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색하고 하는 말

이회창 출마 선언, '진정한 어른'이 그립다

몽당연필62 2007. 11. 7. 14:08

어렸을 때, 형이나 동생과 싸우다가도, 아버지께서 '에헴!' 하고 기척을 하시면 이내 싸움을 그치고 잠잠해지곤 했다. 아버지의 헛기침은 어떤 호통이나 잔소리보다도 진중하고 위엄 있는 메시지를 지녀, 우리 형제들을 압도하고 분란을 중지시켰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헛기침만으로도 집안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른이라는 것이 생물학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라고 해서 되는 지위던가. 동네의 또래들 가운데는 제 부모에게 대들고 패악질을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은 그의 부모가 진정한 어른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정이나 조직에서 어른이라함은, 그 구성원들의 지도자요 사표요 모범이다. 그래야 구성원들이 마음에서 우러나 따르고, 스스로는 '어른 대접'을 받게 된다. 만일 아버지께서 언행이 가벼워 남의 손가락질이나 받고 우리 형제들에게도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무리 헛기침을 해대도 우리는 못 들은 체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헛기침에 그저 목이 쉬거나 끝내는 성질을 부려 폭압으로 우리를 다스렸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른이란, 존재 자체로 곧 권위가 되는 사람이다. 그러면 권위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사람에 따라 여러 갈래로 생각할 수 있겠으나, 권위의 근원으로 '신의'를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신의 있는 사람이 앞에 나서면 일반 대중은 의심 없이 그를 따르며, 한마디 말이나 단순한 행동거지에서도 감화를 받아 지침으로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의는 믿음이요 의리이며 책임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신의는 백 번 말로 외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언제나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바른 일에 앞장서서 모범을 보일 때 쌓인다.

 

오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아주 예상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출마 선언을 접하니 마음이 못내 착잡하다. 이미 두 번의 선거에서 실패를 했고, 스스로를 정권교체에 실패한 죄인으로 규정하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그가, 그것도 자신이 창당 주역이나 다름없는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압도적으로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가운데 은퇴를 번복하며 자청해 격랑으로 뛰어든 것이다.

 

이회창 전 총재가 대선에 다시 나오는 것이 법률적으로 하자가 없으니 말릴 생각도 없다. 이명박 후보로는 미심쩍은 데가 있었든, 스스로 판단하기를 당선의 자신감이 넘쳤든, 지지자들의 출마 요구가 열화와 같았든, 좌파 정권을 도저히 더 이상은 좌시할 수 없었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은퇴 번복 후 당선 사례를 벤치마킹했든, 출마의 이유를 찾자면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 어쨌든 그는 간단하게는 설명할 수 없는 무수한 번민 끝에 결단했으리라.

 

정치권력만의 판도를 놓고 볼 때는 이회창 씨의 출마가 집권을 눈앞에 둔 듯하던 한나라당이나 보수 세력으로서는 분열의 위기라거나, 약세를 면치 못하던 개혁 세력으로서는 천우신조의 기회라거나, 그런 의미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국가 전체와 장래를 놓고 볼 때는 그런 판단이나 분석이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의 출마가 우리 사회에서 또 한 번 신의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결정적으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정당의 후보 경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선거전이 가열되고 있는 마당에 이명박 후보의 북한에 의한 암살 가능성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스페어 후보론'을 슬쩍 흘려보고는 지지자들의 반응이 의외로 뜨겁자 출마를 결행했다. 이것을 좋게 보는 쪽에서는 고상하게 구국의 결단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나쁘게 보는 쪽에서는 뒤통수를 치고 신의를 저버렸다고밖에 어찌 다른 말을 하겠는가.

 

우리는 정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신의를 버리는 모습을 너무나 쉽게 그리고 자주 본다. 국민과 국가보다는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하고, 경솔한 처신으로 실망을 안겨준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니 "선거란 훌륭한 분을 뽑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조금 덜 나쁜 놈을 뽑는 것"이라는 말이 나왔을 터이다.

 

오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대선 출마 선언을 접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어른이란 어떤 사람인가, 과연 어른이 계시는가 하는 의문을 갖는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의 헛기침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한낱 무지렁이 농사꾼이었으되 자식들에게 부끄러움이 없었으며, 자식들이 엇나가는 기미가 보이면 다만 헛기침만으로도 타이르고 경계해 바로 잡아주는 '어른'이셨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 특히 누구보다 모범이 되고 진중해야할 정치가들이 너무 쉽게 말을 바꾸고 너무 가볍게 행동을 한다. 그들의 헛기침에는 권위가 아닌 거만이 가득하다. 어떤 정치인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해도 코웃음이 먼저 나와버리는 이 시대의 비극은 정치가들 스스로가 초래한 자업자득이다.

 

오늘을 살아감에 있어 신의를 지키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신의를 버리라는 유혹은 도처에 널려있음을 잘 안다. 신의는 지키기 힘든 것이기에 그만큼 가치있는 것이다. 신의를 버리면 존경을 잃고, 존경이 사라지면 나이를 먹었거나 지위가 높아도 어른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으면 아이들은 누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몽당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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