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더하기 추억

라디오는 사십년지기 내 친구

몽당연필62 2011. 5. 24. 16:13

라디오는 사십년지기 내 친구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공부를 하고 있거나 청각 장애를 앓고 있는 등 특별한 경우를 빼고, 평소 라디오를 전혀 듣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텔레비전이야 ‘바보상자’라고 하여 시청 안 하기 모임까지 있을 정도이지만, 라디오 청취에 조직적인 ‘안티’가 있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 국민은 거의가 어떻게든 라디오를 듣고 있으며, 라디오에 관한 추억도 몇 개쯤은 갖고 있을 터이다.

 

텔레비전 보면서는 일을 거의 할 수 없지만, 라디오를 들으면서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라디오가 앞으로도 계속 사랑받게 될 이유다. <월간 '전원생활' 사진>

 

집에 라디오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다. 없던 라디오가 새로 생긴 기억이 없으니. 그러니까 우리 집에 라디오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있었거나, 아니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하루의 시작은 늘 아버지께서 들으시는 새벽 일기예보와 함께였다. 아버지는 라디오가 들려주는 기상 개황에 따라 들일을 나가거나 식구들에게 비설거지를 시키셨다. 제 몸보다 더 큰 전지를 고무줄로 묶어 업은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아버지는 무척이나 애지중지하셨다.


아버지가 애지중지하시던 트랜지스터라디오

라디오를 즐겨 듣기 시작한 때는 초등학교 입학을 전후한 1960년대 말이나 1970년대 초부터였을 것이다. 기억이 맞는다면, 당시 아침 학교에 갈 시간쯤에 명랑 드라마 ‘해바라기 가족’이 방송되었고, 낮 시간에는 5분 드라마 ‘김삿갓 북한 방랑기’라는 것이 있었다. ‘김삿갓 북한 방랑기’는 김삿갓이 북한을 둘러보며 “어찌타 북녘 땅은 핏빛으로 물 들었나” 하는 시조 한 수를 읊으며 끝나는 구조였는데, 나중에는 ‘김삿갓 방랑기’로 바뀌어 남한에 대한 내용도 다루게 되었다(지금 생각하면 북한에 대한 내용은 체제 비판, 남한에 대한 내용은 체제 홍보였다). 또 오후 다섯 시 정도에는 어린이 프로로 연속극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무지개 마을’이 방송되었다.

재미있는 프로는 역시 밤 시간에 많이 방송되었다. 네댓 명의 박사들(그들이 진짜 박사였는지는 잘 모르겠다)이 나와 “○○은 ○○이라 푼다”고 하거나 낱말을 거꾸로 말하기 등 게임을 하는 ‘재치 문답’, 지금으로 말하자면 버라이어티 쇼에 해당할 ‘오색의 화원’ 등이 밤이면 즐겨 들었던 프로들이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민요 백일장’이라는 프로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민요 백일장’을 좋아했던 이유는 중간에 김영운-고춘자 콤비가 두세 번씩 들려주는 만담이 너무나 재미있었기 때문이다(고춘자 씨는 장소팔 씨와도 만담 무대에 자주 섰다).

‘전설 따라 삼천리’도 귀를 쫑긋 세우게 했던 프로인데, 여기서는 전국의 재미있는 전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것이 상원사의 종에 머리를 부딪쳐 은혜를 갚은 까치, 다른 남자와 정분이 나 도망간 아내의 나상을 새겨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는 벌을 내린 전등사의 도편수, 쌀이 나오는 구멍을 파자 쌀은 없고 핏물만 쏟아졌다는 욕심쟁이 중 이야기 등이다.


라디오에 사람 들어 있는 거 아니었어?

방송 시간대는 기억나지 않지만 범죄와 수사를 내용으로 하는 드라마 ‘법창 야화’도 재미있게 들었는데, 제1화 ‘강진 갈가리 사건’에서 범인이자 주인공을 맡았던 성우가 영화 ‘괴물’에서 아버지 역으로 나왔던 배우 변희봉 씨였다.

‘세월 따라 노래 따라’를 들으면서는 흘러간 가요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도 ‘눈물 젖은 두만강’이나 ‘목포의 눈물’은 물론이고 ‘인도의 향불’, ‘홍콩 아가씨’, ‘아내의 노래’, ‘번지 없는 주막’, ‘대지의 항구’, ‘향기 품은 군사우편’ 등을 청승맞게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세월 따라 노래 따라’를 열심히 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제1호 애장품인 라디오에 사고를 친 때도 초등학생 때였다. 친구들과 함께 라디오를 듣다가, “이 안에 조그마한 사람들이 들어 있어서 말을 할 것”이라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라디오를 뜯어 확인을 해버린 것이다. 라디오에 사람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문제는 다시 조립을 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어딜 잘못 만졌는지 결국 라디오는 고장이 나버렸고, 내 종아리를 때릴 회초리를 내 손으로 꺾어 아버지께 바쳐야했다.

그런데 라디오를 고장 낸 것은 전화위복이 되었다. 어차피 이리저리 사이클을 돌려도 빨간 눈금이 잘 움직이지 않아 주파수 맞추기가 힘든 고물 라디오였는데, 며칠 뒤 아버지께서 더 크고 음질이 훨씬 뛰어나며 안테나가 길게 뽑히는 라디오를 사오셨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 라디오를 틀어놓고 밤이 깊도록 잎담배도 엮고 종자마늘도 까고 하셨다.


스포츠 중계와 음악 프로에 열광했던 청소년 시절

중학생이 되면서 갑자기 ‘내 라디오’가 생겨버렸다. 직장에 다니던 외삼촌이 군대에 가면서 ‘야전’을 나에게 넘긴 것이다. 야외전축의 가장 큰 용도는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스포츠 중계를 마음껏 듣는 것. 찌글찌글 끓는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음질이 불량했지만, 공을 던졌다 하면 골인시키는 신동파 선수의 농구 경기나 유제두·홍수환 등 복싱선수들의 스트레이트와 어퍼컷에 반항기의 소년은 열광했다.

이 무렵 말레이시아에서는 메르데카컵 축구대회, 태국에서는 킹스컵 축구대회가 열렸는데, 우리나라도 단골로 출전하곤 했다. 이 경기를 중계방송하는 아나운서의 첫 인사는 꼭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였고, 우리나라가 골을 넣거나 승리하면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하며 감격에 겨워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스포츠 중계를 좋아했지만 심취하는 프로가 어느덧 심야 음악 프로로 바뀌어 있었다.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별이 빛나는 밤에’나 ‘밤을 잊은 그대에게’ 등의 프로다. 이 프로들에는 사연을 보내 채택이 되어 방송을 타면 선물이나 원고료를 보내주기도 해서, 무던히도 많은 편지와 엽서들을 보냈었다. 덕분에 원고료 5000원을 우편 소액환으로 받은 적도 있고, 노은이라는 작가의 장편소설집 ‘키 작은 코스모스’를 받은 적도 있었다.


텔레비전으로 멀어진 라디오, 운전하면서 다시 찾다

직장생활을 하게 된 1980년대부터는 라디오도 많은 발전을 하고 유행을 탔다. 대표적인 변화가 AM 일변도에서 AM·FM 겸용 라디오의 보급이었고, 녹음테이프를 넣어 들을 수 있는 카세트 라디오도 쏟아지기 시작했다. 카세트라디오를 구입해서 라디오를 듣다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재빨리 녹음을 하곤 했는데, 왜 그런 노래는 꼭 1절 끝나고 간주 시간에 광고를 내보내거나 노래가 나오는 도중에 방송을 끝내버리는지….

라디오는 크기도 점점 작아지는 변화를 보였다. 카세트 라디오는 주먹 정도의 크기면 충분했고, AM·FM 겸용 라디오는 담뱃갑 크기로 줄어 셔츠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었다. 라디오 크기가 줄어드니 등산을 하면서도 방송을 들을 수 있었고, 특히 프로야구 중계방송을 할 때는 일을 하면서도 귀에 ‘레시바’를 끼고서 듣곤 했다. 젊은층이나 청소년들에게는 ‘마이마이’를 갖는 것이 소망이며 자랑이던 시절이었다.

무척 좋아했고 즐겨 들었던 라디오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은 결혼을 하고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제 라디오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었다. 두 개였던 내 라디오는 애들이 가지고 놀며 고장을 내버렸거나 어디에 처박혔는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런데 아니었다. 라디오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차를 구입하고 운전을 하면서 다시 라디오와 가까워진 것이다. 이제는 예전보다 채널이 비교할 수 없게 많이 늘어 고정적으로 듣는 프로는 없지만, 운전석에 앉으면 CD가 아닌 라디오를 켜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장과 친구는 오래 될수록 좋다고 했던가. 한때 소원했다고는 하나, 라디오는 어느덧 40년 이상을 함께해온 오랜 친구다. 그러니 라디오는 좋은 친구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친구야. 내가 좋아하는 노래 내보낼 때는 끝까지 들려주면 안 되겠니? 쫌!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