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않은 편지

[공처가의 편지 4] 애들 성적? 당신 성적표도 좀 봅시다!

몽당연필62 2008. 7. 15. 14:43

애들 성적? 당신 성적표도 좀 봅시다!


춤 좋아하는 아이 춤추게 하고, 노래 잘 부르는 아이 노래하게 하고, 요리에 관심 있는 아이 부침개 하나라도 더 지져보게 해야 진정으로 아이의 미래를 위하는 것 아니겠소? 날마다 애들에게 공부하라고 닦달해대는 당신, 당신은 도대체 공부 얼마나 잘했는지 언제 성적 증명서 떼어다 아이들에게 보여주오.

 

정말 덥구려. 아이들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한여름 아니겠소. 그런데 당신은 왜 더위 먹은 호박잎처럼 그렇게 축 처져있는 것이오? 더워서가 아니라 아이들 기말고사 성적이 신통치 않아서라고? 좋소. 이참에 우리 아이들 성적과 교육에 대해 한번 진지하게 이야기해봅시다.

그 녀석들, 기저귀 갈아 채우며 키우던 때가 마치 엊그제인 것처럼 기억에 생생하오. 또 걸을 때마다 삑삑거리는 신발을 신고 소리 나는 데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행복했소. 그런 아이들이 어느덧 제 할 일 알아서 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큰애는 수능을 치르게 되었으니, 우리의 행복도 아마 아이들의 성장과 함께 증폭되어온 것이라 생각하오. 아이들을 건강하고 의젓하게 키워낸 당신이 새삼 고맙소.

그런데 실은 나도 가끔 이놈들 때문에 서운하고 외로워질 때가 있소. 엉덩이 조몰락거리며 “이거 누구 거?” 하면 앙증맞게 “아빠 거!” 하던 녀석들이, 깐에 머리통 굵었다고 이젠 뽀뽀도 못하게 하고 술이라도 한잔 걸치고 들어가면 냄새난다고 코 틀어막으며 눈 흘기는 짓이 얼마나 마음을 허하게 하는지 당신은 모를 거요. 게다가 발꿈치를 든 것도 아닌데 놈들의 눈이 우리 눈보다 위에 있을 때는 이게 정말 내 새낀가 싶어 얼마나 징그러운지 아오?

그래도 어쩌겠소. 이놈들도 머지않아 ‘내 인생은 나의 것’ 하며 노래를 부를 테고 우리 품을 떠나 독립을 할 터이니, 큰 말썽 없이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 아니겠소.

나는 가끔, 우리 애들이 앞으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까 생각해보오. 법대로 하자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놈인 법치국가, 국어 못해도 영어 잘하면 대접받는 나라, 이웃에서 다 시키니 덩달아 피아노에 태권도를 가르치는 나라, 합리적인 토론보다 목소리 크고 고집 센 사람이 승자가 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 아니오. 그러니 떼 쓸 줄 모르고 심성 고운 데다 가난하기까지 한 우리 애들이 걱정될 수밖에.

그런데 이렇게 우리나라가 불합리한 점이 많다고 생각될수록 애들에게는 공부하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소. 하지만 현실은 어떠하오. 우리 애들, 햇빛도 들지 않는 전세방에서 살던 네 살 때부터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소.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이미 제법 많은 영어 단어를 알았고, 지금은 사탐 과탐이 어떻고 수리영역과 언어영역이 어떻고 논술이 어떻고 하며 학원을 전전하고 있소.

문제는 형편에 여유가 있거나 특별히 부족한 과목이 있어서 학원을 보내는 게 아니라, 이웃들이 다 그렇게 하니 우리만 유유자적하다가는 애들 장래 망쳐놓는 거 아닌가 하는 조바심의 포로가 되어버렸다는 것이오.

애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영어를 잘 못한다고 해서 얼마나 불편할지는 모르나, 나는 대한민국 교육 자체가 미쳐 날뛰고 있다고밖에는 생각이 되지 않소. 춤 좋아하는 아이 춤추게 하고, 노래 잘 부르는 아이 노래하게 하고, 야구 잘하는 아이 방망이질 실력 높이고, 요리에 관심 있는 아이 부침개 하나라도 더 지져보게 해야 진정으로 아이의 미래를 열어주는 것 아니겠소?

 

우리 자라던 때를 생각해 보오. 학원이 어디 있으며 영어가 다 무엇이오? 학교 다녀오면 가방 던져놓고 골목에서 축구하고, 손톱에 봉숭아꽃 물들이고, 부모님 도와 벼도 베고 고추도 따고, 그러면서 자라지 않았소? 방학 때면 곤충채집으로 매미 두어 마리에 쇠파리도 잡고, 식물채집은 지천으로 널려 있는 질경이나 돼지감자 이파리를 갱지에 붙여 내지 않았소? 그래도 우린 무난하게 자라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소?

물론 우리 어렸을 적 이야기 하면 당신은 “그때와는 세상이 다르다”면서 단박에 내 말문을 닫아버립디다. 세상이 달라졌다는 거 인정하오. 공부 못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없고, 좋은 직장 잡기도 어렵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오. 그럼에도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고 한숨만 나오는지 모르겠소. ‘스카이’로 지칭되는 학교를 목표로 학원에서 공부하다 오늘도 자정이 넘은 시간에야 돌아와 또 낑낑대며 잠들지 못하는 저 아이들이 참으로 안쓰럽고 불쌍하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숙제 다 했냐?” 혹은 “너 왜 벌써 자?” 하는 당신의 확인, 아니, 우리나라가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던지는 물음에서 자유로웠으면 좋겠소. 우리 집 새싹들이 공부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롭고 건강한 영혼을 지닌, 세상을 보다 폭넓게 보고 깊이 사유하며 지식보다는 지혜를 지닌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소. 이런 말 하면 당신은 또 “당신만 애들 생각하느냐, 그렇게 성장하려니까 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눈 흘길 게 뻔하오.

여름방학, 학교생활의 긴장에서 잠시 벗어나야할 이 시기가 수능을 앞둔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치열한 경쟁의 시작일 뿐이라는 생각이 드오. 그럼에도 현실을 거스를 수 없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공부하는 기계, 공부의 노예로 만드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이 한심할 따름이오.

그런데 나 지금 갑자기 한 가지 궁금증이 일고 있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데도 애들에게 그렇게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당신, 당신은 고등학교 다닐 때 성적이 어땠소? 언제 날 잡아 우리들 성적 증명서 떼어다 아이들 앉혀놓고 서로 돌려 봅시다. 소원이오.


글 : 몽당연필 / 일러스트 : 김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