에 이 마을에는 1992년 공사를 시작해 1996년 완공한 사찰이 있으니 바로 보탑사이다.  

보탑사는 멀리서 바라보아도 최근에 지어진 것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데, 왼편의 범종각과 오른편의 법고각 사이로 난 계단을 오르면 경내에 우뚝 솟은 삼층 목탑 하나가 위엄을 보이고 있다. 높이가 42.7m나 되는 통일대탑이다. 이 탑은 목탑임에도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내부로 들어가 계단을 통해 3층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지어졌다.

통일대탑은 그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이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세웠다. 삼국 때 진천 사람 김유신 장군이 민족 통일을 이뤄낸 것처럼, 다시 한번 통일의 기운이 장군의 탄생지인 이곳 진천 땅에서 싹트기를 염원하는 상징인 것이다.

백곡면 양백리 노고산 아래에 있는 배티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여러 명의 순교자를 낸 천주교의 성지이다. ‘배티’라는 지명은 동네 어귀에 돌배나무가 많아 이티로 불리던 것을 우리말인 배티로 바꿔 생겨났다고 한다. 성지에는 성당과 최양업 신부의 초가집과 동상 및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양업영성관 등이 있다.  

이곳에 천주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20~1830년 무렵으로, 우리나라 천주교 사상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가 1849년 배티 이웃 동골에 거처를 정하면서 교우촌이 인근 마을로 차츰 확대되어 갔다. 이 지역은 깊은 산촌이었던 까닭에 성직자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기도 했는데, 병인박해 때 교우촌들이 큰 타격을 받았고 이 지역 출신이거나 거주자인 신자 27명이 순교했다. 배티성지는 1993년 성당 건립을 추진하여 1997년 축성식을 갖게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쌀, 관상어, 장미는 진천의 3대 특화작물이다

진천읍 장관리에는 종(鍾)박물관이 있어 눈길을 끈다. 전통문화유산인 범종의 가치와 우수성을 알리고 종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이 박물관은, 건물 정면의 조형물이나 전시실 밖에 따로 걸어둔 종에서 벌써 이색적인 느낌이 묻어난다. 종박물관에서는 종소리 체험 및 종에 관한 자료 검색, 종 제작과 밀랍 재현, 종 문양 탁본, 타종 체험 등을 해볼 수 있으며 종의 탄생 및 타종의 의미, 종의 역사 등도 공부할 수 있다.  

백곡저수지 인근에 있는 종박물관에서는 종소리 체험과 함께 종의 탄생과 역사, 타종의 의미 등을 공부할 수 있다.

종박물관 바로 옆에는 백곡저수지가 있다. 진천에는 커다란 저수지가 두 개 있는데, 서쪽에 있는 것이 백곡저수지이고 동쪽 초평면에 있는 것은 초평저수지이다. 백곡저수지는 인근에는 종박물관 외에 역사테마공원이 조성되어 아늑한 휴식을 취할 수 있으며, 초평저수지는 얼음낚시와 붕어낚시로 유명해서 별미인 붕어찜 맛을 볼 수 있다.

진천의 농산물로 쌀이 첫손에 꼽히는 것은 이들 저수지에서 공급하는 농업용수가 풍부한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생거진천 쌀’이라는 브랜드로 판매되는 진천 쌀은 전국 으뜸 농산물 품평회 식미 검사에서 일찍이 그 품질을 인정받아 3회에 걸쳐 대통령상을 수상하였고, 전국 최초로 품질 인증을 획득했으며, 2003년과 2005년 한국소비자단체 평가에서 전국 12개 우수 브랜드의 하나로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한편 광혜원면 죽현리를 비롯한 몇 개 마을에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관상어 단지로 꼽힐 만큼 관상어 양식업이 활발하다. 이곳 관상어는 색채가 신비하고 체형이 아름다워 세계로 수출된다. 진천에는 이밖에 장미 농사도 많이 짓는다. 그래서 진천의 3대 특화작물로 쌀과 관상어, 장미가 꼽히고 있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