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가는 길

강화도, 외침을 온몸으로 막은 섬

몽당연필62 2008. 10. 20. 18:20

강화도, 외침을 온몸으로 막은 섬

 

경기 김포시와 인천 강화군을 잇는 초지대교가 눈에 들어올 때까지도 강화도에 도착하면 어디부터 들를지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강화도는 면적 411㎢로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인 데다 유물과 유적이 많아 제대로 둘러보자면 하루로는 빠듯하기 때문이다. 1.2㎞ 길이의 4차선 다리를 거의 건널 즈음에야 첫 행선지를 정했다. 마니산이었다.


단군성조의 숨결 서린 마니산 참성단

해발 468m, 두 시간 남짓이면 정상까지 다녀올 수 있다는 말을 주워들으며 관리사무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마침내 산으로 접어들었다. 관리사무소 쪽에서 마니산을 오르는 길은 ‘계단로’와 ‘단군로’ 두 갈래. 계단로를 선택하고 10여 분 길을 재촉해 숨결이 거칠어지기 시작할 즈음 ‘단군성전’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참성단 가는 길에 단군성전이니 들여다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좀 뜻밖이다. 관리소 역할을 하는 듯한 허름한 집 한 채, 환웅천왕과 단군왕검 등의 상이 모셔진 ‘대시전(大始殿)’이라는 건물 한 채가 사실상 성전의 전부인 것이다. 도시의 큰 교회 규모를 기대했던 상상을 아쉬움으로 지우며 다시 참성단으로 향했다.

단군성전을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된다. 그리고 산을 절반쯤 올랐을 때부터 참성단이 있는 정상까지는 무수한 돌계단이 이어지면서 등산로의 이름이 왜 ‘계단로’인지를 일깨워준다.

서해안의 너른 갯벌과 석모도를 비롯한 섬들 그리고 해협 너머 김포 땅을 눈 아래로 두고 돌계단 오르기를 30여 분, 가파르던 길이 완만해져 정상인가 하고 고개를 드니 저만치에 성벽같은 것이 보인다. 바로 참성단이다.

 

마니산 산정에 있는 참성단은 단군께서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석을 이용해 기초 부분인 하단을 최고 높이 6m, 지름 4.5m의 원형으로 쌓고 그 위에 한 변의 길이가 약 2m로 네모진 상단을 쌓았으며 동쪽과 서쪽에 돌층계를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참성단은 훼손을 막기 위해 평상시 철문을 잠가 보호하므로 일반인들이 드나들지 못한다. 개천절과 신년 초 해맞이, 전국체전 성화 채화 등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개방이 되는 것이다. 비록 외벽만 바라보다 하산을 서둘러야 했지만, 높은 산 위에 단을 쌓아 민족 만대의 영화와 발전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를 올렸을 국조의 얼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무거운 지붕을 떠받친 벌거벗은 여인

마니산을 내려와 이번에는 전등사로 향했다. 전등사는 단군왕검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서린 삼랑성 안에 자리한 고찰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되던 무렵인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년)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니, 비록 불에 타 다시 짓고 중수를 거듭했다고는 하나 현존하는 사찰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전등사는 그 주위에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풍광이 매우 빼어나다. 특히 전등사를 에워싼 삼랑성을 따라 조성된 2㎞ 정도의 성돌이길을 비롯해 여러 산책로와 탐방로들은 휴식과 학습에 적합해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 많이 찾는다.

전등사를 알게 된 것은 아주 어렸을 때이다. 어떤 책에 전등사 대웅보전 나부상(裸婦像)에 얽힌 전설이 만화로 소개된 것을 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30년도 넘은 예전에 읽었던 그 만화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차례. 경내로 들어서니 과연 처마의 곡선을 부드럽게 치올린 대웅보전이 있다. 그리고 지붕을 떠받친 네 귀퉁이 기둥 위에는 옷을 벗은 여인이 추녀를 힘겹게 받들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 광해군 때 소실되어 재건하게 되었는데, 일을 맡은 도편수가 마을의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공사가 끝나면 여인과 살림을 차릴 생각으로 노임을 받으면 여인에게 맡기곤 했지만, 여인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을 가고 말았다. 이에 도편수는 여인의 나체상을 조각하여 기둥 위에 놓고 지붕을 얹음으로써 여인에게 수치심을 주고 무거운 지붕을 들어야 하는 벌을 내려 복수를 했다는 것이다.

경건한 사찰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에 어린 너무나 세속적인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하며 절을 나서는데 ‘윤장대’라는 것이 눈에 띈다. 불교 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연자방아처럼 돌릴 수 있게 한 것으로, 한 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단다. 윤장대를 한 바퀴 돌리며 생각에 잠긴다.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이 꼭 도편수의 복수심만을 나타내는 것일까. 혹시 그는 한때나마 사랑했던 여인을 그런 모습으로 응징하면서도 목탁과 불경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도량에 남겨 업을 씻어주려 자비심을 베풀었던 것은 아닐까….


섬 전체가 역사 유적이며 박물관

참성단이나 전등사가 아니더라도 강화도는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역사 유적이자 박물관이다. 특히 강화도의 북쪽 지대에 드는 오상리, 고천리, 삼거리, 부근리, 교산리 등에는 선사시대의 고인돌군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래서 해마다 가을에 열리는 축제의 명칭도 ‘고인돌 문화 축제’이다.

 

고려궁지를 찾아가던 길에 오상리 고인돌군을 잠시 둘러보았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된 5개의 고인돌군 가운데 하나인 오상리 고인돌군은 고려산 서쪽 낙조봉 끝자락에 모두 11기가 군집해 있다. 더러는 온전한 채로 더러는 제 모습을 잃은 채로 풍파를 이겨온 고인돌들은, 이곳에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아왔을 장구한 세월을 가늠하게 한다.

이 땅에 한 나라의 도읍이었던 터가 몇 군데 있었다. 북으로는 평양(고구려)과 개성(고려), 남으로는 공주와 부여(백제), 경주(신라), 철원(태봉), 광주와 전주(후백제), 그리고 서울(백제 초기 및 조선 이후) 등이 그런 터에 든다. 그런데 강화도도 한때 이 나라의 어엿한 도읍이었다. 물론 육지의 도읍과 가까운 섬이라는 운명 때문에 영화로운 세월보다는 피난처이자 항쟁지로서 아픔을 더 많이 간직하고 있지만 말이다.

고려는 23대 임금인 고종 19년(1232년) 몽골의 침입이 있자 바다가 없는 몽골의 군사력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개성에서 강화도로 천도를 한다. 그리고 개성의 궁궐 모양을 본떠 여러 건물을 짓고 24대 임금인 원종 11년(1270년)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이곳을 도읍으로 삼는다.

궁궐은 환도 후 몽골의 요구로 모두 헐렸는데, 조선 때 궁터 위에 행궁과 강화유수부 동헌 그리고 외규장각을 비롯한 건물들이 다시 지어졌다. 하지만 이마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을 당하는 등 무수한 상처를 입고 말았다.

참성단과 고인돌군을 보면서 느꼈던 존엄과 경외의 마음에다 고려궁지에 이르러 자존의 조건에 대한 상념을 더하면서 다음 길을 재촉했다. 오래 전부터 강화의 특산물로 이름을 떨쳐온 인삼이 심어진 밭과, 다 자라면 화문석으로 짜여질 왕골을 모내기 한 논이 가끔 눈에 들어왔다가 멀어져갔다.


상처투성이 역사여서 더욱 소중한 섬

강화도의 역사는 어떤 면에서 보면 수난의 역사다. 외적이 육지에서 쳐들어오면 피난지가, 바다에서 쳐들어오면 방어기지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도읍인 개성과 서울에서 가깝기도 하거니와, 특히 많은 물산이 드나드는 한강 어귀에 가로놓여 있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강화도로 피난을 하고 항전태세를 가다듬었던 임금은 고려 때 고종과 원종 말고도 25대 임금인 충렬왕이 있고, 조선 때는 16대 임금 인조가 1627년 정묘호란을 당해 몽진을 한 적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지속적으로 강화도에 군비를 확충하도록 했는데, 특히 조선 17대 효종은 성의 축조와 군량 보충, 19대 숙종은 ‘진’과 ‘보’의 증설 및 ‘돈’ 설치로 방비를 강화했다.

강화도 관광지도를 펼치면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독특한 것이 해안 곳곳에 표시되어 있다. 바로 ‘돈대’라는 것이다. 돈대는 성벽 위에 설치한 높직한 누대로, 전방을 감시하고 유사시 포를 발사할 수 있게 한 옛 군사시설이다. 조선 숙종 때 강화도에 축조한 돈대만 해도 무려 53개나 되었다고 하니, 강화도는 섬 전체가 거대한 요새인 셈이다.

강화대교에서 가까운 갑곶돈의 돈대도 병자호란 후 청나라의 재침에 대비하게 위해 숙종 5년(1679년) 설치했는데, 눈앞에 서해바다가 흐르고 건너편의 김포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여 풍광이 빼어나다. 하지만 바다를 향해 설치된 사정거리 700m의 홍이포(紅夷砲)를 비롯해 불낭기(佛狼機), 소포(小砲) 등 크고 작은 포들을 보노라니 눈앞의 아름다운 풍광을 지키기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바쳤을 조상들의 충정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돈이 소대 규모의 진지라면 보는 중대 규모의 시설이다. 불은면의 광성보는 현재 남아있는 보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한다. 조선 효종 9년(1658년)에 설치되었으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1871년) 당시 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특히 신미양요 때는 300여 명의 군사들이 1230명의 미군에 백병전으로 맞서 한 사람도 물러서거나 포로가 되지 않고 모두 장렬하게 순국했다고 한다.

한편 돈과 보의 상위 시설로 초지진, 덕진진과 같은 진이 있다. 이 가운데 강화도 동남단 강화해협의 들목인 길상면의 초지진은 한강을 통해 서울로 진격하려는 외국의 함대를 차단하는 최전방이었다. 때문에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물론이고 1875년 발생한 운요호 사건 때도 이곳에서는 일본군과의 사이에 격전이 벌어져야 했다.

강화도는 이처럼 외침이 있을 때마다 온몸으로 맞서느라 상처투성이의 역사를 지닌 섬이다. 하지만 그 상처들이 이 나라를 지키는 보루로서 생긴 것이기에, 강화도는 그 운명을 영예로 여기며 말없이 받아들여 왔다.

분오리에서 바라보는 일몰이 아름답다기에 홍조 띤 해를 보며 길을 서둘러 분오리돈대에 올랐는데, 해는 벌써 섬 너머로 잠겼는지 구름에 숨었는지 어느새 자취가 없다. 대신 보금자리를 찾아드느라 무리지어 나는 갈매기의 날갯짓만 부산할 뿐이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