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가는 길

제천, 청풍명월의 본향

몽당연필62 2008. 10. 22. 13:00

제천, 청풍명월의 본향

 

충청도 지역을 표현하는 말로 ‘청풍명월(淸風明月)’이라는 것이 있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라는 뜻으로 ‘결백하고 온건한 성격’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이 말은 충청도의 아름다운 자연과 이곳 사람들의 온화한 성품을 아우른다. 충청도에서도 충북 제천은 청풍명월의 본향으로 일컬어진다. 여기에 청풍면과 청풍호반이 있고 월악산이 있는 것이다.


가장 오래되고 유명하며 중요한 수리시설 의림지

제천은 사실 누구에게나 귀에 익은 고장이다. 학교에 다닐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 제천 의림지·김제 벽골제·밀양 수산제를 달달 외우기 때문이다. 제천에 도착해 첫 행선지로 별다른 망설임 없이 모산동에 있는 의림지를 택한 것도 이러한 배움이 무의식처럼 자리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중앙고속도로 제천IC에서 이정표를 보며 10㎞쯤 달리니 어렵지 않게 의림지를 찾을 수 있다. 제천10경에서 제1경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의림지는 삼한시대에 축조되었다고도 하고 신라 진흥왕(서기 540~576년 재위) 때 악성 우륵이 둑을 막은 것이 시초라고도 한다. 크기는 호반 둘레 1.8㎞, 저수량 661만㎥, 수심 8~13m 정도이다.

  

의림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 가운데 하나인데 주변에 노송들이 우거지고 풍광이 좋아 요즘에는 수리시설보다는 휴식처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 저수지가 진흥왕 때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약 1500년 전의 일이니 이 지역에 일찍이 관개농업이 발달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충청도를 호수의 서쪽이라 하여 ‘호서지방’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서 기준이 되는 호수가 바로 의림지라고 한다. 의림지는 그만큼 오래 되고 유명하며 중요한 저수지이다.

지금도 의림지는 300㏊ 가까운 농경지에 물을 공급하고 있어 수리시설로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지만,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관광지로서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저수지 주위에 수백 년 된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영호정·경호루 등의 정자와 누각이 있어 풍광이 빼어나기 때문이다. 거리도 시가지에서 3㎞ 정도로 가까워 많은 사람들이 산책이나 데이트 코스로 이용하고 있다.

의림지를 뒤로 하고 다음 여정을 재촉하는데 가을 들판이 어느덧 황금빛이다. 이 가을이 풍요로운 것은 의림지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우리 조상들이 지혜롭게 물을 다스려 벼농사를 발달시켜온 결과가 아닐까.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 황사영이 백서를 썼던 곳

봉양읍의 배론성지로 가는 길에 탁사정(濯斯亭)을 찾았다. 구학산과 감악산 사이로 굽이쳐 흐르는 용암천을 끼고 나지막이 솟은 바위산 위의 정자가 탁사정이다. 이 바위산에서는 예전에 가물 때면 비를 기원했다고 한다. 용암천 물굽이가 잠시 숨을 고르면서 만든 용소(龍沼)가 지척에 있어 기우제를 지내기에 적합한 장소였던 모양이다.

1925년 처음 건립했고 최근 보수한 탁사정은 중국 초나라 때 굴원(屈原)이라는 사람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의 글귀 ‘청사탁영 탁사탁족(淸斯濯瓔 濁斯濯足·맑은 물에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 발을 씻는다)’에서 이름을 땄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여름철 물놀이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 탁사정을 많이 찾는데, 이름의 유래대로라면 그들은 발을 씻어서는 안 된다. 용암천 물이 거울보다도 더 맑아 씻을 것이라곤 갓끈밖에 없기 때문이다.

탁사정에서 4㎞ 떨어진 배론성지는 이 땅에 가톨릭이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곳이다. 천주교 전래 초창기 신자들은 탄압을 피해 이곳 배론마을로 숨어들었고, 농사를 짓거나 옹기를 구워 생활하며 신앙공동체를 이뤘다.

 

(왼쪽)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되던 당시 신자들이 숨어서 살았던 배론마을은 천주교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성지이다. (오른쪽)황사영이 숨어서 백서를 썼던 토굴. 원래는 옹기를 저장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특히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옹기 저장고로 위장한 토굴에 숨어 있으면서 조선 교회의 박해 상황과 외국의 도움을 청하는 내용의 백서(帛書·비단에 쓴 글)를 작성하여 중국 베이징의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순교했으니 이것이 저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또 1855년에는 배론 공소회장 장주기의 집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당’이 세워졌고, 1861년 최양업 신부가 경상북도 문경에서 병사하자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다. 최양업 신부는 김대건 신부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신부가 된 사람이다. 성 요셉 신학당은 한문이나 한글뿐 아니라 수사학·철학·신학 등도 가르쳤으며 조선 천주교 교육의 요람이 되었으나,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양인 신부들이 체포되어 순교함으로써 폐쇄되었다.

배론성지는 훗날 몇몇 사제들이 매입하여 보존해오다가 1958년 천주교 원주교구에서 개발을 시작했다. 현재 이곳에는 최양업 신부 묘소, 박해 당시의 옹기굴과 황사영이 백서를 썼던 토굴 등이 남아있고 복원된 성 요셉 신학당과 성당, 각종 기념물들이 세워져 천주교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순례지가 되었다.


박달재에는 박달과 금봉의 애절한 사랑이 깃들고

우리나라에는 ‘목포의 눈물’이나 ‘진주라 천릿길’과 같이 대중가요에 등장하는 고장이 여럿 있다. 그런데 제천에도 유명한 노래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제천의 노래는 바로 ‘울고 넘는 박달재’.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을 갈라놓은 고개가 박달재인 것이다. 박달재로 향하는 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콧노래를 흥얼거린 것은 어렸을 때 어른들이 부르던 이 노래가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높이 453m인 박달재에 올라 휴게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울고 넘는 박달재’를 들으며 두리번거리니 ‘박달재’라는 표석 너머 아담한 공원에 박달과 금봉의 모습을 새긴 조형물이 보인다. 그 옆에는 반야월이 작사하고 김교성이 작곡했으며 박재홍이 부른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가 서 있다.

 

박달 선비와 금봉 낭자가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의 동상, 박재홍의 노래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 등이 세워져 있는 박달재 공원.


이 박달재에는 애틋한 전설이 서려 있다. 조선 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도중 백운면 평동리에 이르렀다. 해가 저물어 그는 어떤 농가에서 하루 묵게 되었는데 이 집의 ‘금봉’이라는 처녀와 서로 반해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박달은 여러 날을 묵으며 밤마다 금봉과 사랑을 나누고 과거에 급제한 후 함께 살기로 맹세했다. 한양에 와서도 금봉 생각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그는 과거에 낙방했고 금봉을 볼 낯이 없어 평동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박달의 장원급제만을 기원하던 금봉은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오르내리다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뒀다. 금봉의 장례를 치른 사흘 뒤에야 돌아온 박달은 땅을 치며 목놓아 울다 금봉의 환영을 좇아 천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박달이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왼쪽)고려 때 김취려 장군이 제천에서 거란군을 격퇴한 것을 기념하고 장군을 흠숭하기 위해 건립한 김취려 장군 역사관. (오른쪽)박달재 휴게소에 설치된 목각 조형물은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오간다.


박달재에는 김취려 장군 전적비와 역사관이 세워져 있다. 김취려 장군은 고려 때 거란군을 격퇴한 인물로, 1217년 박달재에서 큰 전승을 세웠다고 한다. 휴게소 마당에는 남녀의 아랫도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넘나드는 목각 작품들이 익살스런 모습으로 서서 관광객들을 맞는다.

제천시는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스며있는 박달재 일원을 지역 명소로 가꾸기 위한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또 해마다 ‘박달 가요제’를 열고 있기도 하다.

 

영화 촬영과 사극 제작의 명소

요즘 지자체마다 방송 드라마나 영화 촬영장을 유치하는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지역이 홍보되고 관광수입이 증대되어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천에서는 누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방송 세트장을 짓고 영화를 촬영한다. 이것은 서울에서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운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천의 산수가 그만큼 빼어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백운면 진소마을, 제천과 충주를 가르며 흐르는 진소천 위로 충북선 철로가 놓여있는데 이 철로 위에서 설경구와 문소리가 주연하고 이창동이 감독을 맡아 2000년 개봉했던 영화 ‘박하사탕’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이 촬영되었다. “나 다시 돌아갈래!” 하며 절규하는 주인공의 등 뒤로 달려드는 열차의 모습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하게 기억되고 있을 터. 진소천변에는 이 장면을 담은 촬영장 안내 간판이 세워져 있고, 화물차가 대부분인 열차들은 박하사탕처럼 달콤하면서도 아린 첫사랑의 사연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무심하게 경적을 울리며 철교를 내닫고 있다.

 

진소천 위로 충북선 철로가 지나가는 백운면 진소마을에서는 영화 ‘박하사탕’이 촬영되었다.


한편 금성면 청풍호반에는 KBS 촬영장이, 청풍면 청풍문화재단지에는 SBS 촬영장이 있다. KBS 촬영장은 ‘태조 왕건’을 촬영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예성강의 벽란도 포구를 재현했으며 이후 사극 촬영의 명소가 되어 ‘제국의 아침’, ‘명성황후’ ‘무인시대’ ‘불멸의 이순신’ ‘해신’ 등을 촬영할 때도 이곳이 이용되었다. 또 SBS 촬영장은 6000여 평의 부지 위에 관청과 마을, 시장 등의 모습을 재현하여 ‘대망’을 촬영했는데 ‘장길산’, ‘천년지애’ 등을 촬영할 때도 무대가 되었다.


청풍명월에는 제천 사람들의 자부심이 담겼다

청풍호반에 내려앉는 가을 오후의 햇살을 누리며 문화재단지로 가는 길에 위락시설인 청풍랜드를 만난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이니 어찌 휴양 시설이 없겠는가만, 호반에서 무려 162m나 솟구쳐오르는 수경분수의 장엄함과 62m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번지점프장은 아찔하면서도 후련함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곳에는 수상 항공시설, 인공 암벽장, 수상 아트홀(음악당) 등도 갖춰져 가족이나 연인끼리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

 

청풍호에 설치된 수경분수. 물이 솟아오르는 높이가 162m에 이른다.


청풍랜드 입구에서 다시 청풍대교 쪽으로 걸음을 옮기니 얼마 안 가서 ‘청풍명월의 본향 제천’이라는 커다란 표지석이 나타난다. 표지석 건립 배경 설명문에는 고려 때부터 이곳에 청풍이라는 지명이 있었으며, 조선 때 정조임금과 규장각 학사 윤행임의 담소 중에 팔도의 성품을 나타낸 말로 충청도를 청풍명월이라 하여 구전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기실 청풍호라는 것이 충주댐 건설로 생긴 충주호의 한 부분임에도, 굳이 제천에 인접한 곳을 따로 청풍호라고 부르는 것에는 제천이 청풍명월의 본향이라는 이곳 사람들의 자부심이 담겨있는 것이다.

표지석 건너편 산쪽으로 난 길 어귀에는 팜스테이 마을로 지정된 학현리 안내 간판이 보이는데, 우람한 송이 형상의 조형물에서 이 마을 특산물이 송이임을 알 수 있다. 학현리에서는 20여 농가가 해마다 9월 10일 무렵부터 약 한 달 동안 송이를 채취하여 1억 원 가량의 수입을 올린다. 이곳 송이는 육질이 야물고 향이 짙어 일본에 수출도 하였지만 요즘엔 국내 수요만으로도 판로 걱정이 없을 만큼 인기가 높다.

제천의 대표적인 농산물로는 오래 전부터 사과가 꼽혀왔는데 최근에는 고추장도 명품 반열에 올랐다. 남제천농협이 ‘청풍 생고추장’이라는 브랜드로 생산하는 고추장이 항공기 기내식으로 공급되고 있는 것. 일반 고추장이 말린 고추를 빻아 만드는 데에 비해 생고추장은 수분이 그대로 함유된 홍고추를 이용하여 제조하기 때문에 비타민을 비롯한 각종 영양소가 훨씬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고 맛도 뛰어나다고 한다.

청풍대교를 건너니 곧바로 청풍문화재단지다. 이 단지는 청풍면 망월산 일대에 자리한 곳으로, 충주댐 건설로 남한강 상류 지역의 많은 문화재가 수몰됨에 따라 이를 원형대로 보존하기 위해 1983년부터 3년 동안 현 위치에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청풍문화재단지에는 한벽루를 비롯한 보물 2점, 팔영루와 청풍향교 등 지방유형문화재 9점, 지석묘 5기 등 비지정문화재 53점, 지방기념물인 망월산성 등이 균형있게 배치되어 있으며 유물전시관·수몰역사관·관광객 편의시설 등이 갖춰져 짧은 시간에 많은 유적과 유물을 살펴볼 수 있다.

망월산 중턱의 한벽루나 정상의 망월루에 오르면 청풍호와 인근 산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호반의 물은 한없이 푸르고, 산들은 날카롭거나 부드럽거나 저마다 나름의 모습으로 아기자기한 들녘을 허리춤에 둘렀다. 보름달이라도 둥실 떠 있다면 참으로 청풍명월의 고장에 와 있음을 실감할 수 있겠다.


2개 도 4개 시군에 걸쳐 솟은 국립공원 월악산

제천에 있는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월악산 국립공원이다. 월악산은 높이가 1094m이고 충북 제천·충주·단양, 경북 문경 등 2개도 4개 시군에 걸쳐 솟았는데 국립공원 면적의 42% 가량이 제천에 속한다. 월악산에는 용하구곡과 송계계곡 등 빼어난 경관이 많고 덕주사 마애불을 비롯한 문화유산도 다수 분포하고 있다.

 

국립공원 월악산의 아름다운 능선. 월악산은 4개 시군에 걸쳐 있는데 곳곳에 계곡 등 비경과 문화유산을 품고 있다.


월악산 정상 영봉까지 오르지는 못할지언정 용하구곡 맑은 물에 그림자라도 잠시 띄워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느덧 노루 꼬리만큼이나 짧아진 추분 무렵의 가을해가 서산에 어깨를 걸쳤다. 월악산 구경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멀리서 전경 사진만 한 컷 담아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는데, 어디선가 처량한 듯 구성진 듯 ‘울고 넘는 박달재’의 가락이 들려오고 있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