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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부리, 배고파서 먹나요? 입 궁금해서 먹지

몽당연필62 2007. 11. 18. 19:56

주전부리 배고파서 먹나요? 입 궁금해서 먹지


초등학교 때, 학교를 파하면 동네 점방으로 쪼르르 달려가 라면땅이나 손오공을 사먹는 친구가 참 얄미우면서도 부러웠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교문 앞 문방구 옆에서 파는 핫도그의 유혹을 떨치기가 왜 그리도 힘들던지요. 요즘에는 출렁이는 뱃살 때문에 고민이면서도, 홍시든 보리 건빵이든 하다못해 당근 쪼가리든 입을 달래줘야만 잠이 오네요.

 

 

아름다운 우리말이 한자어 때문에 잊혀지거나 외래어에 밀려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가운데 요즘 다시 살아난 말이 있으니 ‘주전부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말은 KBS 2TV의 오락 프로그램인 ‘상상 플러스’의 ‘세대 공감 올드 & 뉴’ 코너에서 ‘청소년들이 모르는 말’의 하나로 출제되었습니다. 그리고 진행자가 출연자 중에서 정답을 가장 먼저 맞힌 사람에게 상으로 먹을 것을 주며 “오늘의 주전부리는 ○○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시 쓰게 되었지요.


다시 살아난 우리말 ‘주전부리’

주전부리는 국립국어원의 ‘표준 국어 대사전’에 ‘때를 가리지 아니하고 군음식을 자꾸 먹음. 또는 그런 입버릇’이라 풀이되어 있는데요, ‘상상 플러스’가 방송 100회를 기념해 조사한 ‘초·중·고등학생이 뽑은 나를 변화시킨 최고의 말’에서 초·중·고 학생 모두 이 말을 첫손에 꼽은 비율이 가장 높았답니다.

주전부리는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널리 쓰이고, 누구나 아는 말이었지요. 저도 ‘군것질’이란 말을 알기 전에 주전부리라는 말을 먼저 알았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으니까요. 어머니는 저희 형제들에게 늘 “주전부리 자주 하면 복 달아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로 동네 점방에서 뭘 사먹거나 찐고구마 따위를 함부로 가져다 먹는 걸 경계하여 하신 말씀이었는데, 모두가 어렵게 살던 시절이니 점방 출입하는 것이 흉이 되고 음식도 아껴 먹어야 하는 때문이었겠지요.

아무튼 초등학교 때 가장 부러운 친구는 학교가 파하면 점방으로 쪼르르 달려가 한 봉지에 10원 하는 라면땅·손오공·뽀빠이, 20원 하는 자야 따위를 사먹는 아이였네요. 그 과자 부스러기 하나라도 얻어먹어보려고 가방도 들어주고, 구슬이나 딱지도 바치고, 지금 생각하면 치사한 짓 참 많이도 했더랬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공부보다는 허기와 싸우며 지냈던 것 같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돌아서면 또 허기가 지던 그때, 교문 앞 문방구 옆에서 파는 핫도그의 유혹을 떨치기가 왜 그리도 힘들던지요. 매점에서 파는 팥빵은 한 개에 30원 했는데, 버스비로 빵을 사먹고 이십 리 길을 걸어 귀가했던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정말 원 없이, 삼시 끼니를 다 챙겨 먹고도 그동안 쌓였던 주전부리 못한 한을 마음껏 풀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직장을 구하고, 총각 때라 하숙을 했지요. 마침 야간 통행금지가 없어져 심야 영업을 하는 가게들이 생겨나면서 한밤중 출출해진 배를 어려움 없이 달랠 수 있었던 겁니다. 여름엔 잠들기 전에 참외 두어 개를 먹어치웠고, 겨울엔 쥐포며 오징어며 과자들로 입 심심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입을 달래는 것이다

주전부리는 제때 챙겨먹는 식사인 끼니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끼니 외에 심심풀이 삼아, 혹은 다소 출출할 때 입을 달래려고 군음식을 먹는 것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주전부리는 배를 채우기보다는 심심한 입을 달래는 것이고, 배 곯을 일 없는 사람들이 누리는 즐거움의 하나라 할 수 있겠지요.

예전에도 어른에게나 아이에게나 주전부릿감은 참 많았습니다. 설 명절이면 식혜·수정과·조청·가래떡이 긴긴 밤을 동행하는 좋은 친구였고, 추석 무렵에는 쑥떡·호박범벅·찐쌀·튀밥 따위가 있어 즐거웠지요. 이따금 찾아오는 엿장수나 아이스께끼장수는 또 얼마나 반갑던가요!

 

 

주전부릿감도 세월에 따라 많이 달라졌습니다. 부모 세대는 어렸을 때 배추꼬랑이와 군고구마만으로도 기꺼웠지만, 요즘 아이들은 각종 과자를 비롯해 패스트푸드·빙과·탄산음료·꼬치구이 등 선택의 폭이 매우 넓지요. 떡볶이나 어묵, 붕어빵은 세대를 초월한 주전부리계의 스테디셀러고요. 얼마 전 딸애와 함께 외출을 했다가 우연히 아이의 친구들을 만났는데, “우와, 붕어빵이다!” 하는 합창을 들었습니다. 우리 부녀가 닮기도 무척 많이 닮은 것이, 혹시 함께 붕어빵 주전부리를 많이 한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요즘에는 출렁이는 뱃살 때문에 고민을 하면서도, 단감이든 보리 건빵이든 하다못해 당근 쪼가리든 입을 달래줘야만 잠이 오네요. 하지만 어떡합니까, 끼니를 먹을 때는 느껴지지 않는 행복이 주전부리를 하면 마구마구 샘솟는 것을요.

밤이 긴 겨울입니다. 혹시 아이가 밤늦도록 공부를 하고 있다면 맛있는 주전부릿감을 준비해서 잠시 쉬게도 할 겸 불러서 앉혀놓고 함께 잡수시지요. 아빠와 엄마가 자랄 때는 어떤 주전부리를 했는지 이야기도 들려주시면서요. 그리고 아이들이 주전부리를 하더라도 너무 크게 꾸중하지 마시고요. 우리가 주전부리를 할 때 부모님들이 야단을 치셨지만, 솔직히 그 야단 듣는 참담함보다도 즐겁고 행복한 마음이 더 크지 않았던가요?

(사진 제공 : 최수연/월간 ‘전원생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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