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에서 쓰는 글

‘식량안보는 미신’이라는 박병원 경총 회장님께

몽당연필62 2016. 11. 4. 17:36

경쟁력이 생명인 시대에, 우리 쌀은 경쟁력이 약해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쌀은 단순한 식량이 아니라 우리 농경문화의 결정체입니다. 이 쌀을 마음대로 구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자존심도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잃게 될 것입니다.

 

 

식량안보는 미신이라는 박병원 경총 회장님께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님!

며칠 전 <문화일보>에 실린 쌀 과잉, 더 이상 미봉할 일 아니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봤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쌀 문제 때문에 농업계는 물론 국가적으로 골치가 아픈 참인데, ‘경제 5단체에 포함되는 경총이 농민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쌀 소비 촉진 운동이라도 전개한다는 것인가 하는 기대로 칼럼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내용은 뜬금없더군요. 게다가 칼럼 곳곳에서 드러나는 회장님의 농업관에 많이 서운했습니다.

칼럼의 결말은 경쟁력 있는 농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것은 농업을 포기하자는 말씀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식량안보라는 미신부터 타파해야 한다는 주장에 아연실색했습니다. “식량안보를 위해서는 식량을 사 먹을 수 있는 달러를 확보하면 되는 것이지, 우리가 직접 생산해야만 하는 게 아니다라는 부연도 마뜩잖았고요. “굳이 우리 손으로 우리가 먹을 쌀을 확보하고 싶으면 아열대 지방에 가서 싼 땅을 빌려서 생산할 일이다라는 말씀 역시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2015년 곡물수요량의 76.2%를 수입에 의존

 

회장님!

복잡하게 말할 것 없이, 안보는 안전을 보장하는 것 아닌가요? 6·25전쟁 이후 이 땅에 60여년 동안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지만 해마다 막대한 군비를 들여 국방을 강화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죠. 식량안보도 다르지 않습니다. 돈만 있으면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의 식량을 아무 제약 없이 공급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먹을 것 천지인 시대에 살고 있지만, 정작 조금만 살펴보면 곡물 수급 구조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사실상 밀농사는 사라져버렸고, 콩과 옥수수농사도 크게 위축됐지요. 겨우 쌀만 자급하는 실정입니다. 그 결과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의 곡물자급률은 23.8%에 불과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곡물 수요량의 무려 76.2%를 외국에서 사온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곡물 수출국에 흉년이 들거나, 전쟁이 발발하거나, 우리나라와의 외교적 마찰이 생기거나 등등의 이유로 곡물을 내줄 수 없는 상황이 언제까지나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모르는 일입니다. 화물선에 곡물을 가득 싣더라도 국내에 입항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초대형 컨테이너 수송선들이 항구에 닻도 못 내리고 바다 위를 떠도는 사태를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상상이나 했던가요?

 

국민의 주식인 쌀만은 자급 기반 유지해야

 

쌀값이 떨어질수록 직접지불금 명목으로 국가재정을 더 많이 투입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쌀값이 20년보다 더 전 수준으로 떨어졌어도 국민들이 갈수록 쌀을 덜 잡수시는 것도 현실이고요. 그렇다고 쌀농사 때문에 골머리 앓느니 외국에서 사다 먹으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쌀은 국제시장에서의 교역량이 비교적 적고, 그 때문에 생산량에 따라 가격 변화가 크며, 국제 곡물메이저들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도 못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잖습니까.

우리나라의 정보통신기술(IT), 철강, 반도체, 자동차, 전자제품, 건설, 나아가 문화 한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소중한 경쟁력이고 자부심이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언제까지나 우리의 미래를 책임져주지는 않을 겁니다. 조선과 해운 사태에서 보듯 경제와 경기는 매우 유동적이니까요. 그리고 사실 이러한 분야의 발전을 위해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과 지속적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따라 우리 농업은 비농업계에서 주장하는 경쟁력이라는 칼에 이미 많은 것을 양보하고 희생했으며 지금 벼랑으로 내몰려 있습니다.

저도 비교우위론을 어깨너머로나마 배웠고 자유무역의 장점도 이해합니다만, 먹을거리만큼은 아니 최소한 국민의 주식만큼은 이 땅에서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장과 건물을 짓기 위해 한번 논밭을 파헤치거나 시멘트로 발라버리면, 그 땅은 다시 농지로 환원하기가 매우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쌀 생산을 줄이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논의 형상은 유지함으로써 필요한 경우 농지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정책을 펼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쌀이 계속 남아돌더라도 저는 정치하시는 분들이 조금만 마음을 열면 그것을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쌀을 북한에 주자고 하면 군량미로 사용할 것이 뻔한데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시는 분들 계실 텐데요, 쌀을 그냥 주지 말고 그쪽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쌀값으로 받는 겁니다. , 지금이야 쌀이 남아돈다고 난리지만, 만약에 통일이 되거나 북한 주민들과 함께 먹어야 한다면 쌀이 오히려 부족하다는 건 회장님께서도 알고 계시지요?

우리 속담에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습니다. ‘사흘 굶어 담장 안 넘을 사람 없다는 말도 있고요. 인간의 품위 있는 생존에, 아니 생존 그 자체에 식량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식량 문제에 국제적으로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세계 어느 나라가 우리의 굶주림을 해결해줄까요? 아무리 달러를 쌓아놓아도 쌀 아닌 지폐를 먹어 배를 채울 수 없으며, 외국의 기름진 땅이 우리의 다랑논을 대신해주지 못합니다.

 

경총-농협, 도농 어려움 치유하는 병원 됐으면

 

존경하는 박병원 회장님!

저는 오랜 경륜과 혜안으로 국가 발전에 기여해 오신 회장님께서 식량안보라는 미신부터 타파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타파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나라는 쌀 생산비가 비싸니 다른 나라 땅에서 싸게 쌀농사를 지어오자는 생각을 거둬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FTA로 얻은 기업 이익 중 일부를 피해를 본 분야에 나눠주는 무역이득공유제는 차치하고, 기왕에 합의된 농어촌 상생기금이라도 차질없이 조성되도록 힘을 모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 내놓을 것도 없는 농민들을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시기를 앙망합니다.

차제에, 박병원 회장님! 조금 유치한 발상입니다만, 마침 농민들의 대표라 할 농협중앙회의 회장님도 성함이 김병원입니다. 경총과 농협의 두 병원회장님께서 양 조직을 활용해 임직원과 농민, 나아가 대한민국 발전에 의미 있는 협력사업을 해 보시는 것은 어떨지 감히 말씀드려봅니다. 경총 회원기업이 400개 가깝고, 농협도 임직원 10만 명에 농가인구가 250만 명쯤 되니, 두 조직이 잘 어우러지면 어마어마한 시너지를 발휘해 우리 사회의 어려움을 치유하는 병원이 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만.

아무쪼록 박병원 회장님과 경총 가족 모두가 쌀밥 맛나게 드셔서 요즘 김영란법때문에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농민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밥심으로 열심히 일하셔서 우리 산업과 국가 발전에도 더 크게 기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농민들에게는 더 품질 좋고 맛있는 쌀을 생산해 국민의 식탁을 책임지자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사용자와 노동자, 도시와 농촌, 대한민국 화이팅입니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