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에서 쓰는 글

상사 앞에서 '노'라고 말할 사람 몇이나 될까

몽당연필62 2008. 1. 2. 09:28

우리는 꿈꾼다. 모두가 '예스'라고 말할 때 나만은 '노'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기를. 우리는 또한 꿈꾼다. 모두가 '예'라고 말할 때 나만이 '아니오'라고 말하는 재수없는 상황은 제발 일어나지 않기를.

 

기업체 경영자나 상사의 대부분은 '예스맨' 직원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직원 자신의 의견을 소신있게 말하고, 경영자나 상사의 의견과 지시에 당당하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 바람이 어디 경영자와 상사만의 것이겠는가. 우리 '아랫것'들도 사실은 '아니오!'라고 외치고 싶어 미치겠다.

 

아무튼 경영자 혹은 상사는 직원들에게 평소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남들보다 앞서 변화할 것을 요구한다. 문제는 늘 빌어먹을 놈의 현실이다. 입 함부로 놀리기엔 현실이 결코 녹록치 않으며, 변화를 요구하는 사람이 사실은 가장 변화를 두려워하며 설득되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경영자와 상사를 통틀어 가리키는 '의사결정권자'와의 논쟁은 부하직원으로서 모험이며 직장생활을 곤고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쉽게 말하면 찍히기 십상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많은 경우 부하직원은 내키지 않으면서도 '예' 한 마디로 입을 다물어버린다. '굵고 짧게'보다는 '가늘고 길게'의 길을 택한다.

 

지금 우리 부서에서도 경영자와의 사이에 한 가지 딜레마가 있다. 실무자들은 A안에 절대찬성하는데 경영자는 B안을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이야기 했다. 실무자들은 2008년 한 해 동안의 콘셉트(이 말을 사용할 때마다 속상하다. 콘셉이야 콘셉트야? 아니면 컨셉이야 컨셉트야?)로 A안을 적용할 계획이라고. 하지만 경영자께서는 B안이 옳으며 A안은 아무런 가치가 없단다.

 

여기서 마음이 요동친다.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실무자 입장에서 "아닙니다!"라고 말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랜 체험에서 굳어진 '경영자와의 모든 논쟁은, 내 주장이 옳다하더라도 결국은 제무덤을 파는 짓이다'라는 보호본능이 먼저 나 자신을 감싸버린다. 더구나 경영자께서 "A안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데 대꾸를 하고 논쟁이 길어지면, 그 논쟁은 소모적인 것이 되고 나는 싸가지없는 부하직원이 될 뿐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격렬한 저항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뿐.

 

한참 동안의 회의(사실은 일방적인 업무 지침 시달)가 끝나고 일어서는데, 경영자께서 "A안 그건 아니야. B안에 대해 잘 생각해봐." 하며 다시 한번 못을 박는다. 나는 "예, 알겠습니다." 하며 굽실거리고는 수첩을 챙겨 일어설밖에. 여기서 '알겠다'는 말은 A안을 포기하고 B안을 수용하겠다는 항복선언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나를 비롯한 실무자들의 의견이 틀렸을 수도 있다. 경영자는 세상을 보는 넓이와 깊이가 실무자와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사안에 대해 실무자만큼 정확하게 아는 사람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그리고 우리 '아랫것'들은 바랄 뿐이다. 의견을 말하라고 해서 막상 말을 하면 꼴통에 싸가지까지 없는 놈으로 찍히는 불상사가 제발 일어나지 않기를. 그러면서 위안을 삼는다. "상사 앞에서 감히 '노'라고 주둥아리 놀릴 간뎅이 부은 월급쟁이가 몇 놈이나 되겠어?"라는 말로.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