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에서 쓰는 글

풍년이라 더 허기지는 농민들의 애잔한 가을

몽당연필62 2016. 9. 30. 18:43

과거 추곡수매장은 한바탕 잔치판과 같았다. 농민들은 저마다 '일등'을 받기 위해 애썼고, 모처럼 목돈을 쥐면 현장에서 곧바로 조합 농자금을 제하기도 했지만 아이들 학비와 가용에 쓸 꿈에 부풀었다. 사진은 1970년대의 공판(추곡수매) 모습이다. <농민신문사 자료사진>

 

풍년이라 더 허기지는 농민들의 애잔한 가을

 

나날이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들녘을 바라보노라면 먹지 않아도 배부른 시절이 있었지요. 낭창낭창한 벼 모개를 보면, 자식들 학비를 해주고 조합 농자금을 갚으며 가용도 여유가 생길 만큼 돈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가슴 벅차던 시절이 있었지요.

다시 가을이 왔네요. 하지만 이 가을은 풍년가를 부르며 벼포기와 낫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가던 그 시절의 가을이 아닙니다. 도열병도 멸구도 안 먹고 짱짱하게 서서 통실통실 여문 나락이 대견하게 생각되다가도, 풍년가 대신 한숨소리로 들녘을 가득 채우는 가을이죠. 쌀값이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고 나라 곡간에 쟁여둘 자리도 부족하다는데, 그렇다고 나락가을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쌀값 3년간 24% 하락, 21년 전 가격

925일 산지쌀값은 80기준 133436원으로 지난해 같은 날짜의 159196원에 비해 25760(16.2%) 하락했습니다. 이 가격은 같은 날짜 기준으로 2014(166184)에 비해서는 32748(19.7%), 2013(175092)에 비해서는 무려 41656(23.8%)이나 떨어진 것이며, 21년 전인 1995년의 일반미 1등 수매가격 132680원과 비슷한 수준이지요.

쌀농가에 변동직불금이라는 완충장치가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쌀값 하락은 농가의 소득 감소를 불러옵니다. 예를 들어 2016년산 쌀의 경우 정부의 목표가격대로라면 농가가 1(3000) 기준으로 고정직불금 100만원을 포함해 평균 12844000원의 수입을 올려야 하는데, 쌀 수확기(10~내년 1) 가격이 평균 135000원에 형성된다고 가정할 경우 농가는 쌀값 8505000원에 고정직불금 100만원과 변동직불금 1838150원을 합쳐 11343150원의 수입밖에 못 올리게 되는 거죠. 상당수의 국민이 농민은 쌀값이 떨어져도 직불금으로 만회가 된다고 오해하는데, 사실은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이렇게 해마다 농가 수취값이 떨어지고 인건비를 비롯한 생산비는 증가함으로써 쌀농사의 수지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습니다. 농업소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쌀과 여타 농산물의 전반적인 가격 약세는 필연적으로 농가경제 피폐와 함께 도시근로자가구와의 소득격차를 불러오죠.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5년 기준 한 해 농축산물 판매액이 1000만원에 못 미치는 농가의 45.2%는 벼 재배 위주의 농가였습니다. 또 농가소득은 2000년 도시근로자가구소득의 80.6% 수준이었으나 201461.5% 수준으로 내려앉았고요.

 

올해도 40t 초과생산…정부의 특단대책 필요

힘들게 농사를 지어 풍년이 와도 반갑지 않은 것은 이제 당연한 일이 돼버렸습니다. 오죽하면 농민들이 태풍이 와서 나락 좀 적당히 자빠뜨려줬으면하는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고, 서울까지 와서 쌀값 보장하라며 시위를 하겠습니까.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면 태풍 운운하는 이 말은 농민의 말이 아니라 쌀값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픈 양정당국 공무원들의 속마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서울로 올라와 쌀값 보장을 요구하던 백남기 농민은 쓰러진 지 317일 만인 9월25일 정부의 철저한 외면 속에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참담하고 또 참담한 일입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929일 발표한 올해 쌀 예상 생산량은 420t 안팎으로 우리 국민의 연간 신곡 적정 수요량 380t보다 40t가량 많다는군요. 산지 유통전문가들은 이 초과 물량에 남아도는 구곡 5t을 합쳐 45t을 최대한 빨리 시장에서 격리해야 쌀값 안정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마침 농협이 9월29일 180만t의 쌀을 사들이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농협 역사상 가장 많은 물량일 뿐만 아니라 올해 예상 생산량 420만t의 43%에 육박하는 물량이라고 합니다. 농협의 미곡종합처리장(흔히 'RPC'라고 하죠)들 역시 쌀값 하락으로 적자경영에 허덕이고 있는데 어려운 결정을 한 것 같습니다. 더구나 정부보다 먼저 수확기 쌀 수급안정과 가격지지를 위해 나선 점도 높이 평가해줄 만합니다.

정부 역시 서둘러야 합니다. 쌀 문제를 이대로 방치하면 안됩니다. 정부는 최대한 빨리, 그리고 최대한 많은 물량의 쌀을 수매해 시장에서 빼내야 할 것입니다. 지난해 연간 수요량보다 357000t이 초과 생산됐는데 격리가 제때에 안돼 효과가 미미했던 경험을 했었으니까요.

우리 경제와 문화의 근간인 쌀의 위기는 곧 우리 농업의 위기이고 농촌의 위기이며 국가의 위기입니다. 쌀이 애물단지나 천덕꾸러기가 신세가 돼선 안되겠죠. 누구도 반기지 않는 풍년이어서 오히려 서러운, 애잔한 가을이 깊어갑니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