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색하고 하는 말

삽질 하면서도 영어 써야 하나

몽당연필62 2008. 1. 31. 09:07

나는 영어를 못한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곧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데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도 27년 전의 일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어를 아주 못하는 것은 아니고, '차마 영어를 한다고 말할 수준이 못되는' 정도일 것이다.

 

4개국 여행하면서 사용한 영어는...

아주 가끔 불편을 느끼기는 하지만, 영어 못하는 것이 내 삶에 장해가 된 적은 없었다. 외국 여행도 일본.중국.스위스.이스라엘을 다녀왔는데, 설명은 현지의 한국인 가이드가 한국말로 해주었고 쇼핑은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 물론 쇼핑과 개인시간 때는 영어를 사용했다.

 

"하우 머치?" "휘치 두 유 원트 크레딧카드 오 유에스달러?" "차이나타운 플리즈!" "댕큐!" 4개국을 다니면서 그리고 그 나라의 골목과 가게를 누비면서 내가 사용한 영어의 모든 것이다. 아, 서울에서 외국인에게 길을 알려준 적도 있었다. 지하철에서 옆에 앉은 웬 외국인이 지도를 펼치며 종로3가역을 손가락으로 짚어보이길래 "넥스트 스테이션, 허리 업!" 하고 알려줬다. 그가 "댕큐!"하고 고마워하는 것도 알아들었다.

 

문법에 맞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물건을 사고 목적지를 찾아가고 길을 가르쳐주는 데 이 영어 실력으로도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영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영어가 아니라 국어실력을 높이는 것이다. 나는 '고이 접어 나빌레라'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와 같은 말을 하나라도 더 많이 알고 싶다. '옐로'나 '블루'보다 '누르스름하다'와 '푸르뎅뎅하다' 따위의 말은 어떤 경우에 어울리는지에 더 관심이 많다.

 

삽질 하면서도 영어 사용해야 하나

요즘 나라가 온통 영어 이야기다. '영어 몰입 교육'에 이어 '영어 공교육은 제2의 청계천 프로젝트'라는 말까지 나왔다. 한국사람이 영어를 잘하는 것, 아주 좋은 일이다. 지금 세계는 미국이 중심이며 외국인과의 접촉이 빈번한 사람, 외교관이나 통상 관계자, 통역과 번역 관련 일을 하는 사람 등 영어에 능통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모든 한국인이 영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청소를 하면서, 벼를 베면서, 시장을 보면서, 삽질을 하면서, 주유소나 세차장에서 일하면서도 영어를 사용하라는 것일까. 우리는 흔히 '효율'을 이야기한다. 논란이 되고 있는 '작은 정부'도 효율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영어 공부에 '몰빵'하면서 여기에는 투입과 산출의 경제학이나 효율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지 모르겠다.

 

영어에 관심 있는 학생은 영어를 공부하게 하되, 러시아로 진출하고픈 젊은이는 러시아어 공부를 할 수 있게 지원하고, 중국어와 일본어 잘 하는 사람도 양성하고, 우간다나 캐냐 사람들의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도 좀 길러놓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고3, 고1이 되는 우리집 두 아이도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내신과 수능에 소홀히 할 수 없는 과목이 영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큰애는 작문에, 작은애는 만화 그리기나 바느질에 흥미를 느낀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지금 죽어라고 영어 공부에 매달리지, 소설을 직접 써보거나 애니메이션 학원에 다니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노래 좋아하면 노래 부르고, 춤 좋아하면 춤 추게 하자

이 아이들이 장차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모르지만(딸들이니 결혼해서 살림만 할 수도 있겠다) 학교를 졸업한 뒤 그동안 애써 배운 영어를 얼마나 활용하게 될까도 의문이다. 그리고 지금 영어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학생들 가운데 장차 몇이나 '영어공부 안 했으면 큰일날 뻔 했을지'도 궁금하다.

 

효율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때 오른다. 전국민이 미국 사람과 프리토킹하도록 할 것이 아니라면, 영어 좋아하면 영어 하게 하고, 노래 좋아하면 노래 부르게 하고, 춤 좋아하면 춤 추게 하고, 그림 잘 그리면 그림 그리게 하고, 우리 작은딸처럼 손바느질 잘하면 또 그 방면으로 소질을 계발할 수 있도록 하고... 이럴 수는 없는 것일까. 영어 단어 외우는 것보다 하모니카 배우는 것에 더 정신을 빼앗기며 자랐던, 영어 못하는 어느 40대 학부모의 푸념이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