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색하고 하는 말

아버지, 2007년의 부끄러운 이름

몽당연필62 2007. 11. 19. 20:59

2007년, 우리 아버지들은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그리고 아버지인 우리 자신들에게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아들 보복폭행이 그랬고,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위장전입 및 자녀 위장취업이 그랬으며, 김포외국어고등학교의 입학시험 문제지 유출 사건이 그랬다.

 

문제는 이들 사건이 사회적으로 좋은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영향을 주고, '아버지'라는 이름을 부끄럽게 했다는 점이다. 김승연 회장은 얻어맞은 아들을 대신해 가해자들을 폭행한 경우이고, 이명박 후보는 사랑하는 자녀의 교육과 금전 융통에 도움을 주고자 법을 어긴 경우이다. 또 김포외고 교사와 학원 원장은 시험문제를 빼돌림으로써 우리 사회와 영문모르는 자녀들에게 극도의 불신과 배신감 그리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법과 원칙, 정의가 중요하다고 배우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한다. 아량과 용서, 공정한 경쟁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의 소중한 덕목이라고 외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했는가. 가진 자들은 재물과 권력의 위력을 유감없이 밝휘했고, 자녀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법과 원칙을 여지없이 짓밟았다. 시험문제 유출에 이르러서는 우리 사회에 과연 공정한 경쟁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는가 하는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우리 사회는 지금 서서히 병들어가고 있다. 아니 어쩌면 아주 급격히 무너져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법, 원칙, 정의, 질서, 공정과 같은 좋은 말들이 속속 사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누구보다도 이 말들을 귀하게 여기고 준수해야할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철없는' 아버지들이 앞장서서 '모범'을 보인 결과다.

 

이제 누가 아이들에게, 나아가 국민에게, 입바른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기업가가 타락하고, 정치인이 부패하고, 교육자가 부정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러한 타락이나 부패 그리고 부정이 국민에게 내성을 길러줘 어지간한 잘못은 잘못으로 여겨지지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법을 지키면 바보고 못난이며 지킬수록 손해라는 생각이 들도록 나를 포함한 아버지들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제 나는 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모범을 보일 것인가. 부끄럽고 미안하게도 나는 내 아이가 밖에서 얻어맞고 들어와도 한달음에 내쳐서 보복해줄 힘이 없다. 주소지를 거짓으로 옮겨놓고 좋은 학교에 보낼 배짱이 없으며, 용돈벌이 하라고 일자리를 만들어줄 능력도 없다. 시험에 쉽게 합격할 수 있도록 문제지를 구해주기는커녕 하기 싫고 힘든 공부를 더욱 강요할 뿐이다. 정말 무능한 아버지의 대명사인 셈이다.

 

애들이 언젠가부터 나를 부를 때 '아빠' 대신 '아버지'라고 하는 경우가 늘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빠가 아버지로 된 것은 애들이 그만큼 자랐다는 의미일 터이다. 몇 년 전 아버지라는 호칭을 처음 들었을 때의 당혹감만큼은 아니지만, 나는 요즘 이 아버지라는 호칭이 다시 낯설고 어색하다. 그리고 때로는 아버지라 불리는 것이 두렵고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아버지인 나는 제법 철이 든 내 아이들에게 법과 질서는 지킬수록 서로가 편리한 것이며 우리 사회에 정의가 살아있다고 가르치려 한다. 원칙을 지키고 공정하게 경쟁하며 착하게 사는 것이 결국 승리하는 지름길이라고 말하려 한다. 가난하고 무능해서 미안하고 부끄러운 이 아버지의 고약한 입장을 모면하기 위하여...

 

/몽당연필/

Daum 블로거뉴스
고개가 끄덕여진다면 추천 한 표! ^^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