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가는 길

변강쇠와 옹녀의 묘를 찾아가다!

몽당연필62 2008. 6. 10. 21:38

변강쇠와 옹녀의 묘를 찾아가다!

 

지난 5일 경남 함양군에 갔습니다. 비가 오락가락 하는 가운데, 함양읍에서 마천면을 향해 발길을 재촉하는 중이었지요. 천왕봉을 비롯한 지리산 연봉들이 눈앞에 펼쳐진다는 오도재를 오르기 시작할 무렵 길가에 이정표 하나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으잉?? 변강쇠와 옹녀의 묘???

 

 

흠... 요것들이 어디 태생인지는 몰라도 함양 땅에 묻혀 있다 그거지? 150미터라... 마음이 솔깃합니다. 150미터라면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아닌가요? 더구나 진입로로 보이는 저만치에 또 하나의 이정표가 석등과 함께 서서 150미터밖에 안되는 곳에 변강쇠와 옹녀의 묘가 있다고 유혹합니다.

 

 

에라 모르겠다!! 기왕 알게 되었으니 묘에 참배(?)나 한번 하고 가자!! 뭐에 홀린 듯, 아니 변강쇠를 흠모하는 마음인 듯, 저도모르게 길을 잡습니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조금 험하긴 해도 승용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을 50~60미터쯤 나아가자 보시다시피 다시 안내판이 있고 저만치 옹녀샘이라는 팻말도 보이는 것이 아닙니까요? 어험!!...

 

 

여기서부턴 그야말로 산길... 아무튼 옹녀샘에 가보니 사람들이 별로 안 찾는지 주변에 풀이 많이 자랐고(위 사진), 바위틈에서 물이 떨어져 고이는데 물받이는 커다란 바가지 정도입니다(아래 사진). 그 물을 마시고 싶은 생각도 그다지 들지 않습니다. 뭐 약수라고 하기엔 좀 거시기하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왜 이름이 옹녀샘이지?? 묘한 상상력을 자극하는지고... 난 양반의 후손은 아닌게비여... 엇험!!

 

 

 

옹녀샘을 지나 제법 경사가 심한 산길을 오릅니다. 흠... 산딸기가 빨갛게 익었군요. 산딸기는 정력에 좋다는 복분자와 비슷한데, 그렇다면 변강쇠와 옹녀가 이 산딸기를 많이 먹었기에 그토록........??

 

 

그러니까 지금 오르고 있는 길이 이렇게 생긴 산길이라는 말씀... ^^

 

 

숨이 약간 찰락말락할 무렵! 이윽고 산등성이에 올랐는데 저만치 웬 현대식 조형물이??? 음... 가슴이... 그렇다면 옹녀 상이군... 그런데 어라?? 뭐가 쬐끔 이상하다?? 가슴이... 가슴이... 오메 으짜까!! 옹녀가 짝가슴이었던게비여~~!!!

 

 

조형물 가까이로 다가가서 보니 의문이 풀립니다. 앞은 옹녀인데 뒤는 변강쇠인 모습을 반쪽씩 만든 것이지요. 아따 그놈 물건 한번 무쟈게 거시기하네. 빤쓰라도 좀 입혀놓지 않고... ^^

 

 

흠... 조형물이 있는 곳에서 다시 좀 넓은 길이 이어지는데... 앗!! 저만치 보일락말락 웬 꽃이 있습니다. 드디어 묘에 도착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저 꽃은 누군가가 변강쇠와 옹녀의 묘를 찾아 헌화를 했다는...??? 하긴 누군가를 존경하고 흠모하는 것은 절대로 죄가 아닐 터... ^^ 

 

 

짜자잔!! 이것이 변강쇠와 옹녀의 묘입니다. 봉분이 따로 설치되었고, 상석도 놓았네요. 꽃은 조화고요. 비목에 새겨진 옹녀의묘, 변강쇠묘 보이시죠? 묘비명 못 읽을까봐 한글로 새긴 센스~~ 무덤 뒤편에는 변강쇠와 옹녀의 장승이 서 있었던 모양인데, 오래 되어선지 많이 썩었습니다.

 

 

옹녀와 변강쇠의 묘를 찾아 참배 아닌 참배를 하고 다시 길을 재촉하니 어느덧 오도재 정상 직전! 그런데 앗!! 이건 또 뭐람?? 수십 기의 장승들이 공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변강쇠와 옹녀의 사랑 이야기'라는 테마 공원이네요. 그런데... 아따, 장승들의 머리가 훌러덩... 엇험!! 19금 공원인게벼~~

 

 

오도재 정상 지리산제1문입니다. 여기서 마천 쪽으로 조금 더 가면 천왕봉을 비롯한 지리산 연봉들을 볼수 있지요. 그런데 미리 밝힙니다만, 비가 왔다리갔다리 하는 날씨라 지리산은 자락만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ㅠ.ㅠ

 

 

장승공원 위, 지리산제1문 전망대에서 뒤돌아본 오도재. 변강쇠와 옹녀의 묘를 찾아본 뒤 이렇게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왔더랬습니다.

 

 

뽀나쓰!!-------------디지털남원문화대사전 자료

 

변강쇠歌

 

[정의] 조선 말기에 신재효가 판소리 열두 마당 중 하나로 연행되던 「변강쇠가」를 판소리 사설로 정착한 작품.

[개설] 유랑민들의 비극적 생활상을 희극적으로 형상화한 「변강쇠가」「변강쇠타령」이나 「가루지기타령」, 「송장가」, 「횡부가(橫負歌)」라고 불리기도 한다. 「변강쇠가」는 원래 조선 후기에 연행되던 판소리 열두 마당 중의 한 곡으로,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에 있는 백장암 계곡이 주요 무대이다. 현존하는 작품은 신재효(申在孝)에 의해 판소리 사설로 정착된 「변강쇠가」만이 있을 뿐, 다른 판소리처럼 소설화되어 전하는 것은 없다.
신재효가 사설로 정착시킨 시기는 작품 중의 “신사년괴역(辛己年怪疫)”이란 구절을 통해 신사년(1881) 이후로 추정된다. 또한 조선 말기의 명창 송흥록·장자백 등이 잘 불렀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19세기 말까지 연행되다가 20세기 이후 판소리의 전승 과정에서 소리의 맥이 끊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박동진신재효 사설을 바탕으로 소리를 재현하여 가끔 부르고 있다.

[내용] 「변강쇠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평안도의 음녀(淫女) 옹녀와 삼남(三南)의 잡놈 변강쇠가 청석골에서 서로 만나 함께 사는 내용이다. 옹녀는 여러 도회지를 전전하며 들병장사·막장사 등으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하는데, 강쇠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른다.
이에 옹녀는 강쇠를 달래어 지리산으로 옮겨 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강쇠가 땔감으로 장승을 베어다 때어 장승 동티로 죽게 된다. 후반부는 이렇게 죽은 강쇠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시신을 치우는 과정이 복잡하게 전개된다.
결국 뎁득이가 강쇠의 상을 치르는 것으로 끝맺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많은 인물, 특히 사당패·풍각쟁이패·초라니 등 유랑 연예인의 등장과 그들의 놀이 모습은 조선 후기 하층민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의의와 평가] 이 작품은 단순히 음란한 성에 대한 경계보다, 하층 유랑민의 비극적 생활상이 광대들의 자술적 전기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19세기 농촌공동체의 경제적 분화 과정에서 발생한 유민층이 농촌 공동체를 지키고자 했던 집단에 의해 패배해 간 사회적 현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