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그리고 단상

차마 버리지 못한 음반, 설렘으로 다시 만난 턴테이블

몽당연필62 2014. 3. 20. 15:39

 

버려야지 버려야지 하면서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먼지만 쌓여가는 것이 있었다. 다시 꺼내서 사용할 일 없을 터이니 케이스에 담긴 채 빛을 보지 못한 지 어언 이십여년. 총각시절 즐겨 들었던 수십 장의 음반(레코드판)들은 이제 CD와 MP3와 온라인 음원사이트에 밀려, 비닐 커버마저 삭아서 버석거리며 버려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반을 버린다는 것은 나의 치열했던 젊은 시절을, 아름다운 감성들을 함께 떠나보내는 것이기에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할 따름이었다.
그러다 저건 자리만 차지할 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물건이라고, 이젠 정말 버려야겠다고 벼르던 며칠 전 어느날, 아내가 무슨 눈치를 챘는지 "당신, 그거 그렇게 아까우면 턴테이블을 사줄까?" 하는 것이었다. "사주면 고맙지." 대수롭지 않은듯 대답했지만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렸다. 승진시험 합격이나 문예작품 당선 통보를 받던 순간의 희열과도 같은 떨림이었다.
그리고 주문한 물건이 드디어 어제 도착했다. 가격은 단 8만원, 기능은 음반 재생과 AM-FM겸용 라디오 뿐. 그러나 가격이나 기능이 문제가 아니었다. 서둘러 퇴근해 포장지를 뜯고, 전원을 연결하고, 음반을 올리고, 카트리지를 음반에 내려놓는 모든 순간과 과정이 나에겐 설렘이었고 신성한 의식이었다.
어제 그렇게 20여년 만에 다시 폴모리아와 카라얀을 만났다. 오늘은 조용필과 해바라기를 만날것이고, 머지않아 베토벤과 모짜르트, 동편제 인간문화재인 강도근 명창도 먼지를 털고 걸어나올 것이다.
이사다닐 때마다 의미없는 짐이었을 뿐인 음반들을 버리자고 하지 않고 나에게 다시 아날로그의 감성과 감동을 안겨준 당신, 고맙소!

 

/몽당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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