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않은 편지

[공처가의 편지 2] 나도 제때 휴가 가고 싶다니까!

몽당연필62 2008. 7. 9. 13:05

나도 제때 휴가 가고 싶다니까!



회사 사무실에 냉방이 빵빵하게 잘되니 내가 구태여 여름휴가 갈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소? 낮에도 하는 듯 마는 듯 하는 우리 회사 냉방, 그나마 여섯 시 땡 치면 바로 끝이오. 직원들이야 야근하며 땀으로 목욕을 하든 말든 경비를 절약해야 하기 때문이라오. 나도 비지땀으로 하는 목욕 대신 해수욕 한 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오!


장맛비가 때때로 대지의 열기를 식혀주건만 습도가 높아서인지 후텁지근한 날씨가 여간 짜증스럽지 않소.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것이 자연의 당연한 이치인데도, 더우면 더워서 싫고 추우면 추워서 싫은 것이 인간의 마음인 듯하오. 이 장마가 끝나면 땡볕이 날 것이고 아이들은 방학을 할 터이니 우리도 여름휴가 준비를 해야겠구려. 올해는 정말 휴가다운 휴가를 보내고 싶은데 그 꿈을 이룰 수나 있을지 모르겠소.

말이 나왔으니 오늘은 휴가 이야기를 좀 합시다. 해마다 여름이 시작되면 거창한 휴가 계획을 세우고 가슴 설�지만 결과는 늘 흐지부지했던 것 같소. 그까짓 휴가 날짜 하나 식구들이 원하는 때를 딱딱 못 맞춰오느냐는 당신의 잔소리도 해마다 들려오는 지정곡이었고….

내가 받아온 휴가라는 것이 겨우 이틀 아니면 사흘, 게다가 장맛비 추적추적 내리는 7월 중순 이전이거나 이미 찬물이 밀려와 해수욕을 할 수도 없는 8월 중순 이후였으니 어찌 당신과 아이들의 불만을 철없는 투정이라고만 하겠소. 또 어렵게 휴가를 냈더라도 산과 바다를 찾아 즐기기는커녕 피곤하다며 집에서 선풍기 틀어놓고 코나 드렁드렁 골곤 했으니 내가 좋은 가장 소리 듣기를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오.

그런데 월급쟁이들 여름휴가라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오. 자영업 하는 사람들이야 언제든 가게 문 내리고 셔터에 ‘휴가’ 하고 휘갈겨 써서 붙여버리면 그만이오. 하지만 규모가 작은 회사는 회사 전체가 기간을 잡아 쉬어버리니 좋든 싫든 이때에 맞춰서 쉬게 되고, 규모가 큰 회사는 직원들끼리 서로 순번을 정해 쉬어야 하니, 월급쟁이가 원하는 때에 휴가를 얻는 것도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 못지않게 어렵단 말이오.

생각해보오. 우리 회사 사장님은 회장님 휴가 때 회사를 지켜야 하오. 이사님은 또 회장님과 사장님 휴가 날짜를 피해 쉬어야 하오. 높은 분들이 그러할진대 하물며 우리 같은 아랫것들은 어떠하겠소. 부장님 쉬시는 날짜에 차장님이 덩달아 쉴 수 없는 것이고, 차장님 쉬실 때는 팀장이 자리를 지켜야하지 않겠소. 팀장이 휴가를 잡으면 과장·대리·평직원들은 아무리 그 날짜가 탐나더라도 눈물을 머금은 채 표정관리 해야 하는 것이고…. 회사의 휴가 시스템이 이러하여 내가 회장이 되거나 회사 때려치우고 장사를 하지 않는 한은 아이들 다니는 학원 선생님들이 단체로 휴가를 갈 때에 맞춰 우리도 휴가를 가기가 쉽지 않은 일임을 이해해주기 바랄 뿐이오.

 

하긴 뭐 조금만 비굴하고 약삭빠르면 인생이 즐거워질 수도 있다고 하니 내가 좋은 날짜 선점하여 동료들에게 못을 박아버릴 수도 있겠소만, 문제는 당신이 알다시피 소심한 나는 얼굴에 철판 깔고 수작 부릴 위인이 못 된다는 점이오. 그렇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나는 너무 소심해서 탈이오. 소심하다는 것은 좋게 말하면 착한 것이지만, 비꼬아 말하자면 배알도 없다는 소리 아니겠소?

그런데 성격이 타고나기를 그러하니 어떡한단 말이오. 나, 너무나 소심해서 회사에 굴러다니는 복사지 한 장 집에 못 가져가오. 어쩌다 빨간불일 때 횡단보도를 건널라치면 뒤통수가 간질거리고, 길거리에서 담뱃불 붙였다가 꽁초 버릴 데를 찾지 못해 주머니에 넣고 지하철을 타기도 하오. 거래처 접대할 때는 룸살롱으로 모셔서 양주를 시키고 무당이 방울 흔들 듯 탬버린 열심히 흔들어 분위기 맞추지만, 정작 내가 접대를 받을 땐 기껏해야 노래방 아니면 포장마차에서 소주 마시곤 하오.

또 남의 부탁 매몰차게 물리치지 못하는 것도 약점이라면 약점 아니겠소. 내가 글깨나 쓰다 보니 이런 글 써주라 저런 글 써주라, 마치 오뉴월 쇠똥에 파리 끓듯 주위에서 들어오는 부탁을 거절하기가 힘드오. 우리나라 사람들 공짜 참 좋아합디다. “간단한 부탁”이라면서 연설문이니 기고문이니 써달라는 부탁을 맨입으로 해올 때면 정말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어이가 내 뺨을 때리오.

“당신은 작가이니 쉽게 쓸 수 있잖아. 그냥 대충 써주면 돼” 하는 말과 함께 받는 부탁이 얼마나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지 아오? 작곡가한테 노래를 대충 작곡해달라고 할 수 있소? 화가한테 그림을 대충 그려달라고 할 수 있소? 그것도 공짜로? 내가 꼭 돈을 바라서가 아니라, 글쟁이는 거미 똥구멍에서 거미줄 나오듯 글이 술술 나오리라 생각하며 글 써달라고 쉽게 부탁하는 사람들이 얄미운데도, 그 부탁들을 거절하지 못하고 들어주는 소심한 내 인생이 미치고 환장하겠어서 하는 하소연이오.

하지만 성격이 소심하다는 것 말이오, 당신이 보기에는 하찮고 좀팽이 같은 남편으로 보일지 모르나 나름대로 장점도 적지 않소. 회사 일에 힘들어하면서도 호기를 부려 사표 내던졌다가 사업 한다고 일 벌여 쪽박 찰 걱정 없으니 얼마나 좋소? 하물며 요새 텔레비전을 보면 내 남자의 여자니 뭐니 드라마마다 온통 불륜이 판을 치던데, 나같이 소심한 남자는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바람 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오. 그저 소중한 가정과 가족 지키며 ‘굵고 짧게’보다 ‘가늘고 길게’를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으니, 어느 날 갑자기 돈벼락 맞을 일도 없겠지만 쇠고랑 차거나 거리에 나앉을 일도 없을 것이오.

여름휴가 이야기를 하다가 엉뚱한 성격 이야기만 잔뜩 늘어놔버렸는데…. 아 참! 당신 말이오, 작년 여름 내가 휴가를 내지 못하고 말았는데 그때 나더러 “혹시 냉방 빵빵하게 되는 사무실에 앉아 신선놀음 하려고 식구들 학수고대하는 휴가를 일부러 안 내는 것 아니냐”고 한 적 있었잖소?

딱 결론만 말하리다. 낮에도 해주나마나한 우리 회사 냉방, 그나마 여섯 시 땡 치면 바로 끝이오. 직원들이야 야근하며 땀으로 목욕을 하든 말든 경비를 절약해야 하기 때문이오. 겨울에 난방 안 해주는 것이야 내복 입고 외투 껴입으면 해결이 된다지만, 여름에 냉방 안 되는 사무실에서 더운 바람만 나오는 선풍기 돌려가며 야근하는 월급쟁이들을 상상해 보오. 이 땅의 월급쟁이들 가운데 과연 인간 대접 제대로 받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소?

 

‘인간 대접’이라는 말에 또 떠오르는 것이 있구려. 직장생활 하는 사람 요새 골프 못 치면 인간 대접 못 받는 거 당신은 알고 있소? 거래처 사람들 이제 공짜 술 얻어먹기도 지쳤는지 요새는 보기만 하면 ‘필드’가 어떻고 ‘버디’가 어떻고 슬슬 내뱉는 게 아무래도 골프 접대를 해달라는 소리 같소. 나같이 소심한 사람은 그 비싼 골프를 배울 수 없을 터이니 평생 인간 대접 받기란 글렀지 않나 싶소.

이참에 휴가를 안 가더라도 등골이 써늘하다 못해 소름이 좍 돋고 더위가 십리는 도망갈 이야기 한 마디 들어보려오? 나도 인간 대접 받으며 살기 위해 빚 내서 골프나 배워볼 테요!


글 : 몽당연필 / 일러스트 : 김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