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않은 편지

[공처가의 편지 1] 여름은 남자를 고문한다오

몽당연필62 2008. 7. 9. 10:16

여름은 남자를 고문한다오


“여름이면 남자들은 여자들로부터 고문을 당한다오. 하이힐과 샌들의 딸깍거리는 소리, 입은 것인지 벗은 것인지 헷갈리는 옷, 현기증 날 만큼 짙은 향수 냄새가 시·청·후각 모두를 고문하오. 당신은 슬리퍼로 발소리를 죽이고, 추리닝 패션으로 맨살을 가리며, 땀 냄새로 향수를 대신하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오.”


덥구려. 여름이 여자들에게도 힘든 계절이겠지만, 남자들 역시 고문당하는 것처럼 견디기 힘들기는 마찬가지라오. 일이 좀 한가하고, 그래서 휴가도 가고, 이리저리 눈만 돌리면 적당히 벗어젖힌 여자들이 늘씬한 몸매 드러내며 눈을 즐겁게 해줄 텐데 웬 고문이냐고? 이론과 실제는 언제나 다른 법이니 여름이 어찌 남자에게 즐거운 계절이기만 하겠소!

날이 더워지면 남자들은 출근길 지하철 타러 가는 계단에서부터 고문을 당하기 시작한다오. 계단 오르내리기가 그렇게 힘이 드느냐? 그러게 평소 운동도 좀 하지 그랬느냐? 아니오, 아니오! 여자들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귀청을 파고드는 하이힐 굽의 딸깍거리는 소리가 바로 남자들에겐 고문인 것이오. 오죽하면 꼴불견 남자의 대명사가 지하철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 ‘쩍벌남’이라면, 꼴불견 여자의 대명사는 신발에서 딸깍딸깍 소리를 내는 ‘딸깍녀’겠소?

도대체 힐은 굽을 무엇으로 만들기에 소리가 그렇게 요란한 것이오? 그 요란한 소리가 여자들 귀에는 안 들리는 거요? 게다가 요즘엔 샌들도 굽에서 나는 소리가 힐에서 나는 소리와 오케스트라를 이뤄 가는귀먹은 사람조차 깜짝깜짝 놀라게 만드니 이 무슨 만행이란 말이오? 내 일찍이 당신 모르는 연애시절 사귀던 여자의 짝짝 껌 씹는 소리에 지쳐 눈물의 이별을 감행한 바 있으나, 요즘 여자들 신발 딸깍거리는 소리의 고문에 비하면 그때 껌 씹는 소리는 차라리 자장가가 아니었나 싶구려.

 

하여, 나는 소리 안 나는 슬리퍼 끌고 다니는 당신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오. 당신이 힐 대신 슬리퍼를 신는 이유가 내가 신발값을 못 벌어다줘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당신의 육중한 몸을 올려놓기에는 힐이 너무 약해서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당신으로 인해 소음공해가 일어나지 않고 고문당하는 사람도 없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오?

여름철에는 남자들의 청각만 고문당하는 것이 아니라오. 어찌 보면 시각은 더욱 무지막지한 폭력에 시달리고 있소. 당신은 남자들이 여자들의 짧은 치마만 보면 침 질질 흘리며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오? 뭐 그런 남자도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이 여자들의 그 턱없이 짧은 치마 때문에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민망해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오.

지하철을 타고 자리에 앉아서 갈 때 맞은편에 앉은 여자의 미니스커트는 여간 신경 거슬리는 게 아니라오. 무릎 위에 책이나 가방이라도 올려놓고 있으면 좋으련만, 아무런 방비가 없으니 허연 허벅지 속살까지 다 보일밖에. 게다가 다리를 꼬고 앉기라도 하면 속살을 쳐다보기는커녕 선반 위 천장에 붙은 광고나 고개 아프도록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어야 하니 이것이야말로 폭력이 아니면 뭐란 말이오?

또 계단을 오를 때는 어떤지 아오? 계단 오를 때는 남자가 앞서는 게 에티켓이라고 배웠으나, 사람의 물결에 휩쓸리고 떠밀리는 출퇴근 시간에는 그것도 다 입바른 소리일 뿐이오. 미니스커트 입은 여자가 앞에 있으면 그것은 재앙이나 다를 바 없소. 바로 눈앞에서 엉덩이는 씰룩거리지, 매끈한 다리-이런 다리는 고맙기라도 하지!-는 아른거리지, 힐이나 샌들은 딸깍거리지, 시청각이 한꺼번에 융단폭격을 당하는 거요. 어떤 센스 있는 여자는 핸드백이나 책으로 뒤를 가립디다만 그것은 오히려 뒤따르는 남자의 야릇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되어버리니 이를 어찌한단 말이오!

그러면 이 여름, 남자를 고문하는 도구로 여자의 미니스커트가 최강이냐? 천만에 만만에 콩떡! 여자의 윗옷이나 바지 또한 가관이기는 마찬가지요.

요즘 젊은 여자들이 입는 상의는 왜 그렇게 빈약하오? 어깨는 민소매를 넘어 아예 끈으로 만들었습디다. 윗부분은 가슴을 겨우 가렸고 아랫부분은 배꼽을 채 덮지 못합디다. 바지도 그렇소. 바지가 허리에 걸쳐지는 것이 아니라 골반에 아슬아슬하게 걸리니, 바지를 입으면 허리춤을 여미는 것이 아니라 골반춤을 여미는 것이며 허리띠 또한 골반띠로 이름을 바꿔야할 판이오.

비록 젊은층 일부라고는 하나 여자들의 옷 입는 모양새가 이러하니 가슴의 계곡이 드러나고 허리의 맨살이 일광욕을 하며 허리를 굽히거나 쪼그려 앉으면 팬티가 세상 구경을 하는 것 아니겠소. 이것은 채광이나 통풍을 위한 것이오, 아니면 우리나라 섬유산업이 쇠퇴해 옷감이 부족하기 때문이오? 옛 여인네들은 속살 보인 남자에게 일생을 맡겼다는데, 살덩이 실컷 보고 책임져달라고 그러는 것이오?

그런 모습이 싫으면 안 보면 되지 왜 보면서 그러냐고 힐난하지는 마오. 또 남자들이 여름에 반바지 입고 털이 숭숭 난 다리를 드러내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하면 마땅히 대꾸할 말도 없소. 하지만 눈 뜬 장님도 아닌데 보이는 걸 어떻게 안 본단 말이오. 그것은 방귀 마음대로 뿡뿡 뀌면서 냄새나거든 숨을 쉬지 말라는 것과 같소.

아무튼 그런 점에서 집안에서도 혹여 속살 보일까 단속하고 사는 당신이 얼마나 정숙하게 생각되는지 모르오. 가랑이 긴 추리닝 바지가 맨살을 가리고 일곱 해째 입는 붉은악마 티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덮으니, 이는 필시 궁상떠는 게 아니라 장옷으로 얼굴까지 가리던 우리 옛 여인네들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려는 심지 곧은 판단의 발현일 것이오. 그럼에도 이따금 추리닝 고무줄 위로 삐져나와 출렁이는 당신의 뱃살과 허릿살이야 불철주야 가사노동으로 허리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해 생겼을 터이니, 생각하면 내 마음만 바늘로 쑤시듯 아파오는구려.

남자들을 고문하는 여자들의 시청각 자료를 간단히 살펴봤소만, 굳이 한 가지를 추가하자면 후각 자료도 덧붙일 수 있을 것 같소. 바로 향수라오. 언젠가 당신이 나한테서 낯선 냄새가 난다며 심히 의심쩍은 표정을 지었던 적이 있지 않소? 하늘에 맹세코 그 냄새는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거나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여자로부터 묻혀왔을 것이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했으니, 은은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고자 하는 여자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어찌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소.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향수 냄새가 향기롭게 느껴지기는커녕 현기증이 날 만큼 뿌려댈 것까지는 없지 않겠소? 혹시 다른 안 좋은 냄새를 감추고 싶어서 그러는지 모르겠으나, 그 냄새를 집에까지 묻혀간 남자는 부인으로부터 도대체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왔느냐는 추궁 속에 가정 파괴의 공포와 싸우게 되는 수도 있다오. 그것이 내가 당신에게서 나는 퀴퀴한 땀 냄새를 향수 냄새려니 여기며 사는 이유요.

곧 퇴근할 시간이구려. 잠시 후면 또 여자들의 딸깍거리는 신발 소리, 아슬아슬한 노출, 진한 향수 냄새에 내 귀와 눈과 코가 고문을 당하겠지만 꿋꿋하게 이기고 귀가하리다.

참, 아까 거래처 접대하느라 낮술을 몇 잔 했는데 아직도 취기가 가라앉질 않는구려. 그래도 입 다물고 있으면 술 냄새야 뭐 얼마나 나겠소? 이따 집에서 봅시다. 꺼억~.


글 : 몽당연필 / 일러스트 : 김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