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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말한다 / ① 추억은 헌신짝처럼 버려지지 않더라

몽당연필62 2007. 11. 16. 13:54

신을 말한다 ①

추억은 헌신짝처럼 버려지지 않더라

 

 

엿장수 가위질 소리가 들려오면 너무 닳아서 쓸 수 없는 호미도 찾아내고, 할머니가 머리를 빗을 때마다 모아둔 머리카락도 챙겼다. 그런데 조금 해지긴 했지만 아직 더 신을 수 있는 아버지 고무신이 자꾸 눈길을 당겼다. 잠시 망설이다 낫으로 고무신을 아주 찢어 기어코 엿장수에게 달려가고 말았다.

 

장난감으로는 고무신이 최고였다

어려서의 신은 고무신이 거의 전부였다. 명절이나 집안 혼사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흰 고무신을 꺼내 신었을 뿐, 그나마 검정 고무신 투성이였다.

고무신은 용도가 참으로 다양해서, 아이들에게 장난감이 따로 필요 없었다. 맑디맑은 물줄기가 햇살을 부서뜨리며 졸졸졸 흐르는 도랑에서 머리만치나 한 돌덩이를 젖히고 조심조심 고무신을 갖다 대면 통통하게 살진 가재를 잡을 수 있었다. 신 속에 갇힌 가재는 두 눈 부릅뜨고 장군 폼으로 집게발을 휘저어보지만, 이미 힘을 잃은 포로일 뿐이었다.

고무신에 모래를 담아 놀았고, 마당에 널어놓은 나락을 한 움큼 코에 몰아넣고 돌멩이로 내리찧어 까먹기도 했다. 쇠꼴을 베러 가서는 신짝 던지기를 해서 가장 멀리 던진 친구에게 풀 한 주먹씩 베어주기도 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고무신 한 켤레를 사오셨다. 발에 맞나 크기를 확인해보고는 발바닥이 오목하게 들어가 잘 닳지 않는, 그러니까 ‘다이아표’라는 마크가 있는 부분에 면도날로 얕고 가늘게 홈을 파셨다. 신발이 여럿 있는 곳에 가더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고 바뀌지 않도록 표시를 하신 거였다.

축구할 때 고무신은 참 불편하다. 운동장에 잔돌이 많으니 벗어버릴 수도 없고, 공을 차면 꼭 공보다도 신짝이 더 멀리 날아가곤 했다. 달리기 할 때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 그런데 어떤 친구는 꼭 출발선에서 양 손에 신 하나씩을 배턴처럼 쥐고 달렸다.

여벌의 신이 없던 살림이라 고무신 한 켤레를 가지고 정말 닳도록 신었다. 학교에 가고, 산에서 나무를 하고, 어머니를 따라 장에 갈 때도 고무신은 늘 함께였다. 테두리 부분이 찢어지면 헝겊을 덧대 꿰매 신기도 했다. 바닥에 구멍이 나고서야 신은 수명을 다했다.

멀리서 엿장수 가위질 소리가 들려오면 마음이 급해졌다. 너무 닳아서 쓸 수 없는 호미도 찾아내고, 할머니가 머리를 빗을 때마다 모아둔 머리카락도 챙겼다. 그런데 자꾸 눈길을 당기는 것이 있었다. 조금 해지긴 했지만 아직 더 신을 수 있는 아버지 고무신이다. 잠시 망설이다 눈치를 살피고는 낫으로 고무신을 아주 찢어 기어코 엿장수에게 달려가고 말았다.


발에 신을 맞추지 말고 신에 발을 맞춰라

고무신에서 벗어난 때는 면 소재지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였다. 까까머리 남학생들은 모두가 ‘스파이크’라는 까만 운동화를 신었다. 자주 빨지 않아 냄새나는 것이야 그렇다 치는데, 신발 끈은 왜 그리 쉽게 끊어지고 옆구리는 또 왜 그리 쉽게 터지는지….

운동회가 열렸다. 학급에서는 입장식을 할 때 점수를 잘 받기 위해 하얀 운동화로 통일해 신기로 했다. 그런데 어떡한담, 있는 신을 두고 새 신을 산다는 게 만만하지 않은 살림이었으니. 하지만 두드리면 열린다고, 운동회 전날 밤 어머니께서 묘안을 내셨다. 하얀 천으로 커버(덧신)를 만들어 까만 스파이크 위에 씌워주신 것이다.

고등학교는 중소도시에서 자취를 하며 다녔다. 잠을 잘 때는 꼭 신을 부엌에 들여놓았다. 유명 메이커가 하나 둘 등장해 고무신에도 ‘나이키’ 상표를 그려 붙이던 그 무렵, 좀도둑은 메이커를 불문하고 잡히는대로 신을 집어가곤 했다.

 

 

지금의 학생회 격인 학도호국단 간부들이 ‘신발 자유화’를 주제로 토론을 벌였던 것도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일부 학생들이 신발의 완전 자유화를 주장했지만 결론은 “현재와 같이 검정 운동화를 신자”였다. “시골에서 올라와 어렵게 자취하는 학생이 많은 현실을 감안할 때 신발로 인해 위화감이 조성될 수 있으며, 흰 운동화를 신을 경우 자주 빨아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 하겠는가”가 이유였다.

막내 외삼촌이 군대에 가고 며칠 지나서 외삼촌이 입던 옷과 신던 신발이 돌아왔다. 그것을 가슴에 안고 서럽게 우시던 외할머니 모습은 그 시절 아들을 군대에 보낸 모든 어머니들의 모습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구두를 신던 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취직 시험에 합격을 했을 때인데, 외삼촌이 선물로 사준 것이었다. 갈색의 그 구두는 뒤축이 너무 빳빳해서 발뒤꿈치에 물집이 잡혀 여러 날 고생도 했지만, 동글게 닳은 굽을 두 번이나 바꾸도록 신을 수 있었다.

‘발에 신을 맞추지 말고, 신에 발을 맞추라’는 말의 뜻은 군복을 입으면서야 제대로 알았다. 훈련소에서 보급 받은 ‘10문7’짜리 워커는 헐렁하기 그지없었지만, 워커가 기준이지 결코 발이 기준일 수는 없었다. 고참이 되어서야 발을 기준으로 워커를 고를 수 있었는데, 그때는 ‘파리가 낙상을 할 정도’로 워커에 광을 내는 것이 중요한 일과이자 고역이기도 했다.


가난한 아빠가 꿈꾸는 굽높이 행복

결혼을 하고 애 둘을 키우면서 신을 사는 재미가 생겼다. 큰애가 혼자서도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발을 디디면 삑, 삑, 소리가 나는 삑삑이 신발을 신겼다. 소리 나는 곳을 찾아 애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웃음이 따라다녔고, 걸음이 빨라질수록 행복도 고조되었다. 아내에게 구두든 슬리퍼든 신발을 신기는 기쁨도 작은 것이 아니었다.

실내화를 집에 가져와 빨았다 하면 다음날 집에 두고 학교에 가곤 하는 덜렁이 작은애는, 한번은 엄마 몰래 제법 비싼 운동화를 샀다가 혼이 났다. 곤궁한 생활에 익숙한 부모에게는, 어떤 신을 신었느냐도 요즘 아이들에게 친구의 자격 기준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큰애는 머지않아 숙녀가 된다. 신에 대해 생각하면 가난의 추억이 먼저 떠올려지는 이 아빠는, 큰애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예쁜 하이힐부터 선물해주려는 행복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그 신을 신는 날, 아빠의 가슴 속에 벅차게 차오를 기쁨의 크기를 아이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신발장을 열어보니 네 식구의 신들이 그득하다. 구두와 운동화는 말할 것 없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장화와 딱 한 번 신고 10년 넘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축구화도 보인다.

닳고 해져서 신지 않거나 앞으로도 신을 일 없을 성싶은 것들을 내다버리려고 신발장 안으로 들이미는 손을 마음이 잡는다. 새것이 아닌데도 ‘헌신짝 버리듯’ 버려지지는 않는 것이 또한 신이다. (사진 제공 : 최수연/월간 ‘전원생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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