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가는 길

임실, 의로운 개와 치즈의 고장

몽당연필62 2009. 7. 15. 15:03

임실, 의로운 개와 치즈의 고장


전북 임실은 평범한 농촌 지역이어서 그저 그런 고장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곳이다. 하지만 임실은 알고 보면 문화자원이 풍부하고 경관이 수려해 관광지가 많으며 먹을거리도 다양하다. 호남좌도 농악의 대표 격인 필봉농악, 주인을 구하고 죽은 의로운 개, 네 신선과 네 선녀의 이야기,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 댐인 섬진강댐, 국산 치즈가 처음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곳 등 임실의 자랑거리는 열매처럼 주렁주렁 열려 있다. 


임실(任實)군은 전라북도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597㎢의 면적에 1읍 11면의 행정구역으로 이뤄져 있다. 도청이 있는 전주까지 30㎞가 채 되지 않는 데다 전라선 철도가 놓여 교통도 편리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농촌 지역이 그러하듯이 임실도 주민 수 감소라는 현실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1966년 12만 명에 가까웠던 인구가 지금은 3만 명을 겨우 넘는 정도인 것이다.


주인을 구한 개, 신선과 선녀… 이야기가 있는 고장  

이러한 겉모습만 보면 임실을 평범한 농촌 지역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막상 임실을 둘러보면 그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게 된다. 곳곳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문화와 관광자원으로서 역할을 훌륭하게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풍광 또한 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주인을 구하고 죽은 의로운 개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있을까. 이 의견(義犬)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 임실 땅인 것이다. 약 천년 전 지사면 영천리에 김개인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가 기르는 개는 주인을 그림자처럼 따랐다. 어느 날 김개인이 오수면 오수리에 다니러 갔다가 들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마침 불이 나 죽을 위험에 처했다. 그러자 개가 자신의 몸에 물을 적셔 불을 끄고 주인의 목숨을 구한 뒤 죽었다. 잠에서 깬 뒤 이 사실을 안 김개인이 개의 넋을 기리기 위해 개가 죽은 자리에 지팡이를 꽂자 지팡이에서 잎이 나오고 큰 나무가 되었다. 이에 개가 죽은 마을을 개 오(獒)자와 나무 수(樹)자를 써서 오수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오수리 원동산에는 의견비와 의견상(↑)이 세워져 있고 인근에 의견공원(↓)도 조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또 영천리에는 김개인의 생가를 만들어 전설을 사실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관촌면 덕천리 일원의 사선대(四仙臺) 관광지도 지역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관광지 겸 주민들의 휴식 공간이 되고 있는 곳이다. 오원천 물길이 휘감아 도는 사선대 관광지에는 이곳 경치가 얼마나 아름답던지 이천년 전 하늘에서 신선과 선녀 네 쌍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봄의 벚꽃, 여름의 물놀이, 가을의 단풍, 겨울의 스케이트 등 사계절 즐길거리가 있는 사선대 관광지에는 여러 나라 조각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조각공원과 인조잔디가 깔린 축구장, 청소년들에게 각종 놀이와 체험 기회를 제공하는 청소년수련관도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10월 초순 소충사선문화제가 열려 전국 농악 경연대회와 궁도대회, 사선녀 선발대회 등 다채로운 행사를 통해 전통문화가 계승된다. 사선대를 감싸고 있는 야트막한 산자락 위에는 운서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운서정은 일제 때 우국지사들이 모여 한을 달래곤 했다는 사선대의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다.


숙연한 마음으로 충절과 호국의 의미 되새기는 땅  

우국지사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 땅과 겨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이야기와 흔적도 더듬어봐야겠다.

성수면 삼봉리에 가면 이석용(李錫庸) 생가라는 초가집(↓)이 있다. 한말의 의병장이었던 이석용(1878~1914) 선생의 유적지이다. 이석용은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의병활동에 결코 작지 않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1907년 진안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고창의 일본 병참기지를 습격하고 진안의 우편취급소를 파괴했다. 이듬해 호남창의진(湖南倡義陣)의 대장으로 추대되어 남원·전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접전하여 많은 타격을 주었으며 진안읍을 점령하기도 했다. 일본군의 토벌작전으로 임실에서 패하자 창의진을 해산하였고, 1911년 4월에는 밀사를 일본으로 파견해 일왕을 주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석용은 1913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이듬해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성수면 오봉리의 소충사(↑)는 이석용 의병장과 그의 휘하에서 활동하다 순국한 28의사를 배향한 사당이다. 소충사 경내에는 1957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조의단(弔義壇) 28의사 추념문’을 친필로 받아 새긴 비가 있다.  

강진면 백련리의 국립임실호국원(↑)은 6월이면 특히 숙연한 마음으로 찾게 되는 호국용사 묘지이다. 임실호국원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신명을 바친 호국용사들의 위훈을 추앙하기 위해 2001년 호국용사 묘지로 건립되었는데 2006년 국립으로 승격한 충의시설이다. 현충탑과 현충관, 각종 조형물과 부대시설 등이 설치된 이곳에는 국가유공자 1247위, 6·25 참전군인 5398위, 베트남 참전군인 1179위 등 모두 8600여 위가 영면하고 있다.  

한편 충의나 호국과 다소 거리가 있지만 오수면 오수리의 망루(↑)는 우리 근대사에서 의미가 있는 건축물로 꼽힌다. 오수리 번화가 도로변에 서 있는 하부 직경 2.4m, 높이 12m의 오수 망루는 일제 때인 1940년경 주민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주변 지역의 산불 감시와 야간 통행금지를 알리는 수단 등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특히 6·25전쟁을 전후해서는 북한군의 기습과 빨치산 출몰에 대비하는 경계초소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원통형 기둥 위에 설치한 육각형의 망대 구조가 간결하고 인상적이어서 2005년 등록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국산 치즈, 농악, 다목적댐 등 농업 발전에 기여한 곳

임실은 준산간지대로서 농토가 그리 넓은 편이 아니지만(경지율 약 19%) 우리 농업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의미 있는 고장이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치즈가 처음 생산되기 시작한 곳일 뿐만 아니라 호남좌도 농악의 대표 격인 필봉농악이 전수되고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 댐으로서 홍수 방지 등의 기능을 하는 섬진강댐이 있는 것이다.

치즈 하면 유럽에서 모두 수입하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기 쉬운데, 우리나라에서도 치즈가 생산되고 있고 특히 임실은 우리나라 치즈 산업의 메카이다. 1959년 벨기에에서 파견되어 부안성당을 거쳐 임실성당 주임신부로 있던 지정환 신부가 1967년 최초의 치즈 공장을 세우면서 국산 치즈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임실은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더욱 발전시켜 임실읍 금성리를 치즈 마을(↑)로, 관촌면 덕천리를 치즈 체험장으로, 강진면 옥정리를 치즈피자 마을로 특화해 치즈 만들기와 산양 젖 짜기 등 다양한 농촌체험 프로그램들을 적용하고 있다. 또 임실읍 갈마리에는 낙농인들이 결성한 임실치즈 농협(↓)이 있어 우리 입맛에 맞는 치즈 개발과 보급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강진면 필봉리에 전승되고 있는 필봉농악도 임실이 자랑하는 농업 관련 문화유산이다. 호남좌도 농악인 필봉농악은 쇠가락(농악의 대표 격인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 씩씩하며, 개개인의 기교보다 단체의 화합과 단결을 중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전수관(↓)이 마련되어 원형을 계승하고 있다. 호남좌도란 서울에서 볼 때 호남지방의 왼쪽, 즉 임실처럼 전남북의 동쪽에 속하는 지역들을 일컫는다.  

 

한편 필봉리와 가까운 덕치면 사곡리 초입에는 남근석(↑) 하나가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전체 높이가 2m, 둘레가 1m 정도인 이 남근석은 정확한 건립 연대를 알 수 없으나, 농경사회에서 남근석을 세우는 이유 중 하나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이니 이 또한 농업과 관련이 있는 유산이라 할 것이다.

1965년 임실군 강진면 용수리와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사이 섬진강을 가로막아 쌓은 섬진강댐(↓)은 농업은 물론 임실의 관광산업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섬진강댐은 1965년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 댐으로 길이 344m, 높이 64m이며 총저수량이 4억 6600만 t에 이른다.  

섬진강댐이 건설됨으로써 임실과 정읍 등지의 상수원이 안정적으로 확보되었고 김제·부안 지역에서는 농업용수와 칠보수력발전소의 발전용수를, 섬진강 중·하류 지역에서는 홍수 방지 효과를 얻게 되었다. 게다가 댐에 물이 차면서 형성된 옥정호수는 물이 매우 맑을 뿐만 아니라 호수를 끼고 도는 드라이브 코스가 환상적이어서 관광객들을 불러들이는 자원이 되었다.

사람은 겪어봐야 속을 알고 음식은 먹어봐야 맛을 안다고 했던가. 평범한 농촌지역이라고 생각했던 임실은 직접 찾아가 보니 자랑거리들이 열매처럼 알알이 맺힌 고장이었다. 하기야 임실의 ‘실’이 이유도 없이 열매 실(實)이겠는가.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