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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담, 내가 허문 담

몽당연필62 2008. 5. 13. 10:13

나를 키운 담, 내가 허문 담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손을 흔들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이라는 구성진 노래가 크게 유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래처럼 돌담길을 등지고 올라와 서울살이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서울과 고향 사이에 보이지 않는 담 하나를 높고 길게 쳐버렸습니다.

 


 

책 보퉁이를 어깨에 두르고, 문짝 잃은 설주가 기대어 선 돌담에 눈화살을 한 번 쏘고는 집을 나섭니다. 우리 집 돌담은 언젠가 큰바람이 불고 양동이로 퍼붓는 듯한 비가 쏟아질 때 반쯤 허물어져 제 몸 가누기도 힘겨운데, 다 썩어가는 설주를 몇 해째 껴안고 있습니다.

구불구불한 돌담길 골목을 따라 몇 집 지나 나타난 벽돌담 아래서 같은 반 친구인 희숙이를 부릅니다. 희숙이네는 기왓장을 인 담이 높아서 어른이 발돋움을 해도 마당이 들여다보이지 않습니다.


담 너머로 친구 불러 함께 가는 등굣길

학교 가는 길은 양쪽으로 주욱 담이 늘어서 있습니다. 집이 있는 쪽에는 돌담이나 흙담이, 밭이 있는 쪽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습니다.

우리는 담 너머로 평근이와 영만이를 부르고, 혜윤이와 명화를 불러 함께 학교를 갑니다. 탱자나무 울타리 너머라고 우리의 관심이 못 미치는 것은 아니지요. 개구쟁이들의 입을 즐겁게 해주는 마늘종이나 유채 줄기가 몸을 사리고 있거든요.

학교는 운동장을 둘러싼 전나무가 담장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꼭 개구멍이 있습니다. 전나무 줄기와 반쯤 드러난 뿌리에 윤이 나도록 드나드는 건 우리인데 왜 개구멍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동네는 온통 담 천지입니다. 흙 좋은 들이 넓은 동네인데, 돌담들은 어디서 그 많은 돌을 가져와 쌓았는지 신기합니다. 제비꽃처럼 작던 우리는 담 밑에서 해바라기처럼 키가 자라고, 어른들은 담 밑에서 많은 일을 합니다.

담에다 남자 애들은 동전치기를 하고, 여자 애들은 옷핀이나 머리핀으로 핀치기를 합니다. 담벼락은 연 날릴 때 찬바람 막아주는 놀이터가 되고, 잎자루를 잘 홀치면 훌륭한 제기가 되는 담쟁이덩굴을 키워내며, 기와 조각을 쓱싹쓱싹 문질러 친구들 모두가 부러워하는 구슬을 만들 수 있게도 해줍니다. 살구나 감을 딸 때 간짓대로 닿지 않으면 담 위에 올라가 키를 키울 수도 있습니다.


놀이터도 낙서장도 되어주는 담

때로는 담이 밉기도 합니다. 어느 날 보니 희숙이네 벽돌담에 누가 크레용으로 나랑 희숙이가 연애를 한다는 낙서를 해놓았습니다. 누가 볼까 무서워 낙서를 지우느라 담벼락을 얼마나 닦고 문질렀는지 모릅니다. 돼지 오줌보에 바람을 불어넣어 만든 공으로 친구들과 골목에서 축구를 할 때는 또 어떻고요. 공은 어쩌면 그렇게 쉽게 담을 넘어가버리는지, 공 차는 시간보다 공 찾으러 다니는 시간이 늘 더 걸립니다. 부산으로 이사 가는 육철이와 이담에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 만나자며 새끼손가락 걸었던 곳도 동각 담벼락 밑입니다.

어른들은 담을 무척 아끼고 또 여러 모로 이용합니다. 흙담이 있는 집에서는 해마다 추수가 끝나면 꼭 짚으로 용마름을 엮어 담을 덮어줍니다. 기왓장을 올려 멋을 내는 집도 있고요.




아버지는 돌담 틈에 숫돌을 끼워 넣고 낫이며 칼을 갈아 날을 세웁니다. 또 마당에서 이어진 텃밭을 돌담을 쌓아 갈라놓았습니다. 마늘을 놓고 깨를 털고 콩을 심다 옷이 땀에 젖으면 아버지는 그것을 벗어 돌담 위에 걸쳐놓습니다.

어머니에게도 담은 꼭 필요하지요. 담벼락이 찬바람을 막아주는 곳에 장독대를 두고, 그 옆에는 화단을 만들어 맨드라미며 봉숭아를 심습니다. 때로는 담이 방해가 될 성도 싶은데, 다행히 높지가 않아서 이웃 남평댁 아주머니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나물이며 떡을 주고받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담, 낯선 모습으로 멀어지다

이 담들이 어느 날, 길지 않은 기간에, 갑자기 모습을 바꿨습니다. 골목길을 넓히기 위해 한길씩 뒤로 물러앉으며 반듯해지고 키가 커졌습니다. 몸체는 돌이나 흙이 아닌 시멘트 블록이었고요. 또 머리에 이고 있던 용마름이나 기왓장은 사금파리, 유리조각 따위로 바뀌었고 어떤 집 담에는 철조망이 쳐지기도 했지요.

본촌 할머니댁 돌담 밑에서 꽃을 피워내던 무궁화는 새 담을 망가뜨린다며 뿌리째 캐버렸고, 성주양반 아저씨댁 돌담 틈에서 몸집을 키웠던 팽나무도 베어 땔감으로 썼습니다. 아이들은 감이 익어가도 이제 그것을 따기 위해 담으로 올라가는 일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낫과 칼을 어떻게 갈았는지 그 뒤로는 기억이 없네요.

그 무렵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손을 흔들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이라는 구성진 노래(나훈아, 물레방아 도는데)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몇 년 뒤 노래처럼 돌담길을 등지고 올라와 서울살이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서울과 고향 사이에 보이지 않는 담 하나를 높고 길게 쳐버렸습니다.


고향길에 가로 쳐진 마음의 담 허물 터

강산이 두어 번 변했을 세월이 흐른 오늘 문득 그 노래가 흥얼거려지니 웬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마음속의 높고 견고한 그 담을 허물라는 뜻이 아닐는지요.

생각해보니 정말 무심했네요. 다니던 학교가 폐교되어 운동장이 잡초로 덮이자 전나무 울타리의 반들거리던 개구멍도 잔가지가 돋아 막히고 말았더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었거든요.

오늘 바로 허물겠습니다. 느끼지는 못했지만, 고향길을 막아버린 담을 지니고 다니느라 제 마음도 적잖이 무거웠을 터입니다. * 사진 제공 : 최수연(월간 '전원생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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