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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의 추억은 까끄라기처럼 달라붙는다

몽당연필62 2008. 5. 13. 13:47

 보리의 추억은 까끄라기처럼 달라붙는다

 

한 달에 두어 번은 보리밥을 먹는다. 야근을 할 때 동료들과 회사 가까이에 있는 보리밥집에 가기도 하고, 휴일에 식구들과 함께 동네의 보리밥집을 찾기도 한다. 꽁보리밥인 것은 마찬가지이되 간장 종지 하나 달랑 놓고 먹던 예전과 달리 반찬을 갖추어 먹으니, 요즘 보리밥은 흔히 하는 말로 ‘목 넘김’이 부드럽다. 하지만 때로는 보리와 함께 자라던 시절의 기억이 까끄라기처럼 목에 탁 걸려오는 것을 동료나 처자가 알기나 할까.


 

보리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자란 동네가 논보다는 밭이 많았기에 가을이면 집집마다 밭에 보리를 심었고, 논이라 해서 나락만 심으며 놀리는 집은 거의 없었다. 부모가 농사를 지으면 그 집 아이들도 반 농사꾼이게 마련이어서, 우리도 함께 보리를 심고, 베고, 탈곡을 하며 자랄 수밖에 없었다.

보리는 가을에, 그러니까 콩·고구마·조·참깨 따위의 수확이 끝난 밭이나 벼를 베어낸 논에 파종한다. 쟁기질을 하여 낸 고랑의 흙덩이를 쇠스랑으로 잘게 부숴 다듬고, 퇴비와 금비를 넣은 뒤 종자를 뿌리고, 두둑의 흙을 다시 쇠스랑으로 헤집어 덮으면 파종 끝. 보리농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찬바람이 돌고 보리 싹이 어느 정도 자라면 어머니가 바빠진다. 덩달아 풀도 함께 자라 애벌매기를 해야 하기에 밭농사 많은 집 아낙은 허리 펼 날이 없었다. 그래도 진짜 밭 매느라 바쁜 시기는 초봄이다. 해동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맵기만 한데, 어머니는 이웃 아주머니들과 예닐곱이서 품앗이를 다녔다. 동창이 밝자마자, 노고지리가 우지지든 말든 호미를 챙겨들고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매러 나가시곤 했다.

 

 

어머니가 밭에서 돌아오시면 밥상엔 어김없이 보릿국이 올랐다. 어린 보리를 뽑아와 넣고 된장을 풀어 끓인 것이 쌉싸래하면서도 구수했다. 때로는 호박범벅에 파릇한 보리를 넣기도 했다. 보리는 푸성귀가 나오기 전에 비타민을 공급해주는 싱싱한 영양 공급원이었던 것이다.

겨울이 따뜻한 해에는 보리가 웃자라서 보리밟기를 하는 것도 하나의 일이었다. 보리밟기는 보리가 너무 일찍 자라는 것을 막고 뿌리 부분의 들뜬 흙을 다져 보습성을 높여주는 작업. 식구들 모두가 나서서 밭고랑을 밟기도 했고,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동원해 기차놀이처럼 긴 행렬을 이뤄 밟게 하기도 했다.

포근하던 햇살이 따갑게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 보리는 어른 허벅지만큼 자란다. 이 무렵엔 논이 있는 집에선 못자리 준비로 부산을 떨기도 하지만 아직은 그래도 정신 못 차릴 만큼 바쁜 때가 아니어서 혼사를 치르기도 했다. 그런데 혼례식에서 신부가 웃으면 딸을 낳는다고도 하고 보리 풍년이 든다고도 하는데 그 연유가 무엇인지….

소에게 먹일 꼴을 베러 동네 어귀를 벗어나 한적한 보리밭둑에서 마땅한 풀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바람도 불지 않건만 보리밭 한가운데에서 문득 일렁이는 게 느껴진다. 군데군데 보리들이 짓뭉개진 곳도 있다. 지나가던 이웃집 아저씨가 그것을 보고는 짐짓 헛기침하며 “뉘 집 딸년 등짝에 보릿물 들었겄네!” 하며 눈을 찡긋해 보인다.

이윽고 이삭이 패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보릿대 윗동을 뽑아 만들어 부는 보리피리 소리가 들리고, 그 이삭이 여물어가면 개구쟁이들이 보리에 섞여 자라는 귀리를 뽑아내려고 갔다가 일은 잊어버린 채 보리 모개를 뜯어 구워먹느라 매운 연기만 피운다. 더러는 보리깜부기를 뽑아 먹는 친구도 있는데, 서리를 하거나 깜부기를 먹거나 입 주위가 새까맣기는 마찬가지였다.

보리가 익어 벨 무렵엔 모내기를 하고 마늘과 양파를 캐기도 하는 시기여서, 학교에서는 사나흘씩 농번기 방학을 해 학생들이 농사일을 도울 수 있도록 했다. 보리를 벨 때는 손목이 시큰시큰하고 허리도 끊어질 듯 아프다. ‘깔따구’라는 날벌레가 온몸에 달라붙어 몹시 성가시기도 하지만, 운이 좋으면 열대여섯 개나 되는 꿩알을 주울 수도 있었다. 때론 찾는 꿩알은 없고 까치독사가 혀 날름거리며 두 눈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어 기겁도 하지만….

 

보리는 베어서 사나흘 말렸다가 타작한다. 멍석을 깔아 보리뭇을 쌓고 원동기와 탈곡기를 차려 타작이 시작되면 기계장이(대개는 원동기와 탈곡기 소유자이다)가 탈곡기에 보리뭇을 풀어서 먹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털어져 나온 알곡을 가마니에 담아 갈무리한다. 탈곡기 뒤로 뿜어져 나오는 보릿대를 안아 날라다 더미를 쌓는 것은 아이들의 몫. 풋내 나는 보릿대는 여름 동안 잘 썩어 퇴비가 되고 가을에 다시 밭으로 돌아와 후세대 보리에 훌륭한 영양분이 된다.

보리타작 할 때 가장 힘들고 귀찮은 것이 까끄라기이다. 보리 껍질의 수염 동강인 까끄라기는 몹시 껄끄러운 데다 옷에 달라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고, 바짓가랑이 안에 들어가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다리를 타고 위쪽으로 올라가 여간 성가시지가 않다. 더구나 까끄라기가 눈에 들어가거나 배꼽에 끼기라도 하면 그 고통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보리타작을 할 때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옷도 까끄라기가 잘 달라붙지 않는 소재로 입어야 했다.

그래도 보리타작은 재미가 있다. 풍성한 수확이 있고, 아이들은 쌓아놓은 보릿대 더미에서 뒹굴며 놀기도 한다. 탈곡을 하는 동안 원동기의 냉각수(말이 냉각수이지 기계가 돌아가는 동안 펄펄 끓고 있는 물이다)에 통째로 넣어 익혀먹는 마늘도 별미다. 탈곡이 끝난 뒤에는 아버지와 기계장이가 요미(농작물의 타작에 대한 요금으로 지불하는 쌀. 보리타작 요미는 당일 타작한 보리에서 준다)를 놓고 더 달라 못 준다 어김없이 승강이를 벌인다. 기계장이가 “겉보리 서 말이면 처가살이 안 한다는데….” 하며 아버지의 아픈 데를 찌르고 물러서면, 어머니는 돌아서서 담배를 꺼내 무는 아버지가 안타까워 “타작이나 사나흘 더 할 보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혼잣말을 하셨다.

 

 

탈곡한 보리는 집으로 날라 마당이나 도로변에 멍석을 깔고 얇게 펴서 볕이 좋은 날 하루나 이틀 정도 말린다. 보리를 말릴 때는 서너 번 저어줘야 하고, 닭이나 새가 와서 쪼아먹지 못하게 지켜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말린 보리는 일부는 공판에 내서 돈을 사고, 일부는 방아를 찧어 식량으로 쓴다. 보리방아를 찧으면 겨가 나오는데, 이것은 따로 담아놨다가 개떡을 만들어 먹었다.

보리농사를 끝내고 모내기도 마치면 어김없이 장마가 시작된다. 비가 오면 식구들은 부엌의 솥단지를 들어내고 솥뚜껑을 뒤집어 얹어 보리를 볶는다. 볶은 보리는 그냥 먹기도 하고 물을 끓일 때 넣기도 하며 미숫가루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그래서 비 오는 여름날에는 집집마다 보리를 볶는 냄새가 풀풀 담을 넘었다.

햅쌀이 나오기까지 주식은 당연히 보리밥이다. 학생들 도시락도 나라에서 혼분식을 장려하는 것과 상관없이 뚜껑을 열면 너나 나나 시커먼 보리밥이었다. 보리밥 먹으면 방귀를 자주 뀐다는데, 그때 방귀는 자주 뀌었을지언정 냄새가 독했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밥을 할 때 꼭 솥단지 한구석에 아버지가 잡수실 쌀 한 주먹을 따로 얹었다. 나중에 밥이 다 되면 우리 형제들이 몰래 부엌을 드나들며 두어 수저씩 떠먹는 바람에 그 쌀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기 일쑤였다. 그때는 보리밥만 먹는 것이 싫어 가난한 부모님 원망도 많이 했는데, 쌀 생산이 늘면서 뒷전으로 물러났던 보리밥이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단다.

 

 

보리밥을 먹을 때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보리를 모르는 아이들에게 아빠의 어린 시절과 보리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그러면 어디엔가 숨어있던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나와 이어진다. 한번 달라붙으면 좀체 떨어지지 않던 보리 까끄라기처럼, 보리의 추억은 내 몸과 마음 깊이 찰싹 달라붙어 있나 보다.

사진 제공 : 최수연(월간 '전원생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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