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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 뒀다 어디에 쓰려는고?

몽당연필62 2007. 11. 18. 19:39

손은 뒀다 어디에 쓰려는고?


한국인의 두뇌가 좋은 이유는 손을 잘 쓰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인구에 회자된 적이 있었다. 실제로 오래된 건축물이나 조각품 등 문화유산은 물론이고, 아직까지 사용하는 지게와 멍석 등 생활용품에서도 우리 민족의 빼어난 손재주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요즘에는 대부분의 기물과 용품을 사다 쓰니 그 우수한 손재주를 발휘할 일이 거의 없고, 쓸모를 잃어버린 연장에는 녹과 먼지만 쌓여간다. 이러다 손이 하는 일에서 ‘만들기’는 아예 탈락하고 코 후비기나 마우스 클릭하기 따위만 남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집안을 한바퀴 빙 둘러보는데 이런저런 살림살이가 참 많이도 눈에 띈다. 의자와 방석들이 거실 아무 데나 놓여 있고, 이제는 주인이 성장해서 눈길도 주지 않는 장난감들이 신발장 위에 빼곡하다. 방에는 커튼이며 액자며 컴퓨터며 책장과 책꽂이며, 얼마나 많은 물건들이 있는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서랍 속에도 잡동사니들이 그득할 것이다.


“아니, 아파트 처음 살아보세요?”

그런데 어느 것 하나 집에서 직접 만든 것은 없고 죄다 사서 쟁였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고, 게으름을 탓할 일도 아니다. 집에서는 뭘 만들래야 만들 수가 없어서이다. 공동주택에서의 삶은 아이들이 뛰는 것, 벽에 못 하나 박는 것조차도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입주를 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니 낯선 사람이 다짜고짜 “아니, 아파트 처음 살아보세요?” 하며 눈꼬리를 감아올리는 것이었다. 그는 아래층 사람인데, 쿵쿵 울리는 소리에 머릿골이 다 흔들린다고 했다. 어머니께서 작은 통에다 마늘을 찧고 계셨던 것이다. 아파트에서는 소음과 진동이 최대의 적임을 그때 확실히 알았고, 뭔가를 만든답시고 뚝딱거리면 안 된다는 핑계를 게으름에다 슬쩍 얹어버렸다.

사실 소음이나 진동 문제가 아니더라도, 구태여 집에서 번거롭게 물건을 만들 이유가 없다. 시장에 가면 예쁘고 좋은 물건을 얼마든지 살 수 있는데, 바쁜 사람들이 시간을 들여 재료를 구하고 재봉틀을 돌리거나 대패질을 할 턱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도시 사람들은 삶에 편리함을 얻은 대신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드는 즐거움 말이다.


예전에는 만드는 것이 일이었다

어른에게나 아이에게나 만드는 것이 일이던 시절이 그리 오래 된 게 아니다. 도시냐 시골이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겠지만 30여 년 전만 해도 어지간한 가재도구나 장난감은 거의 직접 만들어서 썼다.

아버지는 목재 몇 개와 판자 몇 장만 있으면 쓱싹쓱싹 톱질과 대패질을 하고 탕탕 못을 쳐 마당 감나무 그늘 아래에 훌륭한 평상을 놓았다. 가지가 위로 적당한 각도로 뻗은 소나무 두 개를 베어 끌로 서너 군데 홈을 파고 세장을 끼운 다음 짚으로 등받이와 멜빵을 달면 지게가 되었다. 아버지의 망치질 몇 번에 앉은뱅이 의자가, 낫질 몇 번에 탱자나무 윷이 만들어졌다. 겨울이면 멍석·가마니·삼태기·새끼·이엉·멱둥구미 따위 짚으로 만든 것들이 아버지의 손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손이라고 해서 만드는 것에 아버지께 뒤질 턱이 없었다. 삼이나 모시는 베가 되고, 색색의 조각 천은 바느질 끝에 상보로 바뀌었다. 날렵한 뜨개질 솜씨로 대바늘을 놀려 조끼·장갑·목도리들을 떴으며, 허름한 옷가지를 잘라 학교에 가져갈 유리창닦이를 앙증맞게 만들어주시기도 했다.

만들기의 천재는 어쩌면 아이들인지도 몰랐다. 아이들의 손재주는 물론 누군가의 어깨너머로 배워 익힌 것이겠지만, 차라리 타고난 본능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건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남자아이들이 나무를 잘라 깎으면 야구 방망이도 되고 팽이도 되었다. 낭창거리는 나뭇가지는 활로, 매끈하고 기다란 수수 모개는 화살로 변신했다. 대나무 한 가지만으로도 딱총·물총·스키를 만들고, 밀짚으로는 모자와 여치집을 엮었다. 질경이나 담쟁이 잎, 헝겊 쪼가리로는 제기를 만들어 찼다. 부모님들로부터 꾸지람을 들으면서도 연과 새총, 썰매 따위를 악착같이 생산해냈다. 여자아이들의 고운 손은 종이로 학과 학 알을 접고,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었다. 벙어리장갑 정도는 직접 뜨고, 찰흙을 주물러 인형을 빚고 밥을 지어 소꿉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무엇이든 만들면서 어른으로 성장해갔다.


도구 인간의 본능은 살아 있다

만들기를 포기한 지,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물건을 구입해서 쓰는 편리함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아이들도 장난감을 직접 만들기보다는 문방구에서 사거나 이미 만들어진 부품을 조립하고 해체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니 아이들이 낫질은커녕 과일 하나도 제대로 못 깎을 수밖에.

그렇다고 도구 인간으로서의 본능마저 아주 사라져버렸던 것은 아니다. 명절에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에 가면 한지에 마디가 길고 고운 시누대를 쪼개 붙인 연을 만들어 날리게 했고, 질경이 잎으로 제기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평소에는 거실의 구석에 두고 화분이나 책을 올려놓을 수 있는 받침대 같은 것은 직접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는 아쉬움도 늘 간직하고 있다.

 

 

듣자하니 일본의 아파트 단지나 공동주택에는 목공 등의 작업을 마음놓고 할 수 있게 별도의 공간을 갖췄다는데 참으로 부러울 따름이다. 우리 아파트 단지에도 그런 공간이 있다면 쓱쓱 대패질을 하고 퉁탕퉁탕 못을 쳐서 책꽂이도 만들고 의자도 만들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CD들을 꽂을 수 있는 케이스도 만들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또 한쪽 귀퉁이가 썩어 부스러지고 있는 목욕탕 발 받침대를 수리해서 갖다 놓으면 아내와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만들기가 과거에는 노동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직접 만들 일이 거의 없는 요즘에는 하나의 즐거움이요 생활의 활력소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옷이나 액세서리, 생활 소품 따위를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다. 그렇게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물건은 세상에서 오로지 하나 뿐인 ‘핸드 메이드’ 명품일 터이다.

오로지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만물의 영장으로 진화할 수 있었다. 내 손이 지금 도구를 쥐어줄 것을 원하고 있다. 그러면서 외친다.

“아니, 손은 뒀다 어디에 쓰려고 그렇게 아끼십니까?”

(사진 제공 : 최수연/월간 '전원생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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