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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이 곧 피서였던 ‘그때 그 시절’

몽당연필62 2008. 7. 10. 09:51

생활이 곧 피서였던 ‘그때 그 시절’


한여름입니다. 방마다 선풍기가 돌아가는 것은 말할 것 없고, 에어컨을 빵빵하게 가동해도 더워 죽겠다는 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부터 냉방기를 갖추고 피서를 가며 우아하게 여름을 났던가요. 한 30년 전만 생각해봐도 격세지감이 아닌지요. 이 여름, 덥다고 에어컨 옆에 둥지 틀지 말고, 잠시 어릴 적 추억을 펼쳐 보시지요. 생활 자체가 피서요 더위를 이기는 지혜였던 그 시절을요.


모내기에 이어 애벌 김매기가 끝났고, 마늘과 양파를 다 뽑았습니다. 보리도 모두 베어 탈곡을 했고요. 그래서 마을이 고요하다 못해 적막합니다. 일도 없고 너무 더워 다들 긴장을 풀어버렸나 봅니다.

단오와 하지 무렵 시작된 더위는 유두에 이르러 세상을 가마솥으로 만들었다가 백중을 지나면서 한풀 꺾입니다. 한창 더울 때 어른들은 잠시 일손을 쉬고, 아이들은 방학을 하며, 누렁이도 토방 그늘에 드러누워 마음껏 게으름을 피울 수 있습니다.


어른들의 한여름은 유두에서 백중까지

아버지와 엄마의 손을 떠나지 않던 낫과 호미가 어느 날 부채로 바뀝니다. 진짜 여름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름날의 하루는 어서 일어나라는 엄마의 잔소리보다도 시끄러운 매미 울음에 먼저 눈을 뜨면서 시작됩니다. 세수를 하려고 장독대 옆에 있는 샘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긷노라면, 성급한 땀방울이 아침부터 등줄기에서 미끄럼을 탑니다. 그래도 여름이 싫지 않습니다. 더위를 물리치는 열 가지도 넘는 방법을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요.

아침에 잠시 들에 다녀오신 아버지는 마당가 감나무의 그림자가 짧아지면 윗도리를 벗고 파자마만 입은 채 목침을 베고 방바닥에 누워 부채를 흔들다가 어느 결에 팔을 툭 떨굽니다. 엄마는 샘에서 물을 떠 대야에 붓고 샛노란 참외 몇 덩이를 띄워놓습니다.

하지만 일 없이 한가하다고 한여름 더위가 저절로 잊혀지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그것은 싸워서 물리쳐야 하는 것이거든요. 아니면 뭔가를 열심히 하며 덥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던가요.

한숨 곤하게 자다 깬 아버지는 동각으로 갑니다. 그곳 마당에 가끔 제를 지내고 굿도 하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거든요. 나뭇그늘엔 평상이 놓여있고, 거기에서 어른들은 머리를 맞대고 싸움이 반인 장기를 두거나 ‘새농민’을 읽지요.

그러다 하루는 남자 어른들이 아침나절부터 수박이며 솥단지며 바리바리 챙기더니 한꺼번에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계곡으로 몸보신 하러 간다는데, 해거름에야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 뭐가 그렇게 만족스러운지 표정들이 참 밝습니다. 그런데 왜 그날 저녁부터 뒷집 누렁이는 더 이상 짖지 않는 것일까요.

엄마는 부채를 쥐던 날부터 아랫골 폭포로 물맞이 갈 날을 손꼽았습니다. 동네 아주머니와 할머니들도 모이면 쑥덕거리는 것이 엄마랑 같은 생각인 모양입니다. 이윽고 유둣날, 이번엔 여자 어른들이 수단을 빚는다 모시적삼을 챙긴다 법석이더니 동네를 비웁니다. 물을 맞고 저녁나절 돌아와 “올 여름엔 더위를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엄마의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 예쁜지요.

그리고 그날 밤 엄마와 아버지는 잠을 잊은 채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아무개는 생각보다 가슴이 크더라, 아무개는 속살이 박꽃처럼 희더라, 아무개는 머릿결이 참 곱더라…. 자는 척 하면서도 한 마디를 놓치지 않는데, 어둡기에 망정이지 낮이었으면 빨개진 얼굴을 도리 없이 들켰겠지요. 이 무렵에는 아버지와 엄마가 유별나게 사이가 좋아지니 참 신기한 일입니다.

뉴스에서는 연일 ‘바캉스’라는 말이 나옵니다. 경포대와 해운대가 인산인해라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이즈음 삼촌은 무전여행을 준비합니다. 새로 산 텐트를 배낭에 꾸렸다 풀었다 하고, 여행길에 펜팔을 하는 여자친구를 만날 거라고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삼촌은 텐트에서의 첫날밤을 여지없이 조카들과 함께 마당에서 보내게 되고야 맙니다.

삼촌은 불빛 하나 없는 마당의 텐트에 조카들을 올망졸망 모아놓고 귀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우리나라에 웬 처녀귀신과 도깨비, 꼬리 아홉 달린 여우는 그리도 많은지요. 이야기 한 토막 한 토막마다 오싹 소름이 돋고 쭈뼛 머리카락이 솟아오릅니다. 수박을 많이 먹어서인지 오줌보가 터질 듯한데도 뒷간에 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낮에는 미역감고 밤에는 서리하는 아이들

여름은 역시 우리 개구쟁이들의 계절이지요. 엿장수보다 더 반가운 사람이 찾아오거든요. 넓적한 호박잎이 힘을 잃은 채 축 처지고 해바라기도 잠시 태양을 외면하는 한낮이면, 어디선가 “아이스께~에끼, 하드!” 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소리가 들려오면 엄마는 기다렸듯이 얼른 바가지를 들고 아이스께끼 장수에게 달려갑니다. 너무 차서 김이 모락모락 솟는 아이스께끼를 한입 베어물면 더위가 저만치 도망가버리지요.

동네 앞을 흐르는 개울이나 저수지는 놀이터입니다. 친구들 서넛이 모이면 어느새 우르르 개울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개울가에 이르면 쑥잎 두어 장을 뜯어 조물조물 주물러 귀에 틀어막고는, 준비운동도 없이 첨벙 뛰어듭니다.

개울이 있는데 징검다리가 없을 수 있나요. 미역을 감다 귀에 물이 들어가면 햇빛에 잘 달궈진 징검돌에 귀를 대고 물을 빼내기도 하고, 걸터앉아 몸을 말리기도 합니다.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징검다리를 건너려 할 때는 왜 마음에도 없는 장난기가 그리도 동하는지요. 돌멩이를 던져 물을 튀기고, 손바가지로 물을 끼얹어 기어이 우는 모습을 보고야 맙니다.

개헤엄만으로도 하루 종일 물에 떠있을 수 있지만, 물장난을 하면 유난히 배가 고픕니다. 그러면 덜 여문 완두콩과 다래, 콩밭에 섞여서 자라고 있는 옥수숫대가 깜둥이 악동들에게 여지없이 노략질을 당하지요.

뜨겁기만 하던 해가 열기를 누그러뜨리고 얼굴을 붉히며 서산에 걸릴 때쯤엔 친구 집으로 몰려갑니다. 그곳 사랑채 곁방에는 재미있는 만화책도 많고 ‘어깨동무’나 ‘새소년’ 같은 잡지도 있거든요. 이런저런 책을 뒤적이는데, 한 친구가 음흉하게 씨익 웃으며 눈짓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같은 웃음을 지으며 마치 약속을 했던 것처럼 책을 덮고 일어섭니다.

적당한 어둠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모릅니다. 세상이 언제나 밝은 낮으로만 계속된다면 우리가 감히 잔등 너머 참외밭을 넘볼 수가 없으니까요. 참외밭에는 얄미운 침입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원두막이 세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파수꾼이 아무리 두 눈을 부릅뜨고 귀를 열어놓아도 악동들의 침입을 막기는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또 어쩌다 한 녀석이 잡혀도 장황한 훈계에 꿀밤 몇 대가 고작일 뿐 원두막 아저씨의 손에 들린 낭창낭창한 회초리는 언제나 엄포용으로 끝나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요.

비록 낮 동안 햇빛에 뜨뜻하게 달궈진 것이지만 푸짐하게 서리한 참외를 손바닥으로 쓱쓱 문질러 우적우적 먹으며 웃둠벙으로 향합니다. 웃둠벙은 동네 누나들이 모여 목욕하는 곳이거든요. 우리는 어둠 속에서 별빛만으로도 익숙하게 수풀을 헤치고 둠벙으로 접근합니다. 아, 그곳에는 정말 선녀들이 있습니다. 선녀들은 어린 나무꾼들이 자신들을 훔쳐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보름달보다도 더 하얗게 빛나는 서로의 몸에 물을 끼얹거나 등을 밀어주며 물결에 까르르 웃음소리를 섞어 흘려보냅니다.


온가족이 함께 밥먹고 잠드는 마당과 멍석

아무리 찬물에 발을 담그고 ‘어푸, 어푸’ 숨넘어갈 듯한 소리를 내며 등목을 해도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 없는 계절이 여름입니다.  

그래서 여름에는 식구들이 눅눅한 방안보다는 마당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지요. 비가 오면 질척거려서 고무신에 달라붙는 흙을 떼어내느라 애를 먹기도 하지만, 마당은 여름 동안 쓰임새가 아주 많습니다. 음식도 하고, 밥도 먹고, 잠도 자니까요.

 엄마는 날마다 마당 한쪽에 만든 화덕에 솥단지를 걸어놓고 밥을 합니다. 그러다 이따금 팥죽도 쑤고 수제비도 만듭니다. 그럴 때면 으레 식구들이 멍석을 내다 펴고 밀가루 반죽도 하고 모깃불도 피우며 엄마를 돕지요. 온식구가 둘러앉아 먹는 수제비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입니다. 아버지는 뜨거운 수제비 국물을 후후 불어 마시면서도 “으, 시원하다”를 연발하십니다.

멍석에서 먹는 것은 무엇이든 정말 맛있습니다. 꽁보리밥에 고추장을 비벼도 좋고, 상추에 식은밥을 싸서 된장을 얹어도 그만이지요. 여기에 텃밭에서 따온 오이나 가지가 곁들여지거나 수박이라도 한 덩이 놓일라치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식사가 끝나면 식구들이 멍석에 누워 모깃불이 사그라질 때까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견우와 직녀의 슬픈 전설이 멍석에서 피어나고 달무리가 지면 비가 온다느니, 소쩍새가 울면 풍년이 든다느니 하는 할머니의 말씀도 멍석에서 전해집니다.

큰곰과 작은곰을 찾고 별똥별을 보며 소원을 빌다 어느 결 잠이 들었는데, 오줌이 마려워 눈을 뜨면 누가 안아 옮겼는지 어김없이 방에 누워있습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갑니다. 덩달아 여름도 깊어가고요.


글 : 몽당연필 / 사진 : 월간 ‘전원생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