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에서 쓰는 글

떡국, 압제에도 이어져온 애틋한 우리 음식

몽당연필62 2013. 2. 5. 17:57

떡국, 압제에도 이어져온 애틋한 우리 음식

 

우리에게는 예부터 즐겨온 독특한 세시(歲時) 음식이 있다. 정월대보름에는 오곡밥을, 추석에는 송편을, 동지에는 팥죽을 빼놓지 않는다. 물론 이밖에도 명절마다 절기마다 먹는 음식이 많다. 떡국 역시 설날에 먹는 대표적인 세시 음식이다. 그런데 이 떡국은 단순한 명절 음식이 아니라, 외세의 압제에도 맥이 끊어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왔기에 더욱 애틋한 우리의 음식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설날이면 누구나, 당연히, 아무도 강요하지 않지만 하얀 떡국을 먹는다. 오죽하면 해가 바뀌면 당연히 먹는 나이마저도 떡국을 먹어야 먹는다 하고, 몇 살인지를 물을 때도 떡국 몇 그릇 먹었냐고 할까. 떡국은 설날, 곧 새해를 시작하는 날의 상징 음식인 것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떡국을 먹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조선 후기에 발간된 동국세시기열양세시기등 연중 행사와 풍습을 담은 책들에 떡국이 언급되어 있고, 육당 최남선도 조선상식문답에서 설날에 떡국을 먹는 풍속은 매우 오래됐으며 상고시대 이래 신년 제사 때 먹던 음복(飮福) 음식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했다니, 이로 미루어 그 오랜 역사를 짐작할 따름이다.

 

일제 때 가래떡 못 뽑게 떡방앗간 강제 휴업 명령

 

설날에 떡국을 끓이는 풍습에 대해 최남선은 새해를 흰색 음식으로 시작함으로써 천지만물의 부활신생을 소망하는 종교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또 떡국의 원료인 가래떡이 희고 긴 것은 순수(純粹)와 장수(長壽)를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다. 어쨌든 떡국은 흰옷을 즐겨 입었던 우리 민족에게 가장 부합하는 음식이었던 셈이다.

해해년년 설날마다 우리와 함께해온 떡국이 사라질 위기를 맞기도 했다고 한다. 바로 일제 강점기 때다. 농촌드라마 전원일기의 초창기 극작가이며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과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지냈던 고 차범석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일제는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해 음력설을 폐지하고 양력설을 강요하면서 설날을 전후해 떡방앗간에 휴업을 명령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앗간들이 문을 닫았는데도 민초들은 어떻게든 가래떡을 뽑아 설날이면 하얀 떡국을 끓이고 차례를 지냈다고 하니, 설날과 떡국은 일본의 폭압에서도 지켜낸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통이요 문화라 아니할 수 없다.

떡국은 이렇듯 우리 민족이 몸과 마음을 삼가며 한 해를 시작하는 날에 먹는 상서로운 음식이었으니 떡국 혹은 떡과 관련된 이야기도 적지 않다.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 사용하는 것을 이르는 속담 꿩 대신 닭이 대표적인 경우. 떡국은 원래 흰떡과 함께 쇠고기나 꿩고기를 넣어 끓이는데, 쇠고기는 비싸서 엄두를 못 내고, 꿩은 야생 조류라 잡기가 힘들어 대신 닭고기를 이용하면서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이 생겼다는 것이다.

떡국이 농간한다는 속담도 재미있다. 이 말은 비록 재질이 부족한 사람도 오랜 경험으로 일을 잘 감당하고 처리해 나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곧 떡국을 연륜에 빗대며 나이 든 사람을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존중과 경계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명필 한석봉의 어머니가 공부를 하다 집에 다니러 온 아들 석봉에게 불을 끄고는 글씨를 쓰게 하면서 썰었던 떡도 가래떡이 아니었을까. 밖에 나가 큰맘 먹고 공부하는 사람이 집에 돌아온 이유는 명절을 맞아서였을 것이고, 인절미나 백설기는 어둠 속에서 고르고 똑바르게 썰기가 어려우니 떡 써는 실력을 보이기에는 가래떡보다 좋은 것도 없었을 터이다.

 

떡국은 우리의 역사이자 미래이며 자존심

 

이 떡국이 먹을 것 많은 요즘에 이르러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갈수록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설날이 아니어도 언제든 먹을 수 있는 일반 음식으로 진화한 것이다. 어지간한 분식집치고 떡국을 팔지 않는 집이 없다. 떡국떡이 들어가는 떡라면과 떡만둣국은 분식집의 필수 메뉴고, 포장마차의 최고 인기 품목도 가래떡으로 만드는 떡볶이다. 세시 음식으로서 이처럼 상시로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게 된 것이 또 있었던가.

나 역시 떡국을 무척 좋아한다. 가래떡을 한입씩 베어먹는 것도 즐겁고, 어머니께서 가래떡을 어슷하게 썰어 커다란 봉지에 담아 보내주시는 떡국떡도 출출한 속을 달래는 데 요긴한 간식거리다. 떡국떡은 냉동실에 넣어두고 때때로 꺼내 먹는데, 특히 여름에는 얼음조각과 함께 씹히는 맛이 어지간한 군것질거리는 저리 가라다. 바싹 마른 떡국떡을 튀밥으로 튀겨 먹는 재미는 또 얼마나 좋은지.

하지만 지금 이 떡국 먹는 재미가 일제의 떡방앗간 강제 휴업령보다 더 큰 위기를 맞고 있는지도 모른다. 떡국의 원료인 쌀이, 그 쌀을 생산하는 농업이, 백척간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피폐 일로에 있는 농촌과 농업이 끝내 붕괴하고 만다면, 그래서 외국에서 들여온 쌀로 가래떡을 뽑고 떡국을 끓인다면, 그것은 이미 떡국이 아니라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무서운 무기다. 생각 없이 농업을 버렸다가는 우리의 얼도 자존심도 모두 잃는 것이다.

이번 설날 떡국을 먹으면서 우리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들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생각해보자. 차범석 선생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설날 아침 식구가 한 자리에 모여 하얀 떡국을 먹는 풍습은 단순한 의식(衣食)의 전시(展示)가 아니다. 그것은 작고 시든 인정을 되살리기 위한 하나의 전초전이다. 백년 천년을 지나도 설날 아침 떡국을 먹는 풍속이 사라지지 않는 이 작은 공동체의 모습에서 나는 새삼 우리의 역사를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몽당연필 / 사진 농민신문사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