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색하고 하는 말

숭례문 화재 진압, 두잉 베스트였나

몽당연필62 2008. 2. 11. 09:12

설 연휴 마지막날인 10일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킨 두 개의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아침에 있었던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두잉 베스트(Doing Best)' 발언이고, 또 하나는 밤중에 일어난 우리나라 국보1호 숭례문(崇禮門) 화재이다.

 

사람은 말을 하며 살아가니 말에 의한 구설(口舌)이야 있을 수 있는 것이고, 화재도 자연적인 발화(發火)든 악의적인 방화(放火)든 사고나 실수에 의한 실화(失火)든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성질상 전혀 다른 이 두 개의 사건으로부터 나는 묘하게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자존심 혹은 자부심의 상실이다.

 

이명박 정권은 영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취임도 하기 전부터 국민에게 영어 사용의 시범을 보이고 있다. 이경숙 인수위원장의 '오�지' 발음이 그렇고, 10일 아침 청와대 수석 인사 발표회장에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말한 '두잉 베스트(Doing Best)'가 그렇다. 특히 이명박 당선인은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의미로 두잉 베스트라고 했을 터인데, 공적인 자리에서 굳이 우리말을 두고 문법에도 맞지 않은 영어(정확하게는 '두잉 데어(their) 베스트'라고 해야 옳다는 것이다)로 말해야 했느냐는 비판을 받았다.

 

국보1호로서의 가치가 있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남대문이라고도 불리는 숭례문은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또 지금까지 있었던(아쉽지만 이젠 과거형이다!)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중간에 몇 차례 수리를 하기는 했지만 비바람과 전쟁을 견디며 무려 560년이나 서 있었다고 한다(성종 10년(1479)에도 대규모 수리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그 숭례문이 하룻밤새에 불타 허망하게 사라져버린 것이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다. 1446년 반포된 한글은 권력자에 의해 버림받았으며, 이듬해인 1447년 고쳐 지어진 숭례문은 (방화가 맞다면) 누군가에 의해 불태워졌다. 성군 세종 때의 빛나는 문화유산이며 우리의 자존심이자 자부심인 한글과 숭례문이 하필 같은 날 상처입고 화마에 무너져버리다니...

 

아침엔 '두잉 베스트' 발언으로 마음이 언짢고 밤엔 불길에 휩싸여 붕괴되는 숭례문을 보며 잠들어야 했던 어제는 참으로 안타깝고 허망한 하루였다. 무려 5일 동안의 긴 연휴를 마친 오늘 아침 출근길 마음과 발길이 유난히 무거웠던 것도 이 두 개의 사건 때문이었다.

 

영어야 배우면 되고 숭례문이야 청계천처럼 복원하면 그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네 필부필부(匹夫匹婦)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자신들과 크게 상관도 없을(영어는 상대적으로 크게 상관이 있으려나?) 이 사건들로 인해 얼마나 속이 상하고 허탈한지 권력자들은 알기나 할까. 같은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우리에게 강력한 상징성을 지닌 두 개의 문화유산이 하필 같은 날 상처입고 무너진 사실이 제발 어떤 징조(徵兆)는 아니기를 바랄 따름이다.

 

그나저나 한 가지 궁금증이 솟는다. 이번 숭례문 화재 진압에 나선 소방 관계자들과 문화재청은 '두잉 베스트'를 했는가...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