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색하고 하는 말

반공포로 출신 김두만 할아버지의 60년 망향가

몽당연필62 2013. 6. 11. 17:44

반공포로 출신 김두만 할아버지의 60년 망향가

 

일주일 뒤인 6월18일은 보통의 사람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그저 그런 초여름의 하루이다. 달력을 보아도 기념일이나 절기 표시가 없으니, 개인적으로 이 날과 특별히 관련이 있지 않은 한 6월18일이 무슨 날인지 모른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6월18일은 우리 현대사에서 그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은, 아직 덜 아문 상처와도 같은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60년 전으로 6.25전쟁이 막바지이던 1953년 6월18일,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남한 내 7개 수용소에 있던 3만 7000여 명의 포로 중 북으로 가기를 거부하는 포로(즉, 반공포로) 2만 7092명을 전격 석방했던 것이다.

그때 석방돼 남한 땅에 자리 잡은 북한 출신 반공포로들 대부분은 60년 세월이 흐르면서 끝내 고향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 사망했고, 생존한 사람들도 언제 눈을 감게 될지 모를 만큼 연로했다. 전라남도 영암에 살고 있으며 올해 82세가 된 김두만 할아버지도 그러한 반공포로의 한 사람이다.

 

인민군과 국군으로 두 번 총을 든 기구한 삶

1932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난 김두만은 만 18세의 소년이던 1950년 단 몇 주 동안의 군사훈련을 받고 인민군으로 전쟁에 투입됐다. 그는 그해 9월 충북 옥천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대대병력 중 운 좋게 살아남은 30여 명의 인민군과 함께 국군에 귀순했다.

귀순임에도 포로수용소에 보내졌던 김두만은 거제를 비롯한 수용소를 전전하다 반공포로 석방 때 북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고 남쪽을 택해 석방됐다. 비록 공산주의 체제가 싫어 남쪽에 남았고 정부에 의해 배정된 영암군의 마을 유지 도움으로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살아갈 일이 막막할 뿐이었다.

소년에서 어느덧 청년으로 장성한 김두만은 결국 다시 군에 입대한다. 인민군으로 죽음의 전쟁터에 끌려나왔던 그가, 휴전이 됐다고는 하지만 언제 전쟁이 다시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번에는 살아가기 위해 국군이 된 것이다. 총부리를 한 번은 남으로, 또 한 번은 고향과 혈육이 있는 북으로 겨눠야 하는 기구한 운명이었다.

군복무를 마친 후 영암으로 돌아온 김두만은 마을 유지의 보살핌으로 1959년 결혼을 했고 농사를 지으며 정착할 수 있었다. 이후 5남매의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흐르는 세월과 함께 억센 함경도 말투가 전라도 사람들의 말투를 닮아갔고, 부모형제와 고향을 그리는 마음도 차츰 엷어져 갔다.

 

반공포로 김두만은 남한에 정착해 농민으로서 평범한 일생을 보낸다. <1982년 사진>

 

세월은 무심하게 흘렀다. 넉넉하진 않아도 전답을 장만하고 첫째와 둘째 자식은 취직도 해서 사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그리고 자신의 나이가 50을 넘으면서는 고향의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겠거니 하며 명절이면 부모님 신위를 모시고 차례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1983년 6월 마지막날 밤 방송되기 시작한 이산가족 찾기 TV생방송은 김두만의 가슴을 아프게 헤집어놓는다. 전쟁으로 인해 헤어져야 했던 가족들의 울부짖음이 바로 자신의 것이었고, 방송사 건물과 여의도 바닥을 덮은 벽보와 피켓들이 자신의 피맺힌 사연이었다. 김두만도 서울에 사는 큰아들이 방송국 앞에 벽보를 붙이거나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등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고향 인근 출신 몇 사람을 만나게 됐을 뿐 혈육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김두만은 어느덧 환갑이 지나고 칠순을 치렀으며 두 해 전 팔순을 넘겼다. 그 세월 동안 이산가족으로서 상봉을 신청하고 고향방문을 기대했지만 이는 그야말로 희망과 절망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도 북한 가족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으니 상봉단에 뽑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도 1998년 금강산 관광길이 열리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될 때는 금방이라도 고향에 달려가 혹시 생존해계실지도 모르는 부모님과 세 여동생을 만날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기력은 쇠하는데... 남북대화가 희망고문에 그치지 않기를

그러나 현실은 희망의 크기보다도 훨씬 큰 크기로 혹독했다. 북한의 서울 불바다 발언, 핵실험, 금강산 관광객 피격,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등은 김두만의 고향방문 꿈을 무자비하게 박살내곤 했다. 유연하지 못한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도 남북관계를 오히려 후퇴시키곤 했다.

김두만은 이제 그가 살아갈 날이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살아서 고향땅을 밟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몇해 전에는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 몇과 함께 자신들이 죽으면 묻힐 묘지까지 마련해 놓았다. 월출산 기슭에 북녘 고향을 향해 조성된 이 묘역은 이름마저도 '망향의 동산'이다.

 

김두만 할아버지가 나중에 자신이 묻힐 묘 앞에 서 있다.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마련한 이 묘역은 북향을 하고 있으며 이름도 '망향의 동산'이다.

 

김두만 할아버지는 과연 살아서 고향땅을 방문해 혈육에게 자신이 이렇게 살아 있었음을 알릴 수 있을까. 아직도 망향가를 부르고 있는, 이제 몇 남지 않은 반공포로들과 피난민을 비롯한 실향민들에게 통일의 날은 올 것인가. 아니, 통일은 아니더라도 남과 북을 자유롭게 오갈 수라도 있는 날이 오기는 할 것인가.

지난 봄까지만 해도 금방 전쟁이 벌어질 것 같던 이 땅에 다시 남과 북의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많지 않다. 열여덟 소년은 지금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쇠해가는 팔순의 노인이 되었다. 김두만 할아버지는 이번 회담의 성공을 누구보다도 간절히 기원하지만, 회담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한들 그 결실을 생전에 누릴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가 않다.

이번 남북 당국간 회담은 할아버지에게 또 한번의 희망고문에 그칠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대단히 아쉽게도, 김두만 할아버지가 내년에도 그리고 내후년에도 6월18일 반공포로 석방일을 맞을 수 있게 오래도록 건강하시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