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더하기 추억

사진은 언제나 현재를 담고 있다

몽당연필62 2007. 12. 5. 13:52

사진은 언제나 현재를 담고 있다


우리 사회의 중추 세대는 40대 연령층이 아닐는지요. 가난한 시절에 태어나 치열한 성장기를 거친 그들은 지금 경제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자녀 교육에도 정성을 다하고 있지요. 어느덧 황혼기에 접어든 부모님 봉양도 그들 몫이고요. 사진을 통해 인생과 세태를 되돌아보는 이 기사의 주인공들도 40대가 된 한 집안의 형제들입니다. 그들이 잠시 잊고 지냈을 ‘오래 된 현재’들을 슬며시 들춰봅니다.


성장기, 흑백사진처럼 어두운 가난의 기록

지금의 40대들이 태어난 1960년대는 무척 가난한 시절이었지요.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행사였고요. 그래도 돌이나 결혼, 환갑 등 중요한 날에는 사진관을 찾거나 사진사를 불러 사진을 찍곤 했습니다.

요즘도 그런 경우가 더러 있지만, 당시 ‘고추 달고 나온 놈’ 백일이나 돌 사진을 보면 거의 어김없이 홀라당 벗겨서 중요한 부분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여기 사진의 주인공은 1964년 겨울에 백일을 맞았는데, 털모자에 두툼한 윗옷을 입고 양말까지 신었는데도 아랫도리는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들 넷을 주르르 낳은 이 어머니는 동네 아주머니들로부터 시샘깨나 받았겠군요. 그런데 아이들 ‘패션’을 한번 보시죠. 마치 유니폼처럼 똑 같은 스타일의 러닝셔츠와 팬티를 입었습니다. 모처럼 마음먹고 장에 가서 아이들 속옷을 사서 입혔을 터인데 운 좋게 카메라 앞에 서는 영광까지 누렸습니다. 1968년의 풍경이랍니다.

이 아이들이 1970년대에는 학교에 다닙니다. 1972년도 초등학교 수학여행 단체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사진의 주인에 따르면 6학년이 100명 정도 되었다는데 수학여행을 간 인원이 세어 보니 48명이네요.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친구들은 집에서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하고 있었거나, 할 일마저 없을 만큼 가난한 친구들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며칠을 보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중학교에는 20여 명만이 진학했다는군요.

남학생은 빡빡머리에 검은 교복, 여학생은 귀가 드러나는 단발머리에 하얀 칼라가 눈부신 교복을 입었던 중·고등학교 시절을 기억하십니까? 교련복을 입은 학생들의 모습은 1978년 고등학생들의 소풍 때 찍은 것입니다. 이 무렵 고등학교에서는 ‘소풍’이란 말 대신 ‘행군’이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당연히 교련복을 입고 요대(군용 허리띠)에 각반(바짓부리가 나풀거리지 않게 발목 윗부분에 덧대어 감는 헝겊 띠)까지 두른 채 군인들이 행군하듯 구령에 발을 맞춰 걷거나 목이 쉬도록 군가를 불러야 했지요. 교련복의 얼룩무늬만큼이나 꿈도 많고 고민도 많고 여드름도 덩달아 많았던 시절입니다.

이 무렵 고등학교를 다니신 분이라면, 혹시 배경에 무늬를 넣거나 인물 주위에 장식을 한 사진 찍어 보셨나요? 그런 사진은 펜팔을 하는 이성 친구에게 보내는 것으로 최고였으니, 요즘 말로 하면 ‘작업용’인 셈이었습니다. 봉투에는 이 사진과 ‘미지의 친구에게’로 시작되는 편지, 이성을 그리며 설레는 마음도 함께 담겼을 것입니다.


청년기, 알록달록 컬러사진처럼 혼돈도 많던 시절

1970년대 후반부터는 컬러사진도 제법 찍게 됩니다. 형제 많은 집에서 첫째나 둘째가 취직을 하고 카메라를 장만한 경우 그 집의 동생들은 ‘천연색 사진’에 자신의 어린 모습을 남기게 되지요. 컬러여서일까요, 1979년 사진 속 어린이들이 신은 검정 고무신이 더욱 도드라져 보입니다.

사진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때로는 인물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1982년 소가 끄는 리어카를 이용해 퇴비를 내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면, 고삐를 잡은 아버지는 새마을 마크가 새겨진 모자를 쓰셨습니다. 동네의 지붕들은 어떻고요. 기와지붕도 슬레이트지붕도 울긋불긋하네요. 이 지붕들이 리어카가 가고 있는 길과 함께 새마을운동의 결과물이라고 합니다.

1980년대 초반 디스코 열풍이 대단했었죠. 학생들도 그 바람을 피해가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아니, 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 교련복 입고 춤추는 게 뭐 자랑이라고 이런 사진을 다 찍어뒀냐고요!

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들은 너도나도 앞다퉈 서울로 올라가거나 군대에 갑니다. 1981년 군 입대를 앞둔 한 젊은이의 모습을 보시겠습니까. 장발과 깃 넓은 바바리코트가 당시 유행이었군요. 술인지 차인지 뭔가를 마시는 얼굴은 또 왜 이리 어두운지요.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제5 공화국 출범 등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 당시 젊은이들의 표정은 모두 이러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저 집 출입문에는 필경 ‘칼라 테레비 있음’이라는 방이 대문짝만 하게 붙어있었을 것입니다.

요즘이야 노래방과 PC방에 밀려 당구장 찾기가 어려워졌지만 1980년대엔 젊은이들이 가는 곳으로 당구장만한 데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1982년부터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었으니 ‘히끼’며 ‘오씨’며 ‘가라꾸’ 실력을 갈고 닦느라 짧은 밤이 아쉽기만 했지요.


결혼 이후, 세월은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함께 흘렀다

군대 제대 했겠다, 직장 있겠다, 당연히 결혼을 해야죠. 1960년대에 태어난 이들이 1990년을 전후해 결혼을 합니다. 신랑이 신부 입에 넣어주려는 것이 아마 대추가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신부가 대추나 밤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또는 자식을 많이 낳는다는) 속설이 있지 않나요? 하지만 이들이 과연 아들을 낳을지, 또 몇이나 낳을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1989년, 아이를 둘 넘게 낳으면 셋째부터는 직장에서 연말정산의 공제 혜택이나 의료보험과 학자금 지원을 해주지 않던 때입니다.

결혼을 하고 애를 낳으면 카메라의 초점은 내가 아닌 아이에게 맞춰집니다. 그런데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살이 하는 사람들 살림이란 게 오죽 빈한했겠습니까. 분명히 아이들을 찍은 사진인데 보행기, 변기통, 장난감, 빨래 건조대 등 참 많은 것들이 함께 보입니다. 사진에 잡히지 않은 어느 한구석에는 고향에서 부쳐준 쌀가마도 놓여 있을 터이지요. 살림이 곤궁해도 자식 잘 가르치고 싶은 부모 마음은 어쩔 수 없나봅니다. 아직 어린 애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었던 모양인데, ‘텔레비젼’이라는 맞춤법 틀린 글씨를 크게도 붙여놓은 1993년 사진입니다.

자식을 키운 세월이 부모님을 비켜갈 수 있나요. 4남1녀의 어머니께서 2001년 회갑을 맞았습니다. 맨 위 사진의 ‘엄마’와 아래 왼쪽 사진의 꽃바구니를 받으신 ‘할머니’가 같은 사람인 것입니다. 지금 40대 연령층의 자녀를 둔 많은 부모님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자식들 뒷바라지에 평생을 바쳤고 여전히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계십니다. 이 할머니도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냅니다. 다 큰 자식들 걱정, 아직 덜 큰 손자들 걱정을 내려놓지 못하고서요.

2002년 설날, 세배를 마친 아이들이 세뱃돈을 받으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자식 많으니 참말로 오지게 좋다. 너희들도 기계(?) 고장내버리지 않았으면 이제라도 하나씩 더 낳아라.”라고 말씀하시지만, 자식들은 흘려듣는 모양입니다.

몇 해 전 추석 풍경입니다. 며느리들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고 있군요. 손자·손녀들도 함께 빚거나 구경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에 잡히지 않은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은 마당 한쪽에 숯불을 피워 석쇠 위에다 고기를 굽고 있을 것입니다. 맨 오른쪽, 머리카락 숱 적은 아저씨 보이시나요? 지금 마흔네 살인 이 사람이, 첫 번째 사진에서 엄마 품에 안겨 고추를 내놓고 백일사진 찍었던 이 집의 셋째 아들이랍니다.


사진은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는 타임머신

어떻습니까. 인생이 한바탕 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책장이나 서랍에 넣어두었던 앨범을, 혹은 컴퓨터에 저장해놓은 사진 폴더를 열어보세요. 당신께서 지나온 소중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이, 사진을 찍던 그 때의 사회상과 함께 시간의 흐름을 거부한 채 여전히 현재로 멈춰있을 테니까요.

사진은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는 타임머신입니다. 그 사진 한 장 한 장이, 당신의 인생은 까맣게 잊혀진 과거가 아니라 값지게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연속선상에 있음을 생생하게 증명해줄 것입니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